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253)
1253화 천라보찰
법명이 성격은 융통성이 없어 뻣뻣하지만 초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먹을 정도로 둔치는 아니었다.
화들짝 놀란 법명이 물었다.
“우리를 도와 싸울 작정인 거요?”
“먼젓번 대라신궁에서 귀측이 범교 때문에 곤란에 처했을 때 내가 도왔었지요. 지금도 귀측의 상황이 당시와 별 차이 없는 것 같으니 이번에도 내가 도와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무래도 나는 불문과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아니 그렇소?”
물론 초휴가 정말로 불문과 인연이 깊은지는 법명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분명한 건, 이 일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법명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
“초 공자,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오. 현재로선 천라보찰 내에서 그런 큰일을 결정할 만한 분은 화생각 상좌 제선선사(濟善禪師)이시니, 내가 초 공자를 그분께 데려가는 게 좋을 듯하오.”
“그럼 부탁 좀 합시다.”
천라보찰 총단은 서역 동부 한가운데 있었다.
화생각은 이곳에 있지 않았으나, 제선선사는 잠깐 세존을 대신해 천라보찰의 중대사를 돌보는지라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다.
이미 초휴는 화엄각 건물을 보고 그 웅대함에 입이 떡 벌어졌었다. 하지만 이제 천라보찰 총단을 보니 웅대함의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천라보찰의 전경이 초휴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자신이 불문의 성지 영산에 발을 들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이윽고 황금과 유리로 뒤덮인 거대한 사찰 건물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휘황찬란한 금빛 울타리가 대지 위로 둘러쳐져 있어, 천라보찰로부터 수 리 반경 내에 들어선 이들에게 가없이 성스러운 불광의 세례에 몸을 내맡긴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건물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부분은 중심에 있는 대웅보전으로, 무슨 기저부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걸 보니 하단에서 무수한 진법이 떠받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런 진법은 아무리 많이 구축해봐야 대전의 방어에는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초휴의 눈에는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의 입가에 냉소가 감돌았다. 사실 패도적인 걸로 따지자면 대라천 전체를 통틀어 천라보찰 만한 종문이 또 있을까.
그 외 세 지역의 경우, 설령 도문 삼청전이 버티고 있는 북역조차도 도문만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그 외 다른 계통의 무사들도 포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독 서역만은 천라보찰로 대표되는 선종과 범교 일맥을 제외한 다른 유파 및 계통 무사들은 거의 발도 못 붙이게 할 만큼 폐쇄적이었다.
초휴가 보선군에서 천라보찰 총단으로 오면서 거쳐 온 주부들만 봐도 하나같이 사찰과 승려를 절대 신봉하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일반인과 말단 무사들은 군소 사찰들을 섬기고, 그 군소 사찰들은 천라보찰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니 결국 천라보찰이 이토록 대단한 교세를 누리게 된 것이리라.
이때 천라보찰 건물을 가리키며 소개하는 법명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초 공자, 저길 한번 보시구려. 저게 바로 우리 천라보찰의 총단이라오. 우리 불문이 만년 전, 막 서역에 당도했을 당시에 이곳은 허허벌판에다 생기라곤 전혀 없는 삭막한 골짜기에 불과했지.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광명이 세상 중생을 두루 비추는 불문의 성지로 거듭났다 이 말이외다!”
초휴는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눈앞의 저 번드르르한 성지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의 천라보찰이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질렀을지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저 건물이 저절로 세워졌을 리가 있겠는가.
지난 일만년에 걸쳐 자그마치 서역 절반 땅의 수많은 백성과 말단 무사들의 고혈을 짜내고 노고를 착취해서 완성된 성지가 뭐 그리 자랑스럽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찬란히 쏟아지는 성결한 광채 속에 은은히 깃든 혈선 한 가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찬탄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공손히 말했다.
“과연 불종의 성지 천라보찰다운 위용입니다. 실로 웅장하고 비범하기 이를 데 없군요.”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은 법명은 초휴를 문 앞에서 대기하게 했다. 일단 자기가 먼저 들어가 손님의 방문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며 근엄하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초 공자, 안으로 드시지요.”
그 목소리는 그저 근엄하고 묵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심령을 뒤흔드는 효과까지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기만의 말도 이 웅혼한 음성 앞에는 가식의 껍질이 낱낱이 벗겨질 것 같았다.
하지만 초휴의 심경 수련은 결코 평범한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뻔뻔한 낯가죽 두께 하며,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허언을 일삼는 재주는 명불허전이니 말이다. 해서 그 신령스럽기까지 한 목소리도 초휴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불문 제자들이 보란 듯이 전신에 불광을 번뜩이며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초휴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그중 최약체가 천지통현이고 무선도 꽤 여러 명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들이 천라보찰이 보유한 무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화생각 및 화엄각처럼 맨 앞 열에 서 있는 각원의 경우, 상좌들은 기본이 무선이었고, 더욱이 화생각은 상좌 외에도 무선이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이렇게 많은 불문 강자들이 떼로 모여서 쏘아보고 있으면 오금이 저려 허둥대기에 십상일 터였다.
그러나 초휴는 워낙 이런 장면에 익숙한 터라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좌중을 둘러보더니 두 손 모아 꾸벅 인사를 건넸다.
“동역의 초휴가 여러 대사님께 인사드립니다. 법정 대사님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맨 앞 열에 선 여러 노승 가운데 젊은 얼굴의 법정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법정은 대라신궁에서 나올 때만 해도 무선 삼중천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오중천이 되어있었다.
천라보찰은 하계에서부터 전승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의 대파이니만큼, 무선 강자의 경지를 끌어 올릴만한 비법 정도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법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옆의 회백색 머리카락을 기른 금색 승포 차림의 노승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화생각 상좌이신 제선선사이시오.”
제선선사라 불린 눈앞의 노화상은 매우 선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자애로운 인상 뒤에 무시무시한 면모가 숨겨져 있음을 초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화생각은 천라보찰 산하의 가장 강력한 선원 중 하나로, 특히나 범교 최강이라는 시바전도 맥을 못 추게 만드는 전투력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범교가 전적으로 정련불광에 대항하기 위한 멸세지화를 고안해 냈겠는가. 그렇다면 화생각의 수장인 제선선사의 손은 수많은 범교 무사들의 피로 흥건히 얼룩졌을 게 분명했다.
제선선사가 초휴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나직이 물었다.
“방금 법명의 말을 듣자니, 그대가 우리를 도와 범교를 치겠다고 했다면서?”
초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범교는 나의 숙적이기도 하니까요!”
초휴가 거칠게 손을 휘젓더니 얼굴에 노기마저 띠었다.
“일전에 범교 비슈누전 환혹천왕궁 궁주가 뚜렷한 명분도 없이 내게 시비를 걸어오기에 처리를 했습니다. 그 일은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그 후로도 신임 비슈누전 전주 신가라가 거듭 저를 공격해왔지요. 아시다시피 대라신궁에서 내가 법정대사와 함께 그자를 참살했고 말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범교는 내게 치를 떨고 있습니다. 제선선사께서도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급기야 얼마 전에는 시바전 부전주 음타라가 남역 천하검종까지 앞세워 또 나를 건드렸다는 말입니다. 계속 이런 식이니 내 어찌 범교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범교에 치명타를 가할 기회만 엿보던 중입니다. 절대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억울한 일을 모조리 다 떠안은 사람인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초휴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제선선사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대가 대라신궁에서 법정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당시 그대에게 그럴 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무얼 내세워 우리와 연합하려는가?”
초휴가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비장하게 답했다.
“이제나저제나 내게는 그럴 만한 실력이 있으니까요! 나 초휴는 무선 삼중천의 실력을 갖췄지만, 오중천까지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내 밑에 무선 일중천 강자만도 두 명이며, 황천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규모의 세력을 가졌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승려 중 일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이 비록 서역 출신이긴 하나 다른 세 지역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초휴가 거느린 세력은 단순히 황천각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능가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동역에 무슨 대규모 전란이 벌어졌거나 그럴 기미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단독으로 그토록 엄청난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걸까?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초휴의 바람과는 달리, 제선선사가 고개를 저었다.
“웬만한 군소 종문에 맞서기는 충분할지 모르나 범교를 치기에는 역부족이오.”
초휴도 그를 따라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아까 법명 대사가 설명하길, 천라보찰은 지금까지 출수를 미룬 채 범교와 대치 상태라더군요. 이게 다 전면전이 두려워서가 아닙니까? 그 바람에 천라보찰도 타격을 입어, 정작 상계와 하계가 이어질 때 최상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그러는 것이 아니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천라보찰과 범교 간 힘의 균형은 이미 깨졌습니다. 승부의 추는 천라보찰 쪽으로 기울었으니, 결정타 한 방만 날리면 되는 겁니다.”
초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 초휴가 바로 그걸 하겠다는 겁니다! 범교에서 시바전과 범천전의 실력에 비하면 비슈누전은 상대적으로 좀 약한 편이지요. 이 세 신전이 서역 서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귀측에서 범교에 대해 모조리 꿰고 있는 만큼, 범교도 귀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죠. 무작정 전면전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귀측에서 모든 역량을 전면전이 벌어진 주요 전장에 집중시켜 범교의 전력 출수를 유도하면 내가 후방에서 비슈누전을 습격해서 궤멸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전 세 개 중 두 개만 남게 되는 겁니다!”
좌중의 승려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초휴가 제시한 이 방법은 한번 해봄 직하다 싶었던 것이다.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되었다.
범교의 한 개 신전을 우선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게 설령 최약체인 비슈누전일지라도 범교의 한쪽 날개를 꺾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날개 잃은 범교는 휘청대다가 결국 추락하고 말 터였다. 이때 어느 노승 하나가 참았던 질문을 쏟아냈다.
“말이야 쉽지만 비슈누전이 그리 호락호락 무너질 리 있겠나? 아무리 최약체라도 범교 내 온갖 기이한 기공과 비법, 진법 등을 보유한 신전이니 말이네. 일단 전면전에 들어가면 필경 저들이 비슈누전부터 사수하려 들 터인데, 자네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네가 수하들을 대거 이끌고 동역에서부터 이동하자면 서역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즉시 발각될 걸세. 저들을 기습하기도 전에 말이지. 저들이 눈뜬 봉사도 아니고, 그렇게나 요란한 움직임을 설마 감지 못할까?”
신랄한 지적이었으나 초휴는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쳤다.
“귀측에서 전력 출수를 한다면 소위 쓸 만한 범교 강자들도 죄다 최전선으로 나와 맞상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비슈누전에 남아 지킨다 한들 그자의 실력이 얼마나 강하겠소이까? 육중천 이하로는 내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분명 ‘습격’이라 말했습니다. 백주 대낮에 정정당당히 통고하고 치겠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은밀히 움직여야 할 테지요. 십만대산으로 우회하여 서역으로 진입한 다음 비슈누전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겁니다.”
“그러나 남만의 만족들을 어찌 감당······ .”
노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초휴가 끼어들었다.
“그 점이라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니까요. 자, 이로써 나는 이 먼 서역 천라보찰까지 불원천리 달려와 내 머릿속 계획과 속내를 모조리 털어놓았습니다. 이제 대사님들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할 겁니까, 말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