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167)
1167화 단숨에 해치우다
“도망치는 재주를 퍽 열심히 배운 모양이지만, 언젠가는 도망칠 수 없는 날이 오기 마련이지.”
그 애꾸 노인은 초휴에게 죽은 천지통현 무사 중 가장 억울한 사람일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반항이라도 해 보았으나 그는 고작 일 초를 넘겼을 뿐, 다음 이 초조차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가 죽자 나머지 극락마궁 무사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전주는 천지통현의 강자이자 극락마궁에서도 한 가닥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에게 이 초 만에 죽은 것이다. 저건 괴물이 아닌가?
일순간에 극락마궁 측은 전의를 잃었다. 적잖은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이 도망치자 초휴 측은 더욱 사기가 올라서, 그가 지시하기도 전에 쫓아가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극락마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오랜 세월 기세등등하게 남역을 누빈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보니 극락마궁도 그리 두려운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는 반 시진이 못되어 끝났다. 왕일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다가왔다.
“선배님, 분전에 있던 자들을 전원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극소수 도망친 자들이 있긴 합니다만.”
초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 이제는 극락마궁 총단으로 가자.”
만일 초휴가 처음부터 총단을 공격하자고 했으면, 모두 자신들을 개죽음시킬 속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한바탕 일방적인 살육을 벌인 지금은 다들 흥분해 있었다.
쉽게 말해서 들뜬 것이다. 극락마궁도 별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는가. 쇠뿔도 단김에 뽑아 버리고 싶었다.
왕일지는 조금 주저했다.
“선배님, 나머지 분전 둘은 그냥 두실 겁니까? 극락마궁의 날개부터 우선 꺾어 버리면 위협이 많이 줄어들 텐데요.”
초휴는 담담히 말했다.
“이번 습격이 성공한 것은 극락마궁의 방심 때문이야. 그들은 너를 뒤쫓으려고만 했지, 우리가 이렇게 큰일을 벌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분전이 공격당했을 때, 이미 총단으로 소식이 전해졌을 거야. 지금쯤 상황을 다 알고 있을 텐데, 타 분전을 공격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총단을 단숨에 해치우는 게 나아.“
* * *
초휴의 추측이 옳았다. 극락마궁 총단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공손 장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극락마궁의 고참이었고 강호 경험도 풍부했다. 명현우의 분전이 전멸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런 소식까지 들어오자 공손 장로는 똑똑히 상황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처음부터 극락마궁을 노리고 판을 짠 것이다! 천하에 이리 많은 우연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분전 두 곳이 전멸하다니.
그 왕일지라는 놈이 운이 그토록 좋을 리가 있겠는가. 몇 년 동안 쫓겨 다니던 자가 신의 도움이라도 받은 것처럼 단번에 이렇게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다고?
단숨에 분전 둘이 사라졌으니 극락마궁으로서는 근골이 상한 것과도 같은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공손 장로는 차마 더 추측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안비풍의 주천마신대진 연구를 중단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안비풍의 폐관 밀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비풍이 문을 열고 나왔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공손 장로를 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기에 표정이 그 모양인가?”
안비풍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은은하게 흥분한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공손 장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급하게 그간 일어났던 일을 안비풍에게 쭉 이야기했다. 공손 장로의 말을 모두 들은 안비풍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다인가?”
공손 장로는 멍해졌다. 그게 다냐니?
“궁주님, 상대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 숨어 그런 짓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놓고 일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분명 대규모로 움직일 게 틀림없습니다. 어찌 상대하면 좋겠습니까?”
안비풍은 담담했다.
“어찌 상대하냐고? 오는 족족 죽이면 되지. 한 명이 오면 하나, 둘이 오면 둘!”
공손 장로는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이런 소릴 하는 걸까?
* * *
정오가 되었다. 해가 쨍쨍하게 높이 떠오를 시각이건만, 극락마궁 총단이 자리한 골짜기는 음침하고 어두웠다. 허공에는 짙은 먹구름에 마기까지 뭉텅이로 떠 있어 몹시 괴이해 보였다.
초휴의 세력이 그곳으로 진입하자 길의 바위나 벼랑마다 온갖 요사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마신, 짐승의 몸에 사람 머리가 달린 괴물······ 춤을 추는 천녀도 있었다. 그러나 그 천녀의 하반신은 사람이 아니라 흉측한 거미 몸뚱이였다.
그 기괴한 풍경에 전의가 솟구쳐서 기세등등하던 사람들도 겁을 먹었다. 극락마궁에 호감을 품은 남역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같은 군소 세력은 물론, 극락마궁과 교류하는 대문파라 해도 총단에 찾아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산골짜기 끄트머리에 새카맣고 거대한 성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괴수 한 마리가 땅에 엎드려 있는 듯했다.
안비풍이 유유자적한 동작으로 성 머리에 나와 앉아 있었다. 몇만 명의 무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는 그의 눈빛은 몇만 마리의 개미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느리군. 너무 느려. 본존이 기다린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오다니.”
안비풍의 목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여기에 온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울렸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극락마존 안비풍을 누가 모르겠는가. 남역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미치광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진정한 악인은 두렵지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안비풍처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미치광이인 법이다.
안비풍의 위명, 혹은 악명은 온 남역에 자자했다. 이제 그를 직접 마주한 남역 무사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안비풍은 발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극락마궁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면서 왜 그렇게 움츠리고들 있나? 신분을 밝혀라. 그 왕일지인지 뭔지 하는 놈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는 건 잘 안다. 개미 한 마리의 힘이 아무리 큰들 코끼리를 들이받을 엄두를 어찌 내겠냐는 말이다.”
왕일지의 얼굴에 수치심과 분노가 드러났다. 그러나 상대는 무선 강자였다. 아무리 깊은 원한이 있다 한들 욕 한마디 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안비풍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무선 지존 강자 앞에서 그는 개미에 불과했다.
초휴도 더는 위장을 그만두고 가면을 벗어 버렸다.
“안 궁주, 또 만났군. 나를 붙잡아 진청제의 행방을 알아내려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내가 직접 찾아왔소이다. 놀랍지 않소? 매우 기쁠 듯한데 말이지.”
안비풍은 벌떡 일어섰다. 초휴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싸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사람이 초휴였다니,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이 아닌가.
극락마궁은 그간 무수한 사람들과 척을 졌다. 남역 대문파도 있고, 낭인 강자도 있고, 고존도 있었다. 그런데 동역 사람 초휴라니? 그것도 아직 무선에 오르지도 못한 자가.
안비풍은 초휴에 대한 인상이 매우 깊었다. 얼마나 깊었는가 하면 초휴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달 내내 했을 정도였다.
동천복지에서 모백상은 방응룡을 죽이려는 판을 짰다. 성공하면 동역은 손안에 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누구 하나 실수하지 않은 그 싸움에서 하필 안비풍 자신의 출수가 실패하고 말았다. 무선에도 오르지 못한 후배 무사 초휴한테 막혀 방응룡을 죽이는 데 실패한 것이다.
모백상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도잠명이나 다른 사람들도 미치광이로 이름난 안비풍을 굳이 조롱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비풍 자신에게 그 일은 씻기 힘든 치욕이었다.
초휴가 정체를 드러내자 놀란 사람은 안비풍만이 아니었다. 왕일지와 남역 무사들은 더 경악했다.
그간 초휴의 신분을 이래저래 추정해 보기는 했다. 그리고 초휴 역시 남역 무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마 극락마궁에 엄청난 원한을 품은 낭인 고수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남역 출신이 아닌 동역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동역 무사가 남역까지 와서 마도를 제거하자느니 남역 무림의 평화를 되찾자느니 떠들었단 말인가? 어째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속았다고 해도 이제는 물러날 길이 없었다. 성벽 위에 선 안비풍이 대소했다.
”초휴, 정말 본존에게 큰 기쁨을 주는구나. 동역까지 어떻게 가서 너를 찾을지 근심하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제 헛짓거리는 집어치우고 네 배후에 있는 자를 나오라고 해라. 너도 머저리는 아니겠지. 머저리는커녕 아주 교활해. 이런 폐물 쓰레기들을 이끌고 극락마궁을 치러 오다니? 이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너도 잘 알 게 아니냐. 배후가 대체 누구냐? 능소종이냐, 아니면 너의 고존 사부냐?“
“배후는 나다!”
하늘에서 정순한 마기가 떨어져 내렸다. 원공성과 천마궁의 천지통현 장로 여럿이 새처럼 날아 내려와 초휴 곁에 섰다.
원공성을 본 순간 남역 무사들은 순식간에 끓는 냄비처럼 시끄러워졌다.
그들 편에 선 지원군이 천마궁이었다니! 극락마궁과 같은 마도, 그것도 남역 절정급 대문파 천마궁!
그러나 놀라기는 했어도 안도와 기쁨이 더 컸다. 천마궁이 나선 이상 승률이 훨씬 올라간 셈이니까.
“원공성! 지금 이게 천마궁의 뜻이냐?”
안비풍은 그를 노려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동천복지에서 내가 저 애송이를 죽이려 할 때도 네가 막았겠다. 이제는 아예 둘이 손을 잡고 극락마궁을 노려? 설마 그때부터 극락마궁을 칠 계략을 꾸몄던 건가?”
원공성은 담담했다.
“계략은 무슨! 너희 극락마궁이 횡포를 일삼으며 남역 무림의 법도를 어겨서 만인의 분노를 사서 이렇게 된 거지. 우리 천마궁은 너희와 같은 마도 일맥이다. 너희 극락마궁은 남역의 법도를 어김으로써 마도 일맥 전체를 모욕했다! 오늘 우리 천마궁은 사사로운 이득 때문이 아니라 마도 일맥의 명성을 지키려고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남역 무사들이 원공성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천마궁의 명성이 극락마궁만큼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공성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래도 역시 극락마궁과는 다르구나 싶었다.
“원공성,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읊어대는 것이냐? 위선적이군. 너무 위선적이라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안비풍은 하찮다는 듯이 냉소했다.
“너희 천마궁이 지금껏 마도 정통을 자임하면서 우리 극락마궁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싸우면 싸우는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차라리 극락마궁과 마도 제일의 도통을 놓고 다투겠다 했으면 조금은 높이 쳐 주었을 거다. 하지만 뒷구멍으로 중상모략을 벌여 놓고 인제 와서는 당당하게 대의를 내세우며, 폐물 찌꺼기들을 끌고 와서 극락마궁을 멸문하겠다고? 정말 갈수록 꼴불견이군! 그렇게 죽고 싶다면 좋다. 내가 소원을 들어주지!”
원공성은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안비풍의 어조에는 추호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지 않은가. 뜻밖의 상황에 다소 놀랐을 뿐이지, 자신이 만만하니 말이다.
그는 극락마궁의 최고위급 전력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인원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다른 남역 무사들의 수도 많았다.
이대로 단숨에 뚫고 들어가면 초휴가 말했듯이 천마궁은 큰 손실을 보지 않고 극락마궁을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안비풍은 무슨 자신감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걸까?
초휴가 말했다.
“원 궁주, 이것저것 궁리할 때가 아닙니다. 이미 출수한 이상 정면 공격 하는 수밖에 없어요. 진법사도 함께 데려오셨겠지요? 우선 극락마궁의 진법부터 파괴합시다!”
그때 안비풍이 냉소했다.
“지금껏 우리 극락마궁이 진법에만 의존하다 뚫리면, 쳐들어오는 적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나? 좌구량 그 늙은이의 이름을 팔아서 버텨온 건 너희 천마궁이지. 거북이처럼 천마궁에 틀어박혀서 제대로 얼굴도 못 내미는 주제에!”
말을 맺은 안비풍이 훌쩍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원공성과 초휴 앞에 섰다.
처절하기 그지없는 귀신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찰나 시커먼 마기의 안개가 두 사람을 완전히 가둬 버렸다. 원공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계획대로 합시다. 초 소협,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오. 쳐라!”
그의 일갈과 함께 천마궁 무사들이 극락마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역 무사들도 왕일지의 지휘하에 극락마궁 무사들과 뒤엉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