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309)
1309화 실망
나마와 허운은 서로 마주 보고 전음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말했다.
“우리가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선선사께 말씀드려 보겠소이다. 하지만 제선선사가 승낙할지는 장담하기 어렵군요.”
능운자는 얼른 답했다.
“괜찮습니다. 두 분이 말만 꺼내 주셔도 됩니다.”
사실 허운과 나마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못 되었다. 옛 교분을 생각하면 운을 띄워주는 거야 못하겠는가.
제일 중요한 건 제선선사의 태도였다. 만일 제선선사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이제 막 천라보찰에 들어온 그들로서는 천라보찰이 억지로 출수하게 할 방법은 없었다.
허운과 나마는 그 자리를 떠나 제선선사에게 이야기하러 갔다. 제선선사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우리 천라보찰은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소. 관여할 수도 없고.”
제선선사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허운은 기분이 좀 불편했으나, 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와있는 동제 사람들한테 그리 전하지요. 하지만 각주님, 이유를 알 수 있을지요? 우리 천라보찰과 범교는 도통을 놓고 다투는 원수지간 아닙니까. 이번 기회에 나서면 범교의 실력을 깎아 놓을 수도 있고 동제 무림에도 빚을 지우는 셈이니 일거양득 아닐까요?”
제선선사는 좀 기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의 득실을 이리 뚜렷하게 살필 줄 알다니 과연 대문파 수장 노릇을 했던 사람이구나 싶었다. 허운은 실력만 따라준다면 곧장 각원의 수장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설명해 주었다.
“그 말씀은 맞소. 하지만 대라천의 세력 구도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구려. 우리와 범교가 서로 싸우는 사이기는 하지요. 심지어 기회만 있으면 전력을 다해 상대방의 전력을 훼손하려 하고 있소. 그러나 진정으로 승부가 갈리는 것은 세존과 범교 교주 둘 사이의 일이오. 구중천의 지존 강자만이 승패를 정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오. 전황의 승부는 그 둘이 정하고, 그 외에도 진정 중요한 것은 전승이오. 지금은 우리 천라보찰이 우세를 점하고 있소. 두 분이 천라보찰에 들어왔기 때문에 범교도 다급해져서 그리 횡포를 부리면서 제자를 마구 긁어모으려는 거요. 하지만 그리해 봐야 범교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소. 그러니 지금 같은 때 범교 일에 끼어든다면 결과는 하나뿐이오. 범교는 완전히 미쳐 버릴 것이고, 그 미친 무리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거요.”
“물론 그리한들 우리 천라보찰이야 두려울 게 없지요. 하지만 두 분이 걱정되어 그렇소. 나는 여러분이 천라보찰에서 무선에 오를 때까지 쭉 수련하다 하산했으면 하오. 범교는 이미 서산으로 지는 해요. 이번 대에 멸하지 못해도 여러분이 실력을 키웠을 때쯤에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오. 지금 굳이 죽기 살기로 사생결단을 보려들 필요가 없소. 명심하시오. 지금의 여러분은 도자기와 같소. 실력을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하지 자칫 뭔가에 부딪혀서 깨지면 안 됩니다. 굳이 고물이 다 된 범교 무리와 죽도록 싸우는 건 무익하다는 말이오.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종문 간의 다툼은 바둑과 비슷하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지요.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림으로써 앞으로 더 많은 집을 먹을 수 있소.”
허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라보찰이 출수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자신들 때문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옴으로써 엄청난 우세를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천라보찰은 지금처럼 위명도 떨치고 범교에 타격을 입힐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동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허운은 그저 천라보찰이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뜻만 전달했다.
능운자 일행의 실망은 전보다 더 깊었다. 그야말로 절망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막천림의 말이 없었다면 그래도 참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듣고 간신히 희망을 품었건만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이제는 더 견디기 어려웠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허운과 나마를 헐뜯었다. 천라보찰에 입교하더니 벌써 하계 사람이 아닌 줄 안다, 이 정도 작은 일도 매몰차게 거절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이번 일의 원흉인 막천림조차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깊이 사귈 사람들이 못 되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도와준다면 은혜를 입는 셈이고, 돕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본분을 지키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같이 남 탓이나 일삼으니, 그런 자들은 맹우로 삼기에 부적절했다.
좌우간 막천림이 제안해서 시작한 일이니 몇몇 사람은 그를 쳐다보았다.
“막 가주, 이제 어쩌면 좋겠소?”
막천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물으신들 어쩌겠습니까? 나도 아무 방법이 없지요. 범교의 세력이 그리 대단하니 알아서들 처신합시다.”
그렇게 말한 막천림은 공수를 올리고 곧장 자리를 떴다. 그는 막가에 돌아오자 초휴가 주었던 진반을 써서 일이 잘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 * *
초휴는 천라보찰의 선택에 털끝만큼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짐작한 대로였으니까.
지금 천라보찰은 대광명사와 수보리선원 출신 무사들을 안정적으로 키우고 싶을 것이다. 범교와 죽자고 싸우려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천라보찰은 조용히 있으려는지 몰라도 그는 나설 작정이었다.
초휴는 심마가 머릿속에 남겨 둔 마지막 한 가닥 정신력을 따라 범교 내전에 잠입해 있는 그에게 연락을 보냈다.
* * *
심마는 이미 몸을 만들어내어 어엿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초휴의 머릿속에 정신력 한 가닥을 남겨 두었기에 여전히 초휴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쓰면 정신력이 뒤흔들렸고 소모도 막대했다. 지금 심마의 지위는 환혹천왕궁의 궁주였다.
자꾸 정신력을 대량으로 소모하면 의심을 사기 쉬웠다. 그래서 범교 쪽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초휴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초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력이 심마에게 가닿자 초휴가 물었다.
“그래 사람 노릇을 하는 기분이 어때?”
정신력을 통해 즐거워하는 심마의 파동이 전해져 왔다.
“제법 좋은데? 인간의 칠정 육욕이란 아주 재미있단 말이지. 전에는 다른 사람의 칠정 육욕을 느끼는 것밖에 못 했는데, 이제는 나 자신이 그걸 느낄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그런 감정을 모방하기는 너무 쉽더군. 가끔은 나 자신조차 지금 내보이는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야.”
심마는 길신라의 신분이 되어 물 만난 고기처럼 범교에 섞여들었다. 그 자신이 칠정 육욕의 온갖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한테서도 온갖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감정을 읽어내어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범교에서 심마는 그야말로 적이 없었다. 그와 만나본 사람은 누구든 호감을 느꼈으니까. 심지어 염마처럼 정신이나 성격이 별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조차 심마한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너무 많은 것을 모방하다 보니 자신의 감정에도 거짓이 섞이게 되었다. 가끔은 심마 자신조차 자신이 모방과 위장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감정이 생긴 건지를 헷갈렸다.
“초 교주, 사소한 일이면 연락하지 않았겠지. 뭘 할 셈인가? 범교를 총공격이라도 하려고?”
초휴는 담담했다.
“그 정도로 내 간덩이가 붓지는 않았다. 그냥 술수를 써서 범교를 골탕 먹이고 싶어서 말이지. 그러는 김에 이득도 좀 보면 더 좋고. 너는 지금 범교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나? 루나가와 염마 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할까?”
“염마는 별문제 없지. 하지만 루나가는 비교적 판단이 냉정한 사람이라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는 어렵겠군.”
초휴는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 네가 수행할 임무는 단 하나야. 온 힘을 다해 염마가 동제 조정에 시비를 걸게 하는 거다. 동제 조정에 제자가 될 무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게 만드는 거지. 도가 지나칠수록 좋다.”
심마는 단박에 초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범교가 온 동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하려는 건가?”
심마는 초휴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있었다. 그러니 이 세상 누구보다도 초휴를 잘 이해하는 존재일 터였다.
초휴는 태연했다.
“그저 불씨만 튕겨 주려는 거지. 대라천에서 범교는 횡포를 일삼았지만, 하계 상황이 대라천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은 모르고 있지. 서역에서는 천라보찰 하나만 상대하면 충분했겠지만, 하계는 꽤 다르니까. 내가 뒤에서 손을 쓰지 않아도, 범교가 계속 그렇게 막 나가면 하늘과 사람의 공분을 사게 되겠지.”
심마는 웃었다.
“알겠다. 내가 한번 그를 선동해 보지.”
두 사람은 곧장 연결을 끊었다. 심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곧장 시바전으로 달려갔다.
* * *
대부분 범교 무사들, 심지어 같은 시바전 무사들이 보기에도 염마는 별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쉽게 화를 내는 난폭한 성격이었고 특히 전투 상태로 들어가면 금방 광기에 빠져들어 이성을 잃었다. 범교 교주보다 더 심하다고 보일 정도였다.
범교 교주는 적어도 몸의 절반은 선상인지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염마는 제대로 광기에 빠지면 돌아오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범교 무사들은 염마를 경외하면서도 멀리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의 실력을 경외했으나, 그와 얽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로지 심마처럼 인간의 감정을 속속들이 꿰뚫는 존재만이 염마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심마가 하는 말들은 그의 마음에 와닿았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는 심마에게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심마는 시바전 사람이 아닌데도 시바전 무사들보다 더 염마의 심복 같았다.
시바전 문을 연 심마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전주님, 들으니 근래 동제 무림 세력 중, 이미 알아서 제자를 보내온 자가 있다면서요?”
염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계 놈들은 실력도 약한 주제에 잔꾀만 부리더군. 매운맛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알아서 사람을 내놓았겠나? 새로 온 제자들은 나도 보았는데, 숫자는 그럭저럭 되지만 소질이 너무 떨어져서 문제야. 천라보찰이 손에 넣은 제자와는 비교도 안 된단 말이네. 이것들이 분명 잔머리를 굴린 것 같네. 자질이 뛰어난 제자는 꼭꼭 감춰놓고, 별 볼 일 없는 놈들만 우리에게 바친 모양이야!”
심마는 고개를 저었다.
“전주, 고정하십시오. 천라보찰에 들어간 자들은 하계에서 명성이 대단했던 대광명사와 수보리선원 아닙니까. 당연히 비교가 안 되겠지요. 다만 제가 새로 알아본 곳이 하나 있는데, 어쩌면 그 두 문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제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디인가?”
“동제 조정입니다.”
염마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조정?”
대라천에는 조정이라는 것이 없다. 염마도 동제 조정에 대해 듣기는 했으나 그 성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동제 조정 말입니다. 동제 조정은 일종의 대문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력이 대단히 강하지는 않습니다만, 사람은 아주 많은 문파인 거죠. 동제 전체를 관할할 정도니까요. 그만큼 넓은 땅을 쥐고 있으니 동제 조정에는 우리의 조건에 부합하는 무사가 꽤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동제 조정에 가서 무사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게 어떨까요. 어쩌면 양과 질, 둘 다 강호 종문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릅니다.”
염마는 한 번도 심마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머릿속에서 하계 무사들이란 개미 정도에 불과했다. 개미 따위의 감정을 고려해서 점잖게 행동한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염마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곧장 시바전 수하들을 이끌고 동제로 가려 했다. 그때 심마가 물었다.
“전주님, 루나가 전주께도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염마가 코웃음을 쳤다.
“범천전 전주일 뿐, 범교 교주도 아닌데 시시콜콜 모든 걸 다 보고할 필요가 뭐 있나? 그냥 가면 그만이지.”
범교 삼대전은 안 그래도 티격태격했지만, 염마가 루나가를 탐탁지 않아 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성격도 안 맞았고, 먼젓번에 범교 교주가 범교를 다스릴 주요 권한을 루나가에게 맡긴 것 때문에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심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염마를 따라 곧장 동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