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390)
1390화 번외편 (2) – 오십년 후
신기원이 열린 지도 오십년이 흘렀다.
곤륜 천문은 한 번 더 열리는 천문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었다.
강호 각 세력의 무사들이 속속 구름처럼 모여들자,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던 극북의 땅 곤륜에는 간만에 활기가 넘쳤다.
이때, 마흔 남짓 된 중년 무사가 십대 후반의 앳되어 보이는 제자 여러 명을 데리고 산을 오르며 열심히 설명했다.
“오십년 전, 초 교주가 천하를 상계와 하계로 양분한 뒤로 우리가 있는 세상은 새로운 원력(元歷)으로 접어들었다. 즉, 신기원이 열린 것이지. 하계에서는 진단경 절정급까지만 수련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진화련신에 오르면 무조건 한 달 내로 천문에 가서 대라천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 규칙을 어길 시에는 강호 연합 집법당(執法堂)에 잡혀가 혹독한 벌을 받는단다. 마찬가지로, 대라천 강자들도 함부로 하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했지. 이리하여 양계는 얼추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된 셈이다.”
“다만, 만에 하나 하계에 정말 대단한 천재가 탄생했는데도 환경의 제약 때문에 빠르게 성장할 수 없다면, 그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초 교주가 특명을 내리길, 십년마다 한 번씩 천문에서 천문대회를 열게 했다. 이때만큼은 상계의 강자나 세력들도 하계로 넘어와 제자를 거둘 수 있도록 말이다.”
“마찬가지로, 단시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자신이 있는 하계 무사들도 천문대회에 와서 자신의 자질을 증명하면 된다. 본인에게 정말로 한 번에 대라천으로 건너갈 잠재력이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겸 해서 말이지. 물론 오늘 너희들을 데려온 건, 견식을 넓혀주려 함이다. 지금쯤이면 천문에 모여든 준걸과 고수들만도 부지기수일 테니, 이번 기회에 잘 봐두거라. 수련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니, 나도 일비충천(一飛沖天) 할 수 있다는 망상일랑 접어두고.”
그때 한 제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사부님! 사부님의 부친께서는 초 교주와 친한 사이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혹시 특별히 부탁드려서 뒷문으로 편하게 들어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 말에 중년 무사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님 이불삼(李不三)은, 초 교주가 젊은 시절 제주부에 들렀을 당시 사귄 벗이었다. 당연히 친한 사이였지. 그렇지만 초 교주가 워낙 다사다망하다 보니, 하계를 떠나 있은 지가 꽤 되었다. 이제는 부탁하고 싶어도 만나는 거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끼, 이놈들! 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 뒷문으로 들어갈 궁리나 하고 자빠졌느냐! 차근차근 수련하는 것만이 제대로 강해지는 지름길임을 걸 알아야지.”
이윽고 산 정상에 오르자 천문의 산문 패루(牌樓)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앞에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센 노도사 하나가 단정히 앉아있었다.
몸에 걸친 도포도 군데군데 꿰맨 흔적이 역력한 것이 여간 남루하지 않았다. 그는 온몸에 먼지까지 뽀얗게 덮어쓴 채로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생기가 흘러나지 않았으면 조각상으로 착각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그를 보자 중년 무사가 작은 소리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 노도사를 잘 기억해 두거라. 절대로 화나게 해서는 안 돼. 저 양반은 오십년 전부터 줄곧 여기를 지켜오고 있지. 누구든 그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양계를 넘나들 수 없다. 십여 년 전, 천지통현 정상급의 고존 전인 하나가 몰래 하계로 놀러 가려다가 들켰지 뭐냐. 당시 저 노도사가 손가락 한 번 튕겨서 그자의 무공을 폐해버렸다. 그자의 사부는 무선경 고존이었는데. 화가 나서 여기까지 따지러 왔었다. 하지만 정작 노도사 앞에서는 출수 한 번 못 해보고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더구나. 심지어 수년 내지, 십년에 한 번씩 삼청전 장문 허귀산과 부장문 방일진이 여기 천문까지 와서 저 노도사에게 인사를 하고 간다더군.”
바로 이때, 두 무리의 사람들 간에 충돌이 벌어져서 천문 앞 광장은 싸우는 소리로 온통 시끄러웠다.
천문대회는 사방에서 영웅호걸들이 모여드는 자리인지라, 원한이 있는 자들이 여기서 맞닥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때 짙은 마기를 번뜩이는 장극(長戟)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더니, 굉음과 함께 벼락처럼 두 무리 사이에 내리꽂혔다.
이어서 빼어난 자질에 외모마저 눈부신 흰색 장삼 차림의 젊은이가 다가왔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잉어는 용문(龍文)을 뛰어올라 용이 되고, 사람은 천문에 들어 영웅이 되지. 오늘같이 좋은 날, 자문(自門)의 제자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게 해줄 생각은 안 하고 여기서 고작 해묵은 감정싸움이나 벌이고 있다니, 이런 걸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하는 거 아니겠소?”
그 젊은이를 보자마자 두 무리의 사람들은 동시에 출수를 거두었는데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 중년 무사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분의 얼굴도 잘 봐둬라. 곤륜마교 사대 마존 중 신무마존(神武魔尊)인 ‘무쌍온후’ 여봉선이시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인물이지. 그간 저 양반이 나서서 중재한 대파 간의 분쟁만 해도 한두 건이 아니란다. 매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하니 강호인들의 신망이 대단히 두터운 사람이지.”
그때였다.
“여 형, 이번에 곤륜마교 사람들 모두가 하계로 내려온 건가?”
이미 대라천으로 막가를 옮긴 막천림이 다가와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봉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성교의 위세가 워낙 독보적이니, 첫 천문대회에 참석했던 것 말고는 그 뒤로 다른 세력들과 제자를 놓고 다툴 일이 없었지. 하지만 벌써 오십년이 지났잖은가. 이제는 우리도 슬슬 각 당구에 제자들을 보충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네.”
그런데 막천림이 돌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 형, 내가 들은 얘기가 좀 있다네, 우리 막가의 하계 제자가 소식을 전해왔는데, 누군가가 동제에 월녀궁을 재건했다는군. 아무래도 그녀가 아닌가 싶으이.”
그 말에 여봉선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이내 표정을 바꾸어 미소 지었다.
“사람도 참,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나.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먼 옛일에 불과한 것을. 피차 인과도, 인연도 끊어진 지 오래 아닌가. 그런데 막 형, 자네는 가만히 앉아서 제자들이 진화련신을 돌파해 대라천으로 날아오르길 기다리면 될 것을, 굳이 뭣 하러 여기까지 직접 내려왔는가?”
그러자 막천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한 사내를 향해 입짓을 해 보였다, 그는 검은 구름 문양의 구룡포를 입은 비범한 기세의 영백록이었다.
“이게 다 영가의 저치 때문일세! 영가 노야가 물러나면서 영백록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았지. 그길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쳐들더니 대대적으로 쇄신의 칼을 빼 들었지 뭔가. 이제 상수 영가는 싹 다 물갈이가 된 셈이지. 저 사람이 과연 인재는 인재더군. 세가의 입지가 예전과는 달라서 제자 영입이 여의치가 않자, 데릴사위로 들이는 절묘한 수법까지 생각해냈으니 말이네. 이번에 영가 여제자들을 거느리고 데릴사위 겸 제자를 거두러 온 거지. 남자 측 입장에서야 천문의 문턱도 넘고 명문대가 출신의 아리따운 부인을 맞을 수 있으니 겹경사가 아니겠는가! 지난번에도 영가는 이런 방법을 써서 제자들을 적잖이 모아들였다네. 나도 그 수법을 한번 배워볼까 싶어서 와본 걸세.”
“하하하! 막 형, 자네가 직접 자손 번창에 기여한 것만으로도 이미 가문을 위해 큰 공덕을 쌓았잖은가. 굳이 영 형한테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순간 어디선가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막천림의 얼굴이 노래졌다.
누가 왔는지 굳이 뒤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낙비홍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놀려댔으니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심장이 안 쫄깃해질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웬일로 낙비홍이 그를 놀려대는 대신, 한쪽 구석으로 뛰어가 웬 여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는 위아래로 하늘거리는 자주색 치마를 갖춰 입은 목자의였다. 못 본 사이에 부쩍 도도해지고 성숙미가 더해진 모습이었다.
“목 언니, 아니, 목 누이? 도대체 폐관을 얼마 동안이나 했던 거야?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러자 목자의가 눈을 흘기며 그녀를 밀어냈다.
“대체 내가 언니예요, 누이예요? 하나만 하자구요.”
낙비홍이 원숭이 새끼처럼 다시 그녀에게 엉겨 붙으며 깔깔 웃어댔다.
“아무려면 어때. 이거나 저거나.”
이 말끝에 낙비홍이 어느 한쪽을 향해 입을 삐죽댔다.
“흠, 그대의 연적도 왔군그래. 가서 만나보지 않을 테야? 초 교주가 성숙한 여자한테 좀 끌리는 편이잖아. 지금 누이가 이런 모습으로 교주한테 달려가면 적어도 저 여자한테 꿀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낙비홍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매경령이 불꽃처럼 빨간 치맛자락을 늘어뜨린 채 음마종의 제자 영입을 지휘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목자의가 눈썹을 치켜뜨더니 이내 콧방귀를 꼈다.
“저분은 이제 마존이 된 몸이에요. 내가 저런 여자한테 상대나 되겠어요?”
곤륜마교가 새롭게 마존을 임명하자 매경령은 적련마존으로 봉해져 음마종도 재건했다.
이때 매경령이 목자의의 시선을 느꼈는지 두 여인의 눈길이 딱 마주쳤다. 그러고는 피차 해맑게 아리따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서 그녀들의 눈빛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세는 뭇사람들을 떨게 했으니 여봉선마저 급히 자리를 뜨고 말았을 정도였다.
세상에 함부로 건드려도 좋을 여인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단연 건드려서는 안 될 게 바로 곤륜마교 여인들이었다.
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두 여인의 팽팽한 신경전도 졸지에 김이 새고 말았다.
방칠소가 어깨에 검을 멘 채 맞은편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가 가리키는 상대는 백옥 도관과 구름 문양 도포 차림으로 선풍도골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승정이었다.
“장 형! 이거 너무 치사한 거 아니오? 기껏 쓸 만한 제자들을 골라놨더니만, 뇌법에다 검법까지 덤으로 얹어서 가르쳐준다고 꼬드겼다면서? 이런 식으로 남이 찍어둔 제자를 빼돌려 대면 어쩌냐고?”
노천사는 오십년 전 일찌감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천사부는 장승정이 넘겨받았다.
워낙 오랜 세월 탄탄히 저력을 쌓아온지라, 그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한 끝에 이제 무선 구중천에 이른 상태였다.
게다가 순양도문 및 진무교와 도문 연맹을 결성하여 대라천에서도 도존의 삼청전에 버금갈 세력을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
장승정이 차분히 받아쳤다.
“그야 우리 천사부에 전승이 뇌법만 있는 게 아니라 검법도 있으니까. 제자 영입이야, 각자 재주껏 하면 될 일이지. 솔직히 그대가 뇌법을 내세워 하계 무사들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나는 전혀 상관치 않을 거요.”
그 말에 방칠소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댔다.
“가만 보면 그대는 이 방칠소만 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니까! 왕년의 용호방 순위권자들 가운데 장 형과 영백록이 제일 가증스러웠다 그 말이야. 감쪽같이 자기들만 고고한 척 순수한 척,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면서 말이야. 내가 진작부터 알아봤다니까! 오늘 아주 딱 걸렸어. 장 형의 뇌법이 센지, 아니면 내 검법이 강한지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여봐라, 검을 내와라!”
그러자 영백록이 자기는 왜 걸고 넘어지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방칠소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만, 그만 들 해요. 방칠소! 당금 검도계의 제일인자라는 분이, 그것도 검도 연맹의 맹주까지 맡은 분이, 이렇게나 채신머리없이 굴어서야 쓰겠어요? 당신 사부님과 모백상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잔소리깨나 들을 걸요?”
어느샌가 다가온 매경령이 방칠소를 냅다 끌고 갔다. 끌려가면서도 그는 계속 구시렁거렸다.
“오늘은 우리 경령 누님 얼굴을 봐서 참는 거다. 자네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라도 내가 참는 거라고. 알겠소, 장 형?”
장승정이 뒷짐을 쥔 채 씩 웃었다.
“얼마든지 상대해드릴 테니, 언제든 말만 하시구려.”
그는 매경령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적련마존을 뵙소이다.”
노천사와 초휴가 각별한 사이였다고는 하나, 장승정은 곤륜마교와 그렇게까지 친숙한 사이는 아니었다. 매경령 등과는 만나면 인사나 건네는 정도의 교분에 불과했다.
매경령이 장승정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골칫덩이 막내아우라도 대하듯 방칠소를 쏘아보며 타박하는 소리를 했다.
“이봐요, 방 맹주님! 천하검도연맹을 이날 이때껏 키워서 양계 검도의 정상 자리를 제패하기까지, 당신 사부님과 모백상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알기나 해요?”
방칠소가 입을 삐죽댔다.
“아니, 내가 맹주로 있으면서 천하검종연맹 망신이라도 시켰다는 겁니까? 섭섭하게 누님까지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 그나저나 초 형은 여태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겁니까. 사십년 전 천문대회 때 한 번 보고 아직도 못 만났으니 말이지. 지금쯤이면 그의 수련이 진정한 정상에 이르고도 남았을 텐데, 그래서 세상에 적수도 없을 텐데, 아직도 폐관 수련을 해야 할 필요가 뭐랍디까?”
매경령이 고개를 저었다.
“수십년 전에 독고 교주와 관련된 무언가를 찾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그것을 연구 중이죠. 구체적으로 뭘 연구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말을 맺은 매경령이 다급히 소리쳤다.
“육강하! 육강하!”
하지만 광장 내 어디에서도 그 부름에 응답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그녀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호칭을 고쳐 불렀다.
“혈해마존!”
“여기! 여기 있다!”
육강하가 어디선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혈영(血影) 한 줄기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두 사람 앞에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오매불망 그리도 염원하던 혈해마존에 봉해진 뒤로 그는 줄곧 이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심지어 새로 입교한 곤륜마교 제자들은 그의 본명도 몰랐다. 그저 ‘혈해마존’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초 교주와 함께 그걸 찾으러 갔었던 것 맞죠? 교주님은 대체 뭘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육강하가 머리를 몇 번 긁적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독고 교주가 남긴 흔적을 다시 찾으러 갔던 거지.”
매경령이 눈을 치켜떴다.
“이미 초탈한 양반이 뭘 남겼다고 연구씩이나 한단 말예요?”
육강하가 다시금 뜻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순간 매경령과 방칠소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육강하는 혼자서만 뭘 알고 있기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렁뚱땅 넘기려 든단 말인가.
매경령이 다시 폭주할 기미를 보이자, 육강하는 올 때처럼 또 한 줄기 혈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 * *
대라천 동역. 곤륜마교 내.
초휴의 원신이 몸을 떠나 구중천 위를 떠돌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원신 앞에 ‘마(魔)’라는 글자가 새겨진 영패가 나타나더니 그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원신은 허공을 가로질러 영패를 따라 계속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를 떠돌았을까.
가없이 펼쳐진 운무 사이로 검은 인영 하나가 등을 보인 채 창공을 밟고 우뚝 서 있었다. 바람결에 그의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혹시, 독고유아······?”
초휴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원신이 방향을 어느 쪽으로 틀건 간에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 가능했다.
마침내 그 인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것이 내가 아님을 너도 잘 알지 않으냐. 이건 내가 남긴 표지일 뿐이다. 힘이 꽤 많이 들어간 표지이긴 하다만. 나는 이미 초탈했다. 하여 이 세계에서의 내 힘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네가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이 표지는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나?”
독고유아가 고개를 저었다.
“셋 중 어느 하나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게 누가 될지는 몰랐지만.”
초휴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위 배경이 바뀌면서 정적의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독고유아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없는가? 지금 묻지 않으면 표지는 곧 사라진다.”
초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아야 할 것들은 이미 다 알았으니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거듭 확인할 게 있어서였지. 과연 내 짐작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겠군. 그러니 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고.”
독고유아가 잠시 멈칫하고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너는 나한테서 비롯되긴 했으나, 나는 아니로군. 네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네가 이미 진정한 정상에 섰음을 의미하는 거겠지. 내게 초탈할 비법이 있는데 네게도 가르쳐주랴? 그러면 훗날 언젠가 또 만날 수도 있을 테지.”
이번에도 초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길이 있으니까. 나의 길은, 이미 나 스스로 선택했단 말이지.”
“그럼 좋다. 잘 가거라.”
말을 맺은 독고유아의 표지는 서서히 무너져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이 별빛으로 화하여 떠돌다가 구름 사이로 사라져갔다.
“······잘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