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350)
1350화 너의 패배다
필유진은 대라천에 있을 때 초휴와 별 접점이 없었다. 사실 그는 온갖 신분을 치우고 보면 아주 참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현천경은 삼청전의 영향력 아래서 지내는 상태였다. 반항할 수도 있었고 완전히 굴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필유진은 반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인내하며 힘을 키워온 것이다.
같은 팔중천 무선인 삼청전의 정태일이나 곽궁필이 가끔 조롱하고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아냈다. 남을 상대할 때도 참았고, 실력을 발휘할 때도 줄곧 참아왔던 것이다.
허공에서 필유진이 인결을 맺자 그를 둘러싸고 다시 흑수의 영역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지를 뒤덮는 게 아니라 그의 발밑으로 끝없이 엉겨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현천제군(玄天帝君)의 법상이 솟구쳐 올랐다. 필유진은 현천제군의 법상 위에 올라섰다. 기이한 힘이 그에게 걸려서 발아래 법상과 이어져 있는 듯했다.
초휴는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천제군은 현천경에서 모시는 신이다. 태고의 전설에 나오는 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천경에서 오래도록 받들어 왔다. 다른 종문이 모시는 신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 지금 필유진의 행각은 거의 불경의 극치라 할 만했다. 신의 앞에 설 수도 있고, 한가운데 설 수도 있다.
하지만 필유진은 굳이 법상의 머리를 밟고 선 것이다. 저렇게 불경할 데가 있나?
다음 순간 끝없는 흑수가 필유진의 몸에서 용솟음쳤다. 그의 몸뚱이는 무저갱처럼 현천제군의 법상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별안간 힘이 강대해진 게 아니었다. 원래 필유진에게 속했던 힘을 도로 거둬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필유진은 줄곧 힘을 숨겨왔다. 정태일과 곽궁필은 그의 실력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고, 삼청전 전체는 현천경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유진은 이미 팔중천에 오른 지 오래였다. 구중천의 지존 강자는 아니지만, 실력이 약할 리가 없었다. 그는 실력 대부분을 현천제군의 법상에 융합해 봉인함으로써 외부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구중천을 돌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 힘을 절대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사가 달린 싸움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휴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는 필유진이 힘을 완전히 흡수하기 전에 출수하여 탄천을 날렸다.
그러자 끝없는 흑수가 탄천의 일도를 가로막았다. 부드러운 힘은 일도에 집어 삼켜졌으나, 도무지 끝이 없어서 아무리 삼켜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법천상지를 거둬들인 초휴의 미간이 깊게 팼다. 현천경의 흑수는 고래 심줄처럼 질기고 까다로웠다.
흑수의 힘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으나 워낙 질겼다. 아무리 갉아먹고 깎아 없애도 여전히 그대로인 듯했다.
육도윤회탁을 흔들자 육도사바중묘화륜이 펼쳐졌다. 육도의 힘이 끝없이 회전하면서 필유진을 가두어 흑수의 힘을 소멸하려 했다.
법천상지는 신통이기 때문에 소모가 컸다. 그러나 육도사바중묘화륜은 신통이 아니고, 지금의 초휴가 시전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이렇게 양쪽 다 소모전에 들어간다면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필유진의 낯빛은 이미 시커메져서 그가 불러낸 흑수절역만큼이나 검었다. 초휴는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는 불가능했다. 현천경 측이 이미 열세에 몰렸기 때문이다.
하계 무림과 현천경의 싸움은 일방적으로 하계 무림이 압도하고 있었다. 사실 초휴 휘하 곤륜마교 제자들만으로도 현천경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아예 하계 무림 전체가 몰려온 것이다.
노천사와 야소남 두 사람의 지휘하에 무사들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고, 이미 현천경 대문 앞까지 와 있었다.
현천경의 진법은 이미 초휴가 무너뜨린지라 대라천에서 가져온 몇 가지 비장의 패와 진반으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명확했다.
풍우는 진청제한테 실컷 두들겨 맞아 콧등이 시퍼레지고 얼굴이 퉁퉁 부었다. 선혈을 토하는 꼴이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계 무림 측의 인원이 훨씬 많았으나 풍우를 두들겨 패는 사람은 진청제 하나였다.
진청제의 말을 옮기자면, 자기는 여자를 괴롭히는 놈이 제일 질색이다. 저놈을 제일 먼저 패 죽이지 않으면 자기 주먹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종문이 이 지경까지 몰린 것을 보자 필유진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노호성을 터뜨렸다.
무한한 흑수가 하늘을 꿰뚫을 듯한 장검으로 변하더니 초휴를 베어 들어갔다. 동시에 흑수가 발아래서 거칠게 용솟음치며 육도사바중묘화륜을 둘러싸 버렸다.
현천제군에 봉인해 두었던 힘을 흡수한 필유진은 이미 팔중천 최절정에 이른 상태였다. 단순히 기세만 놓고 봐도 저번에 초휴와 겨루었던 염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전투력은 좀 달렸다. 염마는 호전적인 시바전 출신이지만, 필유진은 가급적 조용히 지내려 했던 탓에 장문이 된 후로는 남과 싸운 적이 별로 없었다.
거대한 흑수의 검이 내리 떨어지는 순간 초휴의 이마에서 세 번째 눈이 열리며 음양 본원의 힘이 끌려 나왔다. 찰나 검고 흰 빛줄기가 허공을 관통하자 천지가 진동하는 동시에 흑수의 검이 그대로 녹아 깨져버렸다.
필유진이 인결을 맺자 끝없는 흑수가 그를 둘러쌌다.
“현천제군이여, 나에게 힘을!”
흑수가 수축하고 응결하는 순간, 그 자리에 필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흑수현갑(黑手玄甲)을 걸친 현천제군의 거대한 법상이 있을 뿐이었다.
현천제군의 법상이 일권을 내갈겼다. 스치는 곳마다 극양의 힘이 한계까지 펼쳐지고, 온 천지의 작은 물방울 하나까지 모조리 흑수로 변해 빨려 들어가며 힘이 늘어났다.
나중에는 흑수가 아예 현빙(玄氷)으로 변해 힘의 법칙과 원신마저 얼어붙게 했다. 마치 상고 시대의 빙하에서 뛰쳐나온 거대한 마신 같았다.
그 끔찍하고 놀라운 힘 앞에 육도사바중묘화륜은 그대로 터져나갔다. 필유진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그때 만도천궁에서 본 게 나의 진정한 실력인 줄 알았더냐? 현천전신상(玄天戰神相)은 아마 처음 볼 것이다. 이 일장에 죽는 걸 영광인 줄 알아라!”
초휴는 눈썹을 살짝 꿈틀했다. 현천제군에는 두 가지 법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는 도문의 제군 법상, 다른 하나가 지금의 현천전신상인 것이다.
필유진같은 전형적인 도사가 근접 격투술을 수련했다니, 웬만해선 믿기 어려울 일이었다. 저자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근접 육박전이라면 초휴 또한 장기였다.
그리고 법천상지가 펼쳐지자 현천전신상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신의 몸뚱이가 나타났다. 성마불멸신도 함께였다.
음양의 두 갈래 힘이 초휴의 육신에서 극한까지 발휘됨과 동시에 필유진과 마찬가지로 일권을 날렸다. 허공이 뒤흔들리고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위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린 일권으로 충돌했다. 일순간 천지가 온통 진동했다. 그 강대한 힘이 터져 나오는 위세는 허공을 찢어버리고 법칙을 무너뜨릴 지경이었다.
무수한 고드름이 떨어져 내리자 사람들은 피하느라 사력을 다했다. 피할 수 있을 뿐,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무교 제자 하나는 충돌의 여파로 생겨난 고드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힘으로 맞받아쳐 부수려 했다. 그러나 고드름이 힘의 법칙을 침식하면서 강대한 한기에 얼어붙은 직후, 떨어져 내린 고드름에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초휴와 필유진쯤 되는 경지에 이르면 천지의 힘에 극한까지 가까워져 있는 것이다. 직격이 아니고 여파라 한들 평범한 무사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천사는 즉각 사람들을 흩어지라고 명령했다. 그 여파에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안 되었다.
법천상지와 현천전신상은 거대한 두 마신처럼 허공에서 격렬하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갈 뿐, 응용이나 변화는 전혀 없었다.
쌍방 모두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힘에 대한 깨달음에 의지해 싸우는 것이다.
지극히 원시적이고 단순한, 어떤 반전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힘으로 겨루는 대결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필유진은 자신이 우세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참고 버텨왔다. 힘을 모조리 현천제군의 법상에 봉인해 두었다가 이제 모두 폭발시켰으니까.
지금 그의 실력은 팔중천 최절정이었다. 반면 초휴는 고작 육중천에 불과하지 않은가.
초휴의 전투력이 놀랍고 법칙에 관한 깨달음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온갖 비법과 신통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육중천의 몸으로 팔중천과 맞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힘 대 힘으로 맞붙는데 왜 점차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필유진은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초휴는 이미 음양의 힘을 그의 기초적 근원으로 쓰고 있었다. 이 천지에 존재하는 힘의 근본이건 무엇이건, 음양 본원보다 더욱 기초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상고의 마신처럼 거대한 두 그림자가 허공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웠다. 그러다 결국은 초휴가 완전히 우세를 점했다.
현천전신상은 현천경 뒤쪽 공터에 내리눌린 채 연신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일권이 내리 떨어질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휘청이며 지룡이 용틀임하는 듯했다. 현천전신상의 힘은 거대한 폭발 속에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필유진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현천전신상의 온몸에 가득하게 뇌문이 떠오르더니 단번에 폭발했다.
현천주마뢰(玄天誅魔雷)!
법상의 자폭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힘은 법천상지라 해도 막기가 불가능했다.
초휴는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법천상지도 무너졌다.
그러나 필유진의 상태는 더 처참했다. 어마어마한 반작용에 이미 피를 토하고 있었다.
초휴는 태연했다.
“필 장문, 당신의 패배로군. 저항해 봐야 소용없으니 포기하시오. 그러면 현천경 일맥의 마지막 씨앗 정도는 남겨줄 테니까.”
필유진은 초휴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내민 답은 인결이었다.
일순간 현천경이 자리한 종문의 땅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뭔가 땅을 뚫고 나오려는 것이다.
필유진은 자신이 패했음을 알았다. 애초에 초휴가 이만한 진세를 몰고 온 시점에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졌다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이런 지경까지 몰렸으나 필유진은 팔중천 무선이었고 오래도록 현천경 장문 노릇을 해 왔다. 그리 순진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초휴가 어떤 인간인지도 잘 알았다. 만도천궁에서 한 방 먹은 뒤로 이미 초휴를 조사해 보기도 했다.
초휴는 악랄하고 박절하기로 대라천과 하계에서 공히 이름이 나 있었다. 그와 원수지간인 종문 치고 온전하게 남은 곳은 지극히 드물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켜 현천경이 전승을 남길 최후의 명맥만은 보존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인가?
강자의 보호를 잃은 현천경이 다시 굴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그리고 현천경 전체가 완전히 멸망하더라도, 초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필유진의 인결로 인해 대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천경 무사 일부는 아직 종문 내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필유진의 인결이 터지자 다들 종문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면 아래서 뭔지 모를 것이 음산한 한기와 살기(煞氣)를 흩뿌리고 있었다. 아차 하는 사이 몇몇 무사들이 갈라진 틈새로 떨어져 그것에 잡아먹혔다. 하계 무사만이 아니라 적잖은 현천경 무사들도 그렇게 사라졌다.
초휴의 낯빛도 다소 변했다. 이건 사람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지 않은가.
황량하고 외진, 먼 땅의 기운이 느껴졌다. 기나긴 용의 울음이 땅 속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대지가 완전히 갈라졌다.
칠흑처럼 검은 창룡이 현천경 종문 아래서 솟아오르며 천지가 울릴 듯 포효했다. 그것은 교룡 같은 게 아니라 날 때부터 뿔을 지녔고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창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