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오기조원(五氣朝元)
세 사람을 태운 작은 배가 수운관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뱃머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을 나누는 동안 이불삼은 선미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얼핏 혼자서만 개고생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는 원망스럽기는커녕 내심 미칠 듯이 기뻤다.
제주부 최하층 낭인 무사에 불과한 그가 용호방 준걸이 무려 세 명씩이나 탄 배를 젓고 있다니. 이것도 나름 경력이 될 테니 신병대회가 끝나고 최소 삼년은 우려먹을 수 있을 터였다.
드디어 배가 맞은편 호숫가에 다다르고 보니 수운관은 듣던 대로 정말 단출했다. 사원 한 칸과 방 몇 칸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밖에는 유람객들의 휴식을 위한 정자 하나가 딸려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정자 주변에는 이미 수백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운집한 상태였다. 길바닥 낭인 무사에서 여러 대형 종문세가 출신들에 이르기까지 면면들도 다양했다.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자 다들 한마디씩 해대는 통에 사방이 떠들썩해졌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그들에게 내주었다.
막천림이야 워낙 동제에서 유명한 가문 출신이고 여기 무사들의 태반이 동제인이다. 막천림의 얼굴을 금세 알아보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당연했다.
한편, 서초 쪽 무사들도 사소루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것만 봐도 그가 서초에서 얼마나 이름이 쟁쟁한 유명인사인지 알 만했다.
다만 초휴는 이 셋 중 가장 유명세가 약했다. 그저 백무기를 비롯한 북연 출신 무사들만 간간이 그를 알아볼 뿐, 대부분이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여기서 또 초휴와 맞닥뜨리게 된 백무기는 참았던 짜증이 다시금 확 올라왔다.
‘저 놈은 또 어쩌다가 막천림과 사소루 같은 자들과 어울리게 된 거야?’
성질 같아서는 초휴를 당장 어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신병대회를 바로 목전에 앞둔 마당에 지레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해서 초휴를 향해 코웃음만 날리고는 아예 외면해버렸다.
백무기의 그런 똥 씹은 표정을 눈치챈 사소루가 초휴에게 나직이 물었다.
“저자와 원한관계라도 있소?”
“있긴 한데 내가 그한테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나한테 원한이 있소이다. 지난날 극북표설성과 몇 차례 충돌한 적이 있었소. 게다가 그 후에 풍만루가 내 용호방 순위를 백무기 위로 올려놓는 바람에 저자의 심기가 불편해졌을 거요. 며칠 전에도 취룡각에서 나한테 먼저 도발하던 모습을 막 형도 보았고.”
옆에서 대화를 듣고있던 막천림이 끼어들었다.
“백무기는 너무 겉으로 보여지는 명성에만 목매는 듯싶소. 실력이란 본디 풍만루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무림의 공인을 거쳐 결정되는 것인데 말이지요. 예컨대 장승정이 용호방 일 위 자리를 십 년 넘게 지키고 있소만, 지금 뜬금없이 풍만루가 그를 일 위가 아니라고 발표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를 믿겠소? 백무기한테 진정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풍만루가 그를 용호방 최하위에 놓은들 강호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초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강호에 나온 이상, 사람들은 명리(名利), 이 둘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지요. 백무기가 나를 미워하건 말건 나는 개의치 않소. 물론 그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해야겠지만.”
사람들이 정자 주변에서 얼마간 더 기다리고 있자니 수운관에서 육순 남짓의 노도사(老道士)가 걸어 나왔다. 빳빳이 풀 먹인 정갈한 회색 도복 차림이고 머리에서는 흰머리 한 가닥 찾아볼 수 없었다. 일신에서 흘러 나는 정기신(精氣神)도 상태가 썩 괜찮게 느껴졌다.
그런데 순간 초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도사에게서 다소 괴이쩍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콕 찍어 말하기는 애매하나, 굳이 표현할 말을 찾자면 ‘자연스럽다’ 정도랄까. 그렇다. 무사 특유의 기세가 아니라 일종의 자연스러운 느낌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현성도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좌중의 낭인 무사들이 먼저 깍듯이 예를 갖췄다. 하나같이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은 수련 과정에서 사부의 가르침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알아서 깨우치는 방법에만 의존하다 보니 종종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생겨나곤 했다. 그런 세월이 길어지며 가르침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 있을 무렵, 누군가가 우연히 수운관을 지나다가 소도사들을 상대로 한 현성도인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같은 이치라도 어찌나 쉽게 풀어 설명했던지, 낭인 무사들은 돌연 세상이 밝아지고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느낌이었다.
이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현성도인의 설법을 들으러 오는 무사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났다. 물론 모든 이가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지만, 도인의 설명이 이해하기 쉽다는 데는 다들 이견이 없었다.
특히나 도가의 무공을 수련한 낭인 무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 현성도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말로야 자기는 도가 경전만 읽었을 뿐, 무공은 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늘 성실히 답해주었다. 물론 무공과 관련 없는 질문이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의 청중들을 대충 둘러보던 현성도인은 순간 의아하다는 눈빛을 내비쳤다. 오늘따라 실력이 고강한 청년 준걸들의 모습이 적잖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그의 뒤에 있던 열 살 남짓한 소도사 여섯 명이 현성도인 앞에 부들 방석을 깔고 한 줄로 앉아 설법을 기다렸다. 그는 서책 한 권 없이 그저 불진 하나 달랑 든 채 소도사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오기조원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전에 이미 그의 강론을 들은 적 있는 무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얼빠진 표정들이 되고 말았다. 일개 평범한 도사가 무공의 ‘ㅁ’도 모르는 어린애들을 상대로 오기조원에 대해 설명한다니, 미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대형 세력 출신 무사들은 더더욱 조소를 머금었다. 설법이 들을 만하다 해서 와봤더니 그저 미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망감만 앞섰기 때문이다. 감히 뭣도 모르는 도사가 오기조원을 논하려 들다니. 오기조원 경지의 무사 구경도 못 해봤으면서! 하지만 남들이야 무슨 반응을 보이건 간에 현성도인은 개의치 않고 강론을 시작했다.
“오기조원은 우리 도가의 수련기법 중 하나이다. 다만 오늘 내가 말하려는 건 무(武)가 아닌 의(意)를 닦음에 관한 것이니라. 즉, 오기조원의 참뜻에 대해 논할 것이다. 오기조원에서 심장은 신(神)을 담고 간은 혼(魂)을 담고 비장은 의(意)를 담고 폐는 백(魄)을 담으며 신장은 정(精)을 담느니라. 인체 내 다섯 장기는 천지 오행과도 대응되지. 하여 도가의 수신(修身)은 천지와 직접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심장과 대응을 이루는 게 남쪽 적제(赤帝, 오제 가운데 하나로, 오행설에서 여름을 담당하는 남쪽 신)의 불이다. 강렬한 뜨거움이 특징으로, 초조하고 불안한 속성을 띠지.”
“그렇다면 어찌 수행해야 할까? 그건 매우 간단하다.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키면 된다. 원숭이처럼 산란하게 날뛰는 심장을 굴복시켜 고분고분한 손오공으로 길들이는 이치인 셈이지.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 원숭이를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 이 녀석만 잘 다스리면 심장에 담긴 신(神)이 안정된 뿌리를 내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사실 이런 이치는 어디에나 적용되지. 불가에서 중시하는 사대개공(四大皆空, 만물에는 고유한 실체가 없으니 세상의 모든 현상은 공허하다)의 개념도 이와 같다. 속세의 평범한 자가 세상을 볼 때 종종 자신의 마음에 비쳐진 대로 보게 된다. 해서 심장이 마구 날뛰고 생각이 갈피를 못 잡는 게야. 반면, 일관된 불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저 맑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느니라. 이리해야 비로소 세상의 허와 실을 깨닫고 설법의 화두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우리 도가와 비교할 때 불가 화상들은 선문답이랍시고 말장난이 심하단다. 너희들은 그런 화상들에겐 배우지 말거라.”
술술 이어진 설법은 도가의 오랜 숙적인 불가를 조롱하며 일단락되었다. 소도사들이 잠시 개구진 표정을 지어 보인 것과 달리, 좌중의 무사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더러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이고, 설법 내용이 들을 만하다는 반응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말장난이야? 마음에 키우는 원숭이는 뭐고, 사대개공은 또 뭐지? 설마 자기 마음을 굴복시키기만 하면 오기조원을 뚫을 수 있단 소리야? 이게 무슨 말 같지 않은······.’
하지만 초휴 일행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특히 삼화취정을 지척에 두고 있는 초휴로서는 마음을 제어하는 수련과 관련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마음의 수련과 거리가 먼 자들에게는 현성도인의 설법이 말 같지 않은 개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초휴는 뭔가 마음의 눈이 확연히 떠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말들이 수련 자체에는 별 쓸모도 없고 공력을 증강시키지도 못하며 무도의 수련방법과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초휴에게는 수련 방향을 확실히 일러준 셈이었다. 일러준 방향대로만 계속 나아간다면 삼화취정은 물론, 오기조원도 바라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때 사소루가 한옆에서 중얼대듯 말했다.
“저 노도사는 실로 범상치 않은 인물인 듯하군. 정말 무공을 못 하는 걸까?”
초휴가 고개를 저었다.
“그야 알 수 없지. 그의 설법이 얼핏 무공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순전히 마음을 다스리는 도가의 이론인 듯 보이나, 다년간 꾸준히 도를 접해온 자에게는 큰 깨우침이 될 만한 말들이오. 장담컨대, 저 도사가 무공을 할 줄 안다면 아마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의 고수일 게 분명하오.”
초휴의 견해에 사소루도 동조를 표했다. 오기조원에 대한 도사의 이해가 정작 이 경지에 들어선 무사보다도 수십 배나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사였다면 문파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종사급 거물이 되었으리라.
현성도인이 기지개를 켜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오행의 기 가운데 이제 막 화(火)에 대응되는 심장을 논했으니, 아직도 네 가지가 남은 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인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초휴! 네가 감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하얀 무사복 차림의 가냘픈 여인이 눈가가 온통 벌게진 채 초휴를 가리키며 지독한 원한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다름 아닌 신무문의 연정정(燕婷婷)이었다.
원래 연정정은 이번 신병대회에 올 계획이 없었다. 신무문 차원에서도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무문의 젊은 제자들 가운데 쓸 만한 실력자가 없는지라, 참가해봤자 비웃음만 살 가능성이 컸기에 아예 파견조차 안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가 멸문 이후로 연정정의 칩거 생활이 길어지는 걸 보다 못한 연회남이 기분전환도 할 겸 신병대회 구경이나 하고 오라며 보내주었다. 물론 고명딸의 우울증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잘 아는 연회남으로서는 다른 꿍꿍이속도 있었다.
신병대회는 강호 전역에서 온갖 내로라하는 젊은 준걸들이 모여들게 될 자리이다. 거기서 누구하고라도 눈이 맞으면 연회남은 출신 따위는 상관치 않고 팍팍 밀어줄 생각이었다. 그게 누구건 간에 적어도 악노천, 그 쓰레기 같은 놈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간만에 종문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제로 유람길에 나선 연정정은 실로 유쾌했다. 이제 악노천도 죽은 지 시간이 꽤 흐른 데다, 초휴가 위군 어디쯤에서 여러 세력의 연합 추살에 당했다는 소식도 들었기 때문이다.
놈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이로써 마음을 짓누르던 응어리는 풀어진 셈이었다. 해서 연정정은 제주부에서 지난 이틀간 정말 신나게 놀았다. 오늘 모처럼 날씨도 좋길래 경호에 뱃놀이 나왔다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걸 보고 구경이나 해 볼 심산으로 와본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평생의 원수놈과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초휴, 그놈이 아직 죽지 않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