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269)
1269화 범교에서 종을 보내오다
용산과 소무가 거창한 선물을 가져온 데다 ‘우정과 신의’라는 말까지 운운하자, 초휴는 자기가 노만왕에게 한 방 먹었음을 알았다.
노만왕은 타고난 혈통에 걸맞지 않게 우직하고 단순한 면모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간교하기가 천년 묵은 구미호 수준이라고 할까.
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라고 시킨 것은, 초휴와 만족의 관계를 기정사실로 못 박은 거나 다름없었다. 둘이 결탁한 사이임을 온 강호에 천명한 셈인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초휴가 만족과 관계를 끊고자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초휴 가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으면 이는 나산부와의 ‘우정과 신의’를 저버리는 셈이 될 터인즉, 그 후과를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물론 초휴가 보기 드물게 만족에 편견이 없는 역인이고 만족과 공정한 거래를 이어가길 원한다는 사실을 노만왕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초휴와의 관계를 동네방네 소문은 낼지라도 그를 심하게 압박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선물로 가져온 산교는 고급 흉수의 일종으로, 인간으로 치면 무선 칠중천에 버금가는 존재인 것이다.
십만대산 밖에서는 수백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말까 하며, 체내의 피 한 방울조차 보물 취급을 받을 만큼 귀한 몸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가져온 선물들을 모두 합쳐도 이 흉수의 십 분지 일 가치밖에 안 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소무는 ‘우정과 신의’라는 두 단어를 유독 힘주어 말했다. 이는 양측의 관계가 그만큼 긴밀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노만왕은 초휴조차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실력의 소유자다. 적어도 팔중천 이상, 심지어 구중천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존재였다.
그런 강자를 우군으로 두었으니, 설령 범교가 초휴를 못 죽여 안달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자기들이 과연 십만대산을 넘어 그를 공격할 수 있을지, 이 문제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터였다.
노만왕이 이번에 선물을 보내온 데에는 확실히 그만의 구린 속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위에 말한 이득만 챙겨도 초휴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것이다. 게다가 초휴는 대라천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만족과 결탁해서 대외적으로 평판이 좀 나빠지기로서니 뭐가 대수겠는가. 초휴는 정말로 개의치 않았다. 대라천 무사들이 만족을 오랑캐 취급하여 경계하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죽여야 성이 풀릴 만큼 적대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만족보다도 정작 그들끼리 더 증오했다. 천라보찰한테 만족과 범교 중 하나를 멸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면 그들은 분명 범교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초휴는 하계에서 수년째 툭하면 마두 소리를 들어왔다. 까짓것 만족과 결탁했다는 오명 하나 더 추가된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여 초휴는 화통하게 손을 휘저으며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선물을 잘 인계받도록 하고 두 분을 자리로 모셔라!”
순간 소무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그는 노만왕이 소싯적부터 순전히 역인 무사들이 하는 방식대로 양성해낸 주요 심복으로, 사고방식이 역인들과 거의 같았다.
과연 노만왕이 예상했던 대로 초휴는 눈치 있게 노만왕의 의중을 깨우쳤으니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한 셈이었다.
용산이 한옆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내 고기랑 술은 언제 줍니까?”
“염려 말게. 좀 있다가 얼마든지 내어줄 테니까.”
초휴가 용산을 달래고 하객들에게 자리 안내도 마친 다음 시간을 보니 이미 길시가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건립 의식을 시작해야 할 시간인 것이다.
초휴가 광장 중앙으로 나와 목청을 높였다.
“여러분······.”
하지만 막 운을 떼자마자 밖에서 화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초 교주, 손님이 다 오기도 전에 시작하는 법이 어디 있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목소리의 주인은 입구를 지키던 제자가 보고하기도 전에 이미 대전에 난입하고 있었다.
다들 눈에 힘을 주며 의미심장한 기색을 내비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판을 깰 불청객이 온 것이다!’
초휴가 범교의 신전 하나를 궤멸한 지 지 얼마 되지 않아 종문을 세우게 되었으니, 그 기세가 사뭇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교는 누가 뭐래도 당대의 정상급 종문이다. 형편없이 실추된 체면을 다소라도 회복할 심산에서라도, 저 원수 같은 초휴 놈이 득의양양하게 내버려 둘 리가 만무한 것이다.
범문이 화려하게 수놓은 흑의를 입은 중년 무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열 명 남짓한 범교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범문이 가득 새겨진 커다란 종 하나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 좌중의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변해갔다.
남의 종문 건립일에 종을 선물하겠다고?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거 아닌가?
(중국어로 송종(送鐘, 종/시계를 선물하다)이라 하면 송종(送終, 장례를 치르다/임종을 지키다)이라는 말과 발음이 같다. 종을 선물하면 상대의 불운을 바라는 격이 될 수가 있으니, 중국에서는 종이나 시계를 함부로 선물하지 않는 게 관례처럼 되어있다. :역주)
제공이 그들을 힐끗 보더니 초휴에게 전음으로 일러 주었다.
“초 교주, 저자는 범교 범천전 산하 공작신궁(孔雀神宮)의 궁주, 소합나(蘇哈那)라고 하오. 무선 육중천이지. 공작신궁은 범천전 산하의 수많은 신궁 중에 실력이 세 번째로 강한 조직이라오.”
초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에서 서슬 퍼런 냉기를 발했다.
“범교 당신들이 못난 탓에 신전을 잃어 놓고 애먼 자리에 와서 화풀이하려는 건가? 내게 종을 선물하러 오다니. 그걸 준 다음에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왔겠지?”
초휴가 서슬 퍼렇게 을러대자 소합나가 태연히 받아쳤다.
“우리 범교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오. 패했으면 패한 것이지, 무슨 토를 달겠소. 훗날 다시 당당히 진검 승부를 내면 되지 않겠는가. 오늘 나는 대라천의 규칙에 따라 여기 온 것뿐이오. 여기 모인 여러분! 내가 무슨 규칙을 말하는 건지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소. 이 종은 우리 범교의 지보인 회혼종(回魂鍾)으로 공격과 방어에 모두 쓸 수 있소. 종을 두드리면 그 소리가 상대의 정신과 혼을 뒤흔들어서 실력이 좀 낮은 무사들은 그 충격에 심신이 피폐해진 끝에 폐인이 되고 말지. 방어용으로 쓸 경우, 혼회종으로부터 백 장 반경 내에 있으면 그 어떤 원신비법의 공격도 피할 수 있소. 이 종은 엄연히 축하 선물로 가져온 것이오. 다만 초 교주 당신이 우리의 규칙에 따르지 않겠다면 이것을 구경만 해야겠지. 즉, 삼세판 대결을 벌여서 당신이 이기면 회혼종을 선물하지. 오늘 당신이 받은 선물이 꽤 많을 테지만, 그 어떤 것에도 이 회혼종만 한 가치는 없을 거라고 내 장담하리다.”
그러나 아직도 질질 끌려가는 중인 산교의 그 거대한 몸뚱이에 눈길이 미치자, 소합나는 황급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단, 만족은 대라천의 종문이 아니니 대결에 나설 수 없소. 삼세판 중 당신 쪽에서 한 판을 패하더라도 내가 회혼종을 도로 가져가는 일은 없을 거요. 이미 범교의 수중에서 떠난 물건이니 더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지. 다만! 한 번이라도 패하면 곤륜마교의 산문을 삼 장 이내로 한정해서 지어야 하오. 내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텐가?”
그 어떤 종문을 막론하고 산문은 그 종문의 체면과도 같다. 최대한 크고 휘황찬란하게 만들수록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고작 삼 장밖에 안 되는 산문이라면 일개 군소 종문만도 못한 크기로, 곤륜마교로서는 여간 큰 수치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는 둘째 치고, 초휴는 범교가 단체로 실성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이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 인원을 보내와서 감히 이런 개수작을 부리다니?
초휴의 표정에는 짙은 의혹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은 걸 본 종추수는, 그가 정말로 지금 상황을 모른다는 걸 알아채고 다급히 전음으로 설명에 들어갔다.
“범교는 지금 고의로 난동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 대라천의 규칙이 원래 이러하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라천에는 후발 종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 그들이 역사가 유구한 유력 세력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선보여야만 했소. 그런 경우에 실력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기존 세력들이 극히 진귀한 선물을 보내오거나 여러 난제를 제시하고는 했소. 신생 종문이 이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마음인 게지. 그러나 대부분의 신생 종문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소. 응하지 않았다가는 자기한테 그럴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격이 되니 말이오.”
종추수가 차분히 설명해주었으나 이미 구겨진 초휴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무슨 이런 개뼈다귀 같은 규칙이 있단 말인가!
그가 보기에 이런 규칙은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치사하고 옹졸한 상고 대종문이 만든 게 틀림없어 보였다.
일만년 이상 전승을 이어온 상고 대종문들은 대부분 자부심이 극도로 강하다 못해 오만에 찌든 상태였고, 그런 마음으로야 우수한 후발 종문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원래 실력이라는 것은, 전승을 이어온 세월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잖은가. 오히려 후발 주자의 발에 걸려 넘어져 추월당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일순 수치심과 열패감으로 인한 분노를 못 참고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고자 이렇듯 무리한 규칙을 만들어 낸 것일 터였다.
한마디로 종문 건립 의식이 열리는 자리에서 주최 측을 난감하게 만들어 잔뜩 심술을 부리고 자신의 체면도 되찾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지난날 한강성이 창건했을 때도, 또 얼마 전 성하무원이 건립되었을 때도 이런 수법이 동원되었습니까?”
초휴가 전음으로 보낸 질문에 종추수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니었소. 당시 한강성의 굴기는 우리가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고, 모두 다 일찌감치 그 사실을 인정한 상태였지. 그걸 알면서도 굳이 건립 의식이 열리는 자리에서 상대를 괴롭혀봤자 아무 소용도 없거니와, 내 소갈딱지가 좁다고 만천하에 공고하는 격만 될 뿐이니까. 하여 아무도 어려운 조건 같은 건 내걸지 않았소. 성하무원 건립 당시에는 그 자리에 적이라곤 하나도 없었소. 맹성하는 오래도록 외부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데다, 본인부터가 구중천의 지존급 강자니까. 서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만큼 깊은 원한을 맺은 게 아닌 바에야 감히 성하무원에 시비를 걸 만큼 간덩이가 부은 자가 없었지.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좀 다르다고 봐야 할 거요. 교주가 범교에 한 일이 있으니 말이오. 가뜩이나 그대한테 이를 갈고 있었을 텐데, 모처럼 설욕할 기회가 왔으니 저들로서는 이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초휴가 전음으로 종추수의 설명을 듣느라 아무 반응이 없자 소합나가 냉소를 터뜨리며 비아냥거렸다.
“이런, 초 교주께서 내 제안에 응하기 어려우신가 보군. 뭐,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쨌거나······.”
“응하겠다. 대라천의 오랜 규칙인데 어찌 응하지 않겠는가? 그쪽 무사들부터 출장시키시지.”
초휴가 그의 말을 서슴없이 끊더니 자기 할 말을 해버렸다. 초휴가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자 광장 내에 있는 대부분의 종문들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광경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던가? 심지어 여태 한 번도 못 본 자들도 수두룩했다. 최근 수백 년 동안 신생 종문이라고는 세 개밖에 없었으니까.
하나는 한강성으로, 능소종과 황천각 모두 한강성의 지위를 흔쾌히 인정한 데다 두 종문 모두 대인배 기질이 있어 그런 치졸한 수법은 쓰지 않았다.
두 번째로 대천문이 있다. 그러나 대천문은 진법 구축이나 병기 제련 등 잡다한 재주에 특화된 종문이라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종문이 먼저 협업을 청해오는 경우가 허다했던지라,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 일을 사서 할 까닭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성하무원의 경우는 방금 종추수가 말했듯이, 무선 구중천을 건드릴 만큼 불어터진 간덩이가 대라천 어디에도 없어서였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초휴와 범교가 정면 격돌하는 이 상황을 통해, 말로만 들어온 ‘남의 잔치에 재 뿌리기’를 난생처음 목격하는 셈인 것이다.
곤륜마교에 입교할 생각이던 동역의 군소 세력들도 이 상황을 대단히 흥미롭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막연하게나마 그들은 줄곧 곤륜마교도, 초휴도,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봉검종처럼 직접 곤륜마교를 겪어본 종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어깨너머 잡설 수준의 이야기들을 주워들었을 뿐이지, 곤륜마교의 진정한 실력을 직접 체험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곤륜마교에 정식으로 입교하기에 앞서, 이를 기회로 곤륜마교의 진정한 실력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입교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