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264)
1264화 기운(氣運)에 대해 논하다
범교의 연구 결과에 맞는 구석도 있었으나 본원의 힘은 장악할 수 없는 게 확실했다.
일전에 음과 양의 본원이 인위적으로 융합되었을 때 생성되었던 파동이 초휴의 경지를 일중천 높여주기는 했으나, 그 대가로 그의 육신도 중상을 입지 않았던가.
이번 시도는 더욱 대담했다. 작심하고 음·양 본원의 힘을 견인하려 했으니까.
물론 한줄기 미약한 힘이 흘러나와 흩어지는 데 그쳤지만, 그조차도 지금 초휴의 실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범교가 연구해낸 비법은 몸의 속성을 잠시나마 변환시킴으로써 본원의 힘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는 나름의 쓸모가 있었으나 문제는 그 쓸모라는 게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자신의 힘이 이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강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수반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극양의 몸이 되었건, 극음의 몸이 되었건 간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초휴는 땅이 꺼질세라 길게 한숨을 내뱉다가 단약을 한 움큼 삼켰다. 일단 본원을 건드리는 시도는 이쯤 해서 잠시 멈추기로 했다.
어쨌거나 본원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은 재차 확인된 셈이었다.
장담컨대, 그것을 한줄기라도 빌려 쓸 수 있다면 정상급 신통에 버금갈 위력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청천조영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위력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애석하게도 그건 엄연히 인간의 힘이 아닐진대······.
범교가 본원을 연구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을 희생했다는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알 듯했다.
이때 길신라가 불쑥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인, 제가 뭘 좀 찾아냈는데 대인께 유용한 물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뭘 찾아냈는데 그러나?”
길신라가 종이 몇 장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비슈누전 노전주(老殿主)가 살아생전 알아낸 극비의 사실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교주님과 다른 전주 둘이서 함께 상의하고 연구한 것이기도 하지요. 사실 노전주님이 세상을 뜨고 신가라가 뒤를 이은 뒤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대인께서는 흥미를 느끼실 것 같아 가져와 봤습니다.”
과연 길신라, 이 범교의 반역자는 맡은 소임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지금 범교에 또 다른 길신라가 버젓이 행세하고 있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다시는 범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최소한 범교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초휴를 위해 공을 세워 여기서라도 재기할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반역자는 옮겨 탄 배에서 최선을 다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다. 심지어 예전 배에서보다 훨씬 더 몸 바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옮겨 탄 배가 출항한 이상, 퇴로가 끊긴 그로서는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거라도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그때야말로 뱃전 끝까지 밀려 바다로 떨어져서 물고기 밥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그가 건넨 종이뭉치를 살펴보니 뜻밖에도 퍽 참신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기운(氣運)’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선대 비슈누전 전주가 실력으로는 다른 두 전주에 미치지 못했는지 몰라도, 범교 내에서 박학다식하기로는 단연 일인자였다. 따라서 그가 연구해서 거둔 성과도 꽤 많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상고 대겁난과 지난 일만 년에 걸친 대라천의 변화 등에 기반하여 ‘기운’이라는 존재에 관해 연구했다.
천지에 사계절이 돌고 도는 것처럼 사람도 기운이 성할 때가 있고 쇠할 때도 있는 법이다. 선대 비슈누전 전주는 천지간의 인간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다른 만물이 성쇠의 순환을 겪듯이 인간도 똑같이 이를 겪기 때문이다. 다만 순환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다른 존재에 비해 좀 더 길다는 차이만 있었다.
상고 대겁난은 인간족을 겨냥한 기운 순환의 일환으로, 결코 파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상고 대겁난이 덮치기에 앞서 이미 적잖은 징조들, 이를테면 하늘에서 운석이 대거 떨어진다든지 대지진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전조 현상들이 있었다.
당시 영보관을 비롯한 소수의 종문만이 결연히 일어나 인간의 힘으로 천지의 대재앙에 맞서려 들었을 뿐, 그 외 대부분의 종문들은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리하여 결국 어찌 되었는가. 회피를 택한 무사들은 대라천의 존재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우르르 거기로 도망쳤고, 하계는 그렇게 버려졌다.
만약 당시 하계를 지레 포기하는 대신, 세력 간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한마음 한뜻으로 대재앙에 맞섰으면 어찌 되었을까?
회복 불가능한 최악의 치명타는 피한다는 전제하에 분명 대재앙을 잘 이겨냈을 테고, 새로운 기운의 시작과 함께 성세(盛世)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성함과 쇠함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기록에는 독고유아와 영현기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대라천 종문들은 그 두 사람이 하계에서 왔다는 사실만 적혀 있고, 그 밖에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대라신궁 내 진법에서 관찰된 원기의 수준에 의거해서 추정할 때, 하계 원기의 농도는 대라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옅었다. 심지어 만 년 전에 멸망한 상범천만도 못했다.
그러니 독고유아 및 영현기와 같은 존재가 그토록 열악한 조건의 하계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비슈주전의 선대 전주는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다. 그가 추측하길, 그 옛날 상범천 무사들이 대부분 그곳을 떠난 후, 하계에는 힘없는 일반인과 말단 무사 및 종문에서 인정을 못 받고 도태된 제자들만 남겨졌다.
따라서 그들이 손에 넣은 전승이라고 해봤자 처음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고, 전승부터가 불완전하니 실력도 정상적인 상황과 비하면 약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원래 기운이 인간족 전체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상범천에서 강자들과 천재들이 대거 떠난 바람에, 원래 모든 인간족에게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할 하범천의 기운이 비정상적으로 분할되었다.
그 결과, 그 기운이 죄다 한두 사람의 몸에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기운이 집중된 자들은 실력이 무한대로 치솟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독고유아와 영현기인 것이다.
한편, 대라천에서는 만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여러 현상을 통해 모두가 변화를 느끼는 중이었다. 예컨대 비경 같은 곳의 원기가 갈수록 옅어지고, 그 속도도 갈수록 빨라지는 사실만 봐도 그랬다.
이미 대라천의 기운이 성함에서 쇠함으로 전환되어 가는 추세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계를 탈출해야 했던 과거가 여기서 재연되지 않으려면, 모든 종문이 연합하여 분산된 기운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기운의 쇠락이 가져올 겁난에 대항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으니, 결국 선대 전주의 간언을 범교 교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불어 범천천 및 시바전 전주의 조소와 질시마저도 그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가 돌연 세상을 뜬 것도 알고 보면 이 일의 연구에 매진하느라 심신이 지친 것과 무관치 않으리라. 하지만 초휴가 보기에 범교 교주가 선대 전주의 간언을 무시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 자신이 교주였더라도 그런 간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대 전주는 범교와 천라보찰이 지난날의 모든 원한과 편견을 내려놓고 연합하여 함께 서역을 장악하길 바랐다. 그런 다음 서역을 기반 삼아 남역과 동역을 차례로 합병하고, 종국에 가서 북역의 도문과도 연대하여 도·불의 힘까지 합치길 원했다.
그러면 기운의 쇠락으로 인한 겁난을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기운과 관련된 선대 전주의 견해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범교와 천라보찰이 그간의 원한을 청산하고 연합하길 바랐다는 거 자체가 꿈과 같은 발상이 아닌가.
솔직히 범교가 그걸 원한다고 해서 천라보찰도 기꺼이 그리할 거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초휴는 일단 이 사실을 마음속 깊이 접어 두었다. 지금 당장 선대 전주가 추산해낸 내용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열에 여덟, 아홉은 실제 상황과 부합하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선대 전주 본인이 직접 가보지도 않은 채로 하계에 대해 추론한 내용은 실로 정확했다.
기운이라······. 만약 독고유아와 영현기의 굴기가 하계의 모든 기운이 그 둘의 일신에 집중된 결과가 맞다면 초휴 몫의 기운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초휴는 그 두 사람이 하계의 기운을 독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기운이라는 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이 그저 일부 사람들의 추측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이 오로지 실체도 없는 기운 덕분에 그렇듯 위대해졌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끝까지 승승장구했다면 기운의 덕을 입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여하튼 초휴는 이렇게 믿었다. 기운이 그들을 택한 게 아니라, 기운이 그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당시의 하계에서는 독고유아와 영현기만이 정상에 도달한 존재였다. 말인즉슨, 당시 실체도 없는 기운에 다가갈 자격이 그 둘한테만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기운이 그 둘 외에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초휴는 줄곧 한옆에서 찍소리도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길신라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가져온 것들이 꽤 쓸 만하군그래. 염려 말게. 나를 위해 성심성의껏 일을 해준 사람을 박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당장은 공개적으로 공을 치하하기는 어렵겠네. 자네 신분이 여간 특수해야 말이지. 일단 당분간 밖에 나돌아다니는 건 삼가는 게 좋겠군. 범교를 완전히 무너뜨리면 그때 자네도 응분의 지위를 받게 될 것이네. 비슈누전 산하 일개 궁주보다 더 대단한 지위를 주겠노라 약속하지.”
길신라는 감사하다고 땅에 코가 닿도록 절을 하며 물러갔다. 하지만 초휴의 말을 완전히 다 믿는 건 아니었다.
물론 초휴가 확실히 강한 존재라는 건 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에게 의탁한 데 불과했다.
그가 과연 범교를 멸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에 자기 손목도 걸 수 있었다.
범교 궁주를 지낸 그는 누가 뭐래도 범교의 준고위급에 속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범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속속들이 잘 알았다.
초휴가 범교의 신전 하나를 박살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과감한 기습이 통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일만 년도 넘게 전승을 이어온 범교 전체를 상대로 그런 잔꾀가 통하겠는가.
길신라를 내보낸 초휴는 폐관하여 요양에 들어갔다. 아까 음양의 본원이 그의 육신에 가했던 충격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 그의 육신 강도가 더없이 강건한 상태이긴 하나, 음양의 본원이 막판에 뱉어냈던 힘은 근본적으로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요양하고 나서야 출관한 그는 매경령을 불러 그간 서역에 별다른 동향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서역은 내내 조용했어요. 사공담 그 뚱보가 전해온 정보에 의하면 신전 하나를 통째로 잃은 게 범교로서는 꽤 큰 타격인 모양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교주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없으니 더 심각하겠죠. 이래저래 범교 측에서는 당분간 병력 배치를 중단하고 경계의 수위를 높인 채 패국(敗局)을 수습할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그리고 천라보찰 쪽은······. 범교의 동향을 주시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어요. 상황 흘러가는 데 따라서 대처할 생각인 것 같아요. 차제에 범교와 끝장을 볼 마음까지는 없는 듯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초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범교가 보여 온 반응을 보건대, 당분간 시비를 걸어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매경령이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정작 서역 쪽은 잠잠한데 북역에 일이 좀 있었어요. 교주님도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일이라니?”
“성하산인은 교주님도 아시죠? 엽유공과 절친하다는 그 고존 양반 말이에요. 교주님이 폐관해 계셨을 때 성하산인 측에서 다른 고존 세 명과 손잡고 극북 천주산 관성각에다 성하무원을 세웠어요. 고존의 제자들, 각 대문파의 제자들 그리고 낭인 무사들까지 모두 와서 수련할 수 있다고 하네요. 출신과 문파를 따지지 않고 오는 대로 다 받아준다지 뭐예요. 따로 사부를 둔 게 아니라면 누구나 자유 의지대로 와서 강의를 듣고, 가고 싶으면 언제든 맘대로 갈 수 있다더군요.”
말끝에 매경령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미치광이인가 봐요. 그런 식일 것 같으면 자신의 공법과 경험을 남에게 거저 퍼주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대라천 강자들도 자주 강좌를 열지만, 그건 무도를 해석해주는 수준에 그치잖아요. 하지만 이건 자신의 핵심 공법마저 죄다 까발려 놓고 알려주겠다는 건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죠.”
매경령의 말을 듣는 순간, 초휴는 정수리에 얼음물을 덮어쓰기라도 한 양 정신이 번쩍 났다.
기운(氣運)!
초휴의 눈에 의미심장한 이채가 번뜩였다.
“무선 구중천의 절대 강자가 미칠 리는 없죠. 손해 볼 짓은 더더욱 할 리가 없고 말입니다. 그자가 아무래도 기운을 쟁탈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