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255)
1255화 길을 빌리다
눈앞의 저 노인을 이곳이 아닌 외부 어느 도관에서 봤더라면 으레 도문 대파의 장문이나 종주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자가 만족들 사이에서 위명이 쟁쟁한 노만왕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대뜸 자기가 단단히 잘못 짚었다는 자책감이 그의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당연히 전형적인 만족을 겨냥한 수법을 준비해왔건만, 이제라도 방법을 바꿔야 할 듯했다.
더불어 그는 흑걸과 녹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왜 이런 사실을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 둘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잘못을 눈치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였다.
노만왕은 처음부터 줄곧 저런 모습이었기에 그들로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휴가 미리 물어본 것도 아니었잖은가.
노만왕은 매우 표준적인 중원 말로 말했다.
“젊은 친구들이 꽤 멀리서 오셨군. 일단 자리에 앉으시오.”
만족 부락 한가운데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라천 무사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만족과 대면하자 초휴는 기분이 실로 묘했다.
하도 당혹스러워서 여기 오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온갖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가 막막했다. 그러자 노만왕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친구가 당황한 모양이군. 그럴 만도 하지. 나를 만난 대라천 무사치고 그런 표정을 짓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까. 일만년이 지나도록 여기 만족들은 몸만 커지고 머릿속은 그대로였지. 그래도 그들 중 개화된 자가 조금은 있지 않겠는가. 노부가 바로 그런 경우인 게지. 노부가 유년 시절에는 우리 일족 중 허약한 축에 속했네. 물론 우리 일족 사람들에 비하면 그랬다는 게지. 하여 전사는 포기하고 제사장이 되기로 마음먹고, 온갖 잡다한 비법들을 들고 파기 시작했네.”
“그러던 중 역인 무사 하나를 생포했는데 그에게 부쩍 흥미가 생기더란 말이지.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지. 나는 일 년을 걸려 중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네. 그게 가능한 만족이 단 한 명도 없던 시절에 말이지. 게다가 나는 만족의 전사가 아닌지라 몸에도 그리 많은 토템 문양이 없었고 몸집도 역인과 비슷했지. 얼핏 보면 피부가 좀 검은 역인으로 보일 만한 외양이었어. 그래서 바깥세상 한번 구경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지금 노부가 생각해도 내가 그때 참 대담했구나 싶네.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겼으니 말일세.”
“직접 확인한 바깥세상은 광대하고 근사했네. 나는 역인들이 발전시켜온 무도, 진도(陣道), 단도(丹道) 등과 같은 것들의 웅대함과 심오함에 끊임없이 매료되었지. 수년에 걸쳐 내가 몸담았던 종문만도 한두 곳이 아니었어. 듣자니 자네는 황천각 군수라면서? 그럼 나를 선배라 불러도 되겠군그래. 내가 한창 동역을 주유하던 시절에 황천각에 가입해 원황경(元皇境)을 맡기도 했었으니까. 남역에서는 천하검종에 가입해 검도를 익혔네. 극락마궁에서는 마도 비법을 익히기도 했고 말이지.”
“그렇다고 긴장할 건 없네. 자네가 극락마궁을 멸문했다는 건 나도 알지만 개의치 않으니까. 나도 그곳을 혐오했거든. 그들의 무도가 이만저만 편협하고 사특해야 말이지. 서역 유람 시절에는 어느 사찰에도 들어가지 않았네. 그 융통성 없는 승려들이 내가 마공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으려 했거든. 마지막에 간 곳이 북역이었고 영보관에 가입하여 영보하광(靈寶霞光)을 수련했네. 영보관에 머물었던 때가 나로서는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소중한 시절이었지. 그전에는 줄곧 역인들이 생령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존재라고 생각했네. 툭하면 서로 싸움을 일삼고 상대를 음해하고, 심지어 아무런 이해관계도 얽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악의를 품고 상대를 해치려 드니 말일세.”
“그러다 영보관에 가서야 사문(師門)이라는 게 뭐고, 무엇이 가족인지 알게 되었네. 하지만 결국 거기서도 떠나야만 했지. 왜냐하면, 십만대산에도 내 가족이 있었으니까. 자, 이로써 노부에 대해서는 다 말했으니 자네 얘기를 들을 차례로군. 우린 피차 다 같은 사람이네. 자네가 여전히 신의 사자 어쩌고 하면서 나를 기만하려 들면, 오늘 나산부에서 멀쩡히 걸어 나가기는 어려울 걸세.”
노만왕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솔직하고 단순한 일반 만족들과는 달리, 심계가 깊고 노련한 대파의 수장과도 같은 면모였다.
초휴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공수의 예를 취해 보였다.
“동역의 초휴가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라보찰과 연합해 범교를 습격할 생각입니다. 범교의 눈을 피해야 하니, 좀 우회하더라도 십만대산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산부에 온 것은 길을 빌리고자 함입니다.”
만약 노만왕이 전형적인 만족이었다면 대충 얼버무려서 넘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눈앞의 저 노인네는 오랜 세월 대라천의 네 개 지역을 두루 거치며 대표적인 대파들의 절기만을 골라 섭렵한 능구렁이인 것이다.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진작에 접는 게 좋을 터였다. 더욱이 노만왕의 실력은 보통 수준이 아닐 게 뻔하지 않은가.
그의 경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칠중천 이상은 되어 보였다. 만족 특유의 강건한 육신까지 더해진다면 실제 전투력은 아무리 박하게 쳐줘도 팔중천 이상의 무선에 버금갈 수준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압도적인 실력의 우위를 점한 인물한테 어설픈 잔수작을 부리려 들었다가는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이실직고하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노만왕은 초휴의 말을 듣더니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범교와 천라보찰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가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눈앞의 젊은이가 천라보찰과 범교 간 전쟁에 끼어들어 직접 출수를 하려는 모양이다.
평범한 젊은이가 아닌 건 대번에 알아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노만왕이 잠시 생각 후 용골 의자를 고쳐 앉더니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단지 길만 빌리겠다면 노부로서도 간단한 문제지. 하지만 이건 자네한테는 매우 중요한 일일 테지. 역인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자네는 얻은 만큼 대가를 치러야만 하네. 길을 빌려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그 대신, 자네는 무얼 나한테 주겠는가?”
초휴가 바짝 정색하며 되물었다.
“선배님께선 무얼 원하십니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드리지요.”
그러자 노만왕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두 가지면 되네. 아주 간단하지. 일단 십만대산이 노부의 것만은 아닐세. 자네의 이 많은 수하가 한꺼번에 십만대산을 통과해 서역으로 가자면 도중에 부락을 몇 개는 지나야 하네. 내가 아무리 중재를 해준다 해도 자네 역시 저들에게 자네의 막강함을 증명해 보여야만 할 걸세.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우리 일족의 규칙에 따르면 주먹이 큰 자가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있네. 다들 보는 앞에서 우리 일족의 전사와 싸워 이겨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요구하는 물건들을 달라는 대로 다 줘야겠어. 병기, 전갑, 진법 재료, 금창약 등등 무사들에게 통상 필요한 자원들을 구색 맞춰 모조리 다 말일세! 물론 거저 달라는 건 아니야. 십만대산의 특산물과 거래를 하면 어떻겠나? 가격은 상식적인 선에서 타협하면 될 테지.”
초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초휴가 뜻밖에도 시원스럽게 나오자 노만왕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바깥세상의 대종문들은 만족과 거래를 해오면서도 공급량을 빠듯하게 조절해 왔다. 만족이 무섭게 치고 올라올 것을 경계한 조치였다.
심지어 만족들의 순진함을 악용해 품질이 조악한 것들을 주면서 속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엄연히 바깥세상에 속한 자이니만큼, 노만왕은 으레 초휴가 수량에 제한을 둘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뜻밖으로 선뜻 응하자 노만왕은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젊은 친구, 나를 속이려는 건 아닐 테지? 정작 길은 잘 빌려서 왔다 갔다 한 다음,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 생각은 아닌가 말일세.”
힐문하는 노만왕의 눈빛이 조용히 험악한 빛을 띠어갔다. 그러자 초휴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평판이 대라천에서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신용 하나는 확실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니 이런 큰일도 벌일 수 있는 게지요. 사실 선배님이 과도하게 어려운 요구를 한 것도 아니니까요. 흑라부가 보유한 병기와 전갑도 죄다 내가 제공한 것들입니다. 심지어 흑라부 인근의 부족들이 사용하는 전갑 재료들 역시 내 손을 거쳐 간 것들이고요. 여기에 물건을 공급하게 된들 거래처 목록에 노산부 하나 더 추가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오리발 같은 걸 내밀 필요가 무에 있겠습니까?”
노만왕이 반문했다.
“장차 우리 부족이 막강해져서 역인들에게 위협이라도 가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노만왕이 이런 질문을 던지자 초휴도 상대가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초휴는 대라천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그간 역인과 만족 간의 싸움에 휘말려 만족들을 살육한 적도 없었다. 역인과 만족 중 어느 쪽도 편들 생각이 없음은 당연했다.
따라서 앞으로도 양측이 어떻게 치고받건 간에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물론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짐짓 정색하며 이렇게만 말했다.
“내가 볼 때 기실 만족이나 역인이나 원래는 대라천 한 하늘 아래를 이고 사는 같은 식구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한 식구끼리 위협하고 자시고 할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선배님이 만족 출신이시라고 해서 여기 우리 역인 출신 무선 강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각자 몸담고 사는 터전이 좀 다르다고 해서 근본이 같다는 사실도 도매금으로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솔직히 역인 종문들 간에도 툭하면 싸우고 죽이는 판에, 가끔 만족과 다툴 일이 좀 생기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사람을 볼 때는 두 종류로만 구분합니다. 친구가 아니면 곧 적인 게지요. 범교는 이미 수차례나 나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나에게 있어 적입니다. 반면, 흑라부는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해줍니다. 나산부도 내게 길을 빌려줄 테고요. 따라서 두 부족 다 나의 친구인 셈이죠. 친구 사이에 무슨 위협 따위를 걱정하겠습니까.”
초휴의 현란한 언변은 평정을 유지해오던 노만왕의 심경에 조약돌 하나를 던진 셈이 되었다. 일절 흔들림 없던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만족인 그는 애당초 좋은 마음이라고는 전혀 없이 마구잡이로 역인 종문에 뛰어들었다. 순전히 역인의 공법이나 병기 및 단약 제련 비술 등을 훔쳐 배울 생각이 전부였고, 그걸로 역인들을 대항하는 데 쓸 생각이었던 거다.
그러나 영보관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사부와 사형, 사제들에게 깊이 감화가 되고 말았다. 그다지 착실하지는 않아도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형제들이 그를 진심으로 보듬어 준 덕에, 그의 심중에 깊이 박혀있던 원한과 편견은 어느샌가 녹아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산부로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역인에 대해 나쁜 편견이 없는 만족은 오직 자기 한 사람 정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족들은 어떻게든 역인들에게 빼앗긴 땅과 터전을 되찾을 생각으로 그들을 적대시했다. 역인들도 만족을 야수와 별 차이 없는 미개한 종족 취급하며 시시각각 그들의 굴기를 경계했다.
그러니 여태 남만왕이 겪어온 역인 치고 만족에 대해 진정으로 편견이 없는 자는 초휴가 유일했다. 이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대라천에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는 실로 드물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초휴는 남만왕의 태도가 처음에 비하면 꽤 호의적으로 변했음을 느꼈다. 이에 그도 진지하게 말했다.
“누구나 다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저도 꽤 의외라고 생각하던 중입니다. 선배님은 역인에 대한 적개심이 거의 없는 듯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