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뒷배
초휴가 용기금군 행세를 한 것은 확실히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백호당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패에는 소속 군영만 기재되어 있을 뿐, 이름은 아예 적혀 있지 않았다.
게다가 동제 조정 휘하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백호당이 용기금군 소속 무사들의 얼굴을 알아볼 리도 만무했다. 그건 같은 용기금군끼리라도 어려운 일일 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제 황실에 예속된 용기금군은 특정 개인이 아닌 모든 황족의 명을 받들게 되어있다.
그런 만큼 임무의 수행 범위도 넓고 종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편제의 경우, 용기금군 한 명이 홀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인 일조로 편성되어 조별로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같은 군영에 소속되었을지라도 같은 조가 아니라면 용기금군들끼리 서로를 꼭 알아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초휴의 전갈을 받은 백호당 사람이, 이 사실을 동제의 이황자에게 알리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이황자가 용기금군 명단을 일일이 뒤져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것이 초휴의 농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황자의 휘하에만도 꽤 많은 수의 용기금군이 있고, 그들 모두가 지금도 강호에 흩어져 제각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맡은 임무를 어떻게 다 연결해서 기억할 수 있겠는가.
천죄 타주를 비롯한 청룡회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 못해 넋 놓은 표정으로 초휴를 쳐다보았다. 타주의 반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초휴의 신상에 대해 구구절절 다 알지는 못했다.
‘설마 저놈이 정말 용기금군 출신이라고?’
초휴가 위군 통주부 출신이라는 건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군은 한때 동제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초휴가 비밀리에 용기금군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아귀가 맞지 않기도 했다. 정말 초휴가 용기금군 출신이라면, 지난날 임중군 세력들에게 쫓길 때, 왜 그처럼 앞 막히고 뒤 막힌 참담한 지경까지 몰렸단 말인가. 타주가 막판에 구해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일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타주는 여러 생각을 깊게 할 여유가 없었다. 초휴가 내민 요패를 확인한 백호당 거한이 여차하면 타주에게 선공을 날릴 태세였기 때문이다.
“청룡회 나부랭이들, 오늘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는데, 간만에 땀 좀 내보겠구나!”
이 말은 겁을 주려는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원래 그들의 무공은 예리한 검날로 마구 베고 죽이는 게 특징으로, 모든 수련이 베고 죽이는 실전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그간 살육을 심하게 저지른 탓에 동제 무림 전체의 공분을 사다시피 한 상황인지라, 최대한 근신하고 자제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건수를 만났으니, 그간의 답답함을 맘껏 해소할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물론 백호당 총타로부터 사고 치지 말라는 지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함부로 다른 종문을 건드리지 말라는 소리지, 숙적인 청룡회한테 알아서 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윽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백호당 거한의 칼끝에서 살기를 머금은 시뻘건 강기가 터져 나왔다. 그 살기는 구름을 뚫고 구중천까지 치솟을 기세였다.
이름하여 백호살신강(白虎煞神罡)!
백호당의 백호살신강은 초휴가 익힌 혈련신강과 얼핏 흡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기에 담긴 무도의 진의(眞意)는 사뭇 달랐다.
혈련신강은 발출 될 때 강력한 ‘피의 살기’로 이루어진 힘이 응집되어 터져 나온다. 이때의 가공할 위력은 어떤 종류의 힘도 제압할 수 있었다. 이 강기가 상대의 몸에 격중되어 체내로 유입되면, 상대의 기혈 속으로 침투하여 결국 기를 소멸시켜 버린다. 한마디로 사악하고 요상하기 짝이 없는 속성의 무공이었다.
이에 비해 백호살신강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속성을 가졌다.
서쪽 백호는 천간(天干)에서 호방하고 저돌적이며 불처럼 뜨거운 경금(庚金)에 속하는지라 살생의 성향이 짙었다. 살기와 용맹과 예기(銳氣) 등이 최대로 응집된 ‘강맹함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백호의 기운이 고스란히 실린 강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백호당 거한은 천죄 타주와 같은 천인합일의 경지였으나 수련이 좀 더 깊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온몸에서 발출된 광폭한 기세는 순식간에 타주를 제압해 버렸다. 우두머리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나머지 백호당 무사들도 달려들어 당아 등과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초휴는 회심의 눈빛을 띠더니, 이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백호당 선배님! 저는 속히 동제로 돌아가 이황자님께 보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곳을 선배님께서 맡아 주시겠는지요?”
그러자 백호당 거한이 싸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대답했다.
“이 청룡회 떨거지들은 나한테 맡기고 가서 일을 보시구려.”
싸움판을 보니 백호당 무리가 수적으로 열세였다. 자칫 백호당이 패하기 전에 초휴는 속히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아까 초휴의 한 방에 중상을 입은 진교는 싸움에 끼지도 못하고 구석에 숨어있었다. 얼결에 초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초휴의 대금강륜인은 두 사람의 실력이 천양지차임을 입증해 보인 한 수였다. 그걸 알면서도 초휴를 막아서는 건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진교의 속내를 읽은 초휴는 음산하게 미소짓더니, 보란 듯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이따위 눈치나 보며 꼬리 흔드는 잡놈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주막을 나선 그는 두 다리에 최대치의 폭발력을 실어냈다. 그는 동제로 향하는 대신, 동제의 변경지대를 끼고 관중으로 갈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확실히 동제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무려 백호당을 상대로 동제 용기금군을 사칭하는 엄청난 사기극을 벌이고 말았다. 이 일이 발각될 확률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동제 쪽은 얼씬거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작금의 세 나라 가운데 동제가 단연 물이 깊고 땅도 넓은지라, 대형 문파와 종문의 태반이 동제 변경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초휴의 실력으로 동제 쪽에 어설프게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자칫 북연에서 당했던 것보다 더 참담한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었다.
낮 동안 그는 백호당에 연락할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향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도 고민했었다. 지금 사방에 그를 노리는 세력이 너무 많다는 걸 고려할 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 상태로 다른 뒷배를 마련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신분 세탁을 할 만한 곳을 찾거나.
조금만 생각해도 세간에서 말하는 정사(正邪)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다.
대광명사 화상들은 말끝마다 악인도 회개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 않는가. 실제로 대광명사에는 불문에 귀의한 마도 출신 흉수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지금 초휴는 ‘혈마’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손속이 사악하고 매서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일 뿐, 그가 진정으로 마도에 빠졌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따라서 이제라도 새로운 뒷배나 터전을 찾아 새 출발을 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원래 초휴가 뒷배로 삼았던 것은 청룡회였다. 하지만 거기서 지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타주와의 일과는 무관하게 청룡회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 자체가 극단적인지라 자신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룡회는 살수조직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타주의 위치까지 올라가지 않는 한, 분타의 간판급 살수라 해봐야 손에 쥐어지는 실권은 쥐꼬리만 할 게 뻔했다. 물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타주가 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을 만큼 청룡회의 평판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숙고 끝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관중(關中)’이었다.
관중은 삼국(동제, 북연, 서초) 접경지대 중에서도 중심부에 자리한 중립 지대다.
삼국 중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았고, 어느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한때는 종일 침략전이 끊이질 않던 무법천지이기도 했다.
훗날 삼국이 정전 협정을 맺자, 관중은 세 나라 어디와도 연결되는 통로로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관중의 존재감은 밀거래에서도 빛을 발했다. 삼국이 거래를 금지한 품목들도 버젓이 관중을 통해 적국으로 옮겨지곤 한 것이다.
처음에 관중은 질서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들리는 무법지대였다. 갈수록 혼란과 혼돈의 양상이 도를 더해가자, 보다 못한 현지 무림세력과 명망 높은 학자 한 명, 그리고 무소속의 고수들이 연합하여 관중의 질서를 책임질 ‘관중형당(關中刑堂)’을 조직했다.
관중형당은 삼백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하지만 이 짧은 세월 동안 잦은 권력 교체로 인해 당주(堂主)만 여덟 번이나 바뀌는 혼란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 삼십 년전 비로소 제대로 된 당주가 등장하면서 관중형당은 다시금 쇄신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삼십년 전 ‘철면판관(鐵面判官)’ 관사우(關思羽)는 관중형당 당주 자리에 앉자마자 대내외적으로 관중형당의 입지를 손보았다. 내부적으로는 형당을 재정비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으니, 일을 행함에 있어 공평무사하고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외부적으로는 북연, 동제, 서초의 세 나라를 상대로 관중이라는 완충 지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침내 관사우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삼국이 협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내용인즉, 이제부터 관중은 절대적 중립 지대이며, 향후 삼국 간의 모든 거래는 반드시 관중이라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금지 품목의 밀거래와 관련된 모든 위법 행위는 관중형당의 처벌을 받는다 등이었다. 이때부터 관중형당은 조정과 강호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특수한 존재가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관중형당은 삼국의 인가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삼국 중 어느 나라의 관할에도 속하지 않았다. 심지어 삼국 모두 관중형당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절대 중립적인 존재로서 관중형당 역시, 삼국 중 어느 나라의 편도 일절 들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만 보면 관중형당을 조정의 무력조직으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중형당을 강호 조직으로 간주하기도 모호했다. 태생이 강호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관중의 질서를 감찰하는 역할에만 그쳤기 때문이다. 그중 단연 주요한 감찰 대상은 관중의 무림세력이었다. 따라서 수행하는 업무 기능만 놓고 볼 때는 조정에 예속된 무력조직과 비슷하기도 했다.
사실 관중형당은 취의장 등 주요 강호 문파보다도 더 막강한 세력을 가졌다. 그런데도 풍만루가 강호 주요 세력들을 넣어 지은 노랫말에 들지 못한 이유는 이처럼 모호한 정체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관중형당이 대거 양성해낸 ‘강호 포두’를 들 수 있다. 지난날 관중이 한창 혼란에 빠졌을 때, 강호에는 수많은 복수와 살해, 심지어 멸문같이 피로 얼룩진 사건들이 허다하게 발생했다. 이런 사건들을 전담하기 위한 전문 인력이 강호 포두였다.
이들은 출중한 사건 해결능력으로 큰 명성을 누렸다. 예컨대 고수급 강호 포두는 시신만 보고도 그들이 어느 무공을 어떤 순서대로 썼는지 줄줄 읊어댈 정도였다.
그래서 사건 조사가 필요한 강호 문파는 물론, 조정에서도 강호 포두의 도움을 받으려고 직접 관중까지 모시러 오곤 했다. 지난날 심백이 아우의 죽음을 규명하려고 진 포두의 도움을 받았듯이 말이다.
초휴가 관중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그가 관중형당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용력만으로 보자면 관중형당은 단연 강호 최고였다.
지난날 당주 관사우가 강호 전체를 상대로 공포하길, 관중형당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능력만 본다고 했다. 관중형당의 규정을 성실히 지킬 수 있는 뛰어난 능력자라면 누구든 환영한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호방하고 파격적인 관사우 특유의 운영방식 덕분에 낭인 출신의 강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관중형당은 오늘의 놀라운 모습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