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거협(巨俠)
초휴 정도의 실력이면 지금 당장이라도 관중형당에 들어가는 건 간단했다.
관중형당은 매년 강호 포두를 모집하니 기회는 열려 있었고, 초휴와 같은 고수를 거부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든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법. 그가 외강경의 실력을 가졌지만, 들어가자마자 중책을 맡기는 어려울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관중형당은 청룡회와 같은 살수조직과는 엄연히 다르다. 잔악무도한 살인 한 번으로 단번에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그런 허술한 조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초휴는 밑바닥에서부터 무수한 경쟁자들과 아귀다툼을 벌이기는 싫었다. 해서 그는 누가 봐도 떳떳하되, 단번에 요직에 앉을 수 있는 한 방의 기회를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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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관중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동제 노남군 게양부.
초휴는 게양부 외곽 길가의 아름드리나무 위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군을 떠난 후 그는 줄곧 인적 드문 산길만 골라 석 달을 이동한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도착한 후에도 오늘까지 이미 한 달을 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게임 원본 줄거리에 나비효과로 인한 변동이 생기지 않은 이상, 이때쯤 관중형당의 거물급 인사가 이 길로 지나가게 되어있었다. 초휴를 관중형당에 들여보낼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할만한 인물이었다.
하염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마침내 길 저편 끝에서 죽이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휴는 최대한 기세를 거두어들인 후,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사람이 탄 준마 열 필 정도가 나는 듯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무리에는 외강경도 있고 내강경도 있었지만,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분명 외강경이었다.
그런 실력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호위를 받는 것으로 봐서, 신분이 고귀한 자임이 분명했다. 남색 비단 도포 차림에 나이는 마흔 남짓으로 보였고 용모는 단정하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허리에는 근사한 장검도 차고 있었건만, 지금은 낭패를 면치 못한 몰골이었다.
뒤이어 수십 마리에 달하는 준마의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들 대오에도 외강경과 내강경이 섞여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원수로만 따져봐도 앞서 도망가고 있는 무리보다 몇 배는 실력이 강할 것 같았다.
추격 대오를 이끄는 자는 쉰 살가량의 인상 더러운 흑포(黑袍) 무사였다. 그는 앞서 내달리는 무리를 향해 갈라 터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초원승(楚源升)! 지난날 네 아비가 내 사부님을 죽인 원한을 오늘 꼭 갚고야 말 테다. 네놈의 가죽을 벗겨내고 힘줄도 뽑아서 사부님 영전에 바칠 것이야!”
그러자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초원승이 코웃음을 쳤다.
“네 사부 칠살노귀(七殺老鬼)는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백여 명이나 되는 소년 소녀들을 납치해 사악한 무공 수련의 희생양으로 삼았으니 죽어 마땅했다. 진작에 십팔층 지옥 끝에 떨어져 속죄하고 있을 터, 제사 따위를 왜 지내 준단 말이냐.”
“음상자(陰湘子), 지난날 선친께서 어린 너를 살려주셨건만,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들다니! 관중으로 돌아가는 즉시, 관 당주께 말씀드려 너 같은 사마외도를 죄다 쓸어버릴 것이다!”
“관중형당으로 돌아간다고? 초원승, 꿈도 야무지구나. 내가 오늘 자그마치 아홉 조직 산하 열여덟 개 산채의 마도 동료들을 모두 이끌고 왔느니라. 그런데도 네놈이 목을 제대로 달고 관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성싶으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음상자가 자신이 탄 말에 일장을 내지르자, 사악한 장력 한 줄기가 말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말은 온몸의 기혈이 폭발하더니 속도를 최대치로 올려 한달음에 초승원 무리를 앞질러 막아섰다. 그 바람에 말은 온몸의 혈관이 죄다 터져 숨이 끊어졌다.
“죽어라!”
음상자가 일장을 내지르자 검은 강기 속에 응집된 살기가 이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장력 속에 담아냈다. 미워도 죽이고, 원망스러워도 죽이고, 상대의 것이 탐나도 죽인다. 이름하여 ‘칠살마장(七殺魔掌)’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음상자의 실력은 외강경 중에서도 정상급이었다. 강기가 실린 장력이 폭발하면 그 힘이 수 장 거리에 미칠 정도였다.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편 무리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란 말이었다. 결국, 초원승 등은 말에서 내려 반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연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틈으로 상황을 숨죽여 관망하던 초휴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기다리던 인물이 마침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려온 인물이 음상자는 당연히 아닐 터였다.
엄밀히 따져 초원승을 관중형당의 사람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관중형당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만은 남달라서, 당주 관사우마저 그를 깍듯이 예우했다. 그는 바로 전임 당주인 ‘거협(巨俠)’ 초광가(楚狂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혼란한 강호에 몸담은 이상, 본능적으로 자기 일신의 명리와 권세를 먼저 생각하고 힘을 키우려 드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진정으로 대협의 칭호를 들을 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초광가다.
지난날 초광가의 협행은 사실 대협의 수준을 넘어선, 심지어 거협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사실 사악함과 간악함을 뿌리 뽑고, 위험과 곤궁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는 일들은 관중형당의 역대 당주들도 해온 일들이다. 다만 초광가가 독보적으로 세간의 경탄을 자아냈던 일화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북연과 동제 간 벌어진 전쟁에서 양측 모두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필승의 전략지로 택했다. 하지만 그 마을에서 전쟁의 화마가 불타올랐다가는 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죄다 죽을 판이었다.
이에 초광가가 홀로 말을 내달려 북연과 동제 대장군의 칼날을 막아섰다. 양측의 장수와 맞서 싸운 와중에 중상을 입긴 했지만, 그가 전쟁을 막은 덕에 마을은 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거협’이라는 별호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세상의 이치상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강자만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초광가는 일대를 풍미했던 거협이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만큼 강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도왔던 사람은 무수히 많았지만, 척을 지게 된 자들은 더 많았다. 그는 그간의 업보를 어쩌지 못하고 당주가 된 지 이십년도 채 못 되어 의외의 죽음을 맞았다. 역대 당주들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짧았던 당주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광가는 갔어도 그가 토대를 잘 닦아놓은 덕분에 후임 당주 관사우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초광가가 베푼 협행이 아니었더라면 관중형당은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으로 전쟁을 막았던 살신성인의 의협심은 북연, 동제, 서초 삼국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관중형당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계기도 되었다.
사실 현임 당주 관사우도 초광가가 발탁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의 관사우는 인정에 치우침 없이 공평무사하기로 이름난 덕에 ‘철면판관(鐵面判官)’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그는 범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매정하리만치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친아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관중형당의 잣대에 준거해 그의 무공을 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융통성 없는 강직 일변도의 성정으로 보자면, 관사우가 대권을 잡기에 부적격한 인물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초광가는 주위의 반발을 물리치고 과감히 그를 당주 자리에 올렸다. 그것도 임종 직전에 자신의 명성과 위엄을 내세워 전격적으로 처리해버렸다. 어찌 보면 그의 독단적인 결정이 지금의 명예로운 관중형당을 만들어 낸 거나 다름없었다.
초원승은 이처럼 전설적인 인물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비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였을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확실히 선친과 흡사했다. 그래서 세간으로부터 ‘관중대협’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초휴가 보기에는 사람이 이도 저도 아닌 게 밋밋하기만 했다. 그나마 ‘별다른 특징이 없다’라는 점이 바로 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초원승은 마흔 남짓에 외강경이 되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이 정도라도 대단한 실력에 속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초광가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무공 스승이면 무공 스승, 수련자원이면 수련자원,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려왔다.
무공 스승도 하나같이 대단한 고수들이어서, 더러는 선친의 벗들이었고, 일부는 선친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외강경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심을 받을 만했다.
물론 소싯적에 용호방에 오르기도 했었다. 순수한 본인 실력이라기보다는 선친의 후광을 입은 덕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초광가를 아비로 둔 탓에, 그도 억울한 점이 있긴 했다. 임종에 앞서 초광가가 관중형당 사람들에게 당부하길, 자기 아들에게는 형당의 그 어떤 직무도 맡기지 말라고 했다. 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시기의 대상이 될까 걱정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초광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없어질 리는 만무했다. 이 때문에 형당 내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았고, 실질적인 위상이 관사우 바로 다음가는 존재이기도 했다. 실권이 없는 허울뿐인 자리이긴 했지만.
하지만 실권이 없다고 해도, 그가 쥐고 있는 인맥마저 도매금으로 무시할 만한 건 아니었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훗날 그도 어느 지역의 패주급 인물이 충분히 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애석하게도 초원승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어설프게나마 선친을 본받아 정의를 받들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데만 전력을 다할 뿐이었다. 사실 그나마도 신통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소소하게 협행을 하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안이 능력 밖으로 커져 버리거나, 상대의 실력이 너무 강할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겉으로만 선친의 흉내를 내는 것은 그런대로 통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 옛날 양국이 맞댄 칼날 사이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전쟁을 막았던 선친의 담력을 물려받지 못한 그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왕년의 초광가는 일단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곧장 내질렀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일대의 거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원승은 그저 선친을 닮고 싶다는 마음만 앞선 탓에, 일을 행하는 규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관중대협’이라는 감투라면 관중에서 행세하며 먹고 살기에는 별 무리가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초휴가 기다리고 있던 자가 바로 초원승이었다.
관중형당에 자기 힘만으로 들어가는 것과 초원승의 천거를 통해 들어가는 것은 시작부터가 다를 터였다. 이때 나무 아래쪽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휴는 여전히 출수를 미루고 있었다. 초원승이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을 맞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무슨 일이든 때를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면 그가 좋을 때보다 위급한 순간을 노리는 게 백 배는 나았다.
게임 원본 줄거리에서는 초원승이 이번 추격전에서 중상을 입고 홀로 살아남아 관중으로 돌아간다고 되어있다. 이에 크게 격분한 관사우가 강호 포두들을 대거 출동시켰고, 음상자는 이들에게 쫓기다가 동제에서 참살당한다. 지금 상황은 역시 줄거리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계속 수세에 몰리던 초원승이 전세를 만회할 비장의 무기로 검진(劍陣) 한 폭을 펼쳐 들었다. 지난날 초광가는 주위에 무수한 벗들을 두었고, 그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도 늘 그의 곁에서 보은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 검진도 검왕성(劍王城) 고수가 호신용으로 쓰라며 초광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검진을 일일이 배치할 필요 없이, 펼쳐 들기만 하면 내력으로 진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일회용인 탓에, 한 번 사용 후에는 폐기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여하튼 이 검법의 힘을 빌린 초원승은 음상자의 무리를 단번에 열 명도 넘게 해치웠다.
상대가 우왕좌왕하자 초원승 등은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