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진상이 드러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조금 전 출수했던 자들은 무상마종 패거리였다. 하지만 선두에서 왕천평을 쳐죽인 천인합일 무사는 육 선생이 아니라, 무상마종 내 또 다른 천인합일 고수였다.
왕천평은 주제 파악 못하고 까불다가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격이니, 초휴가 마음에 켕길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왕천평의 실력이 보잘것없으니, 큰 신경을 안 써도 괜찮을지 몰랐다. 그러나 자칫 화근을 남겨 관중형당까지 가져가느니, 여기서 끝을 보는 것이 깔끔할 것이기에 저지른 짓이었다. 무상마종 측은 초휴에게 선심이라도 베풀 듯, 흔쾌히 이 가외의 일을 맡아주었다. 어차피 외강경 무사 하나일 뿐이니, 어려운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 무렵 강문원을 호위하는 건 기백과 천인합일 무사 한 명이었다. 그들은 추격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놓은 상태였다. 다른 문객과 초빙객들이 후방에서 층층이 막아준 덕에, 잠시나마 추격조의 모습이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긴 했다. 강문원의 곁에는 다 늙은 기백과 장검을 멘 중년 무사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새삼 자신의 참담한 처지에 강문원은 비통함을 금치 못하고 연신 탄식을 쏟아냈다.
보다 못한 장검 무사가 근엄히 입을 열었다.
“왕야,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때에 대비하려고 진작부터 북연과 서초 쪽에 적잖은 자산을 비축해 놓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으니, 까짓것 북연이나 서초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제 동제는 떠나셔야 합니다.”
이에 기백도 옆에서 거들었다.
“맞습니다. 여씨 황족이 스스로 신의를 저버렸으니, 이번에 천하 만민의 손가락질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자고로 토끼도 만일에 대비해 굴을 세 개 파놓는다고 했다. 사실 선대 안락왕들은 일찌감치 북연과 서초로 사람을 보내어, 부동산을 사들이고 대량의 자원도 은닉해두었다. 언젠가 여씨 황족과 등지는 날이 오더라도 살길을 마련해 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락왕부는 줄곧 평안한 세월을 보내왔고, 따라서 강문원은 선조들이 숨겨둔 재산을 쓸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측근들이 건넨 위로의 말에 강문원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망했어. 죄다 망했다고. 나의 기반이 동제에 있는데, 북연이나 서초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차피 재기할 기회도 없을 텐데.”
이제서야 강문원은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이 사실은 여씨 황족이 부여해준 것이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저들이 안락왕에 봉해주었기에 자신은 동제의 이성왕이 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수많은 강호의 영웅호걸들을 영입해서, 순탄하고도 안정되게 자신의 세력을 키워올 수 있었다. 그 신분을 잃은 지금, 수중에는 쥐뿔도 남은 게 없었다. 장차 무엇을 갖고 재기를 도모한단 말인가.
바로 그때, 불현듯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왕야께서 서초와 북연으로 가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그냥 동제에 머무시는 게 어떨지요?”
기백과 장검 무사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말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육 선생이 걸어 나왔다. 강문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 선생이야 이미 친숙한 인물이고, 무상마종은 안락왕부와 다년간 협력해온 우군이었으니까. 또한, 육 선생은 그간 양측의 연락을 도맡아온 이가 아닌가.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강문원이 육 선생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 무상마종들이 왜 죄다 도망친 건가? 도대체가 마도 무리는 신뢰할 수가 없다니까!”
강문원이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일 만도 한 것이, 무상마종들은 추격대를 저지하는 데 힘을 보태기는커녕, 냅다 떼 지어 도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의 없는 행동을 강문원은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다. 강문원이 참아왔던 화를 단숨에 폭발시키자 기백이 그의 옷깃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노여움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였다.
지금 안락왕부가 지리멸렬한 이상, 무상마종과도 더는 협력 관계를 지속시켜나가기 어려울 게 뻔했다. 하지만 이처럼 오갈 데 없이 쫓기는 처지가 되었으니,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판국이 아닌가. 굳이 오랜 우군에게까지 밉보일 필요는 없을 터였다. 어쩌면 지난 정리를 봐서 저들이 탈출을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해서 기백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육 선생이 불쑥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초휴, 이만 나오시게. 무상마종이 차지할 공이 아닌 듯하니, 자네에게 양보하겠네.”
그러자 초휴가 어디선가 걸어 나오더니 육 선생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며 웃는 게 아닌가.
“선배님,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초휴가 등장하자, 강문원 일행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안 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보란 듯이 이어졌다.
“안락왕부의 물건들은 선배님 측에서 죄다 옮겨두셨지요?”
“자네가 제때 알려준 덕분에 말이지. 전전사 놈들이 들이닥치기 직전, 마지막 남은 무상마종 제자들을 시켜서, 깡그리 공간 비전함 속에 쓸어 넣었지. 근년 들어 안락왕이 많이도 모아두었더군. 그 긴 세월 동안 그 짓을 벌였는데, 여씨 황족이 봐준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사실 초휴, 이 어용 마교 제자와 무상마종 간에는 짭짤한 거래가 있었다. 전전사의 출동을 앞두고 초휴가 사전에 육 선생에게 연락하여 한몫 단단히 챙기게 해준 것이었다. 강문원이 죽고 나면 어차피 안락왕부는 죄다 털릴 게 뻔하니, 값진 건 미리 챙겨두자는 심산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육 선생도 암암리에 강문원의 뒤를 밟아, 그의 위치를 초휴에게 알려준 것이다.
물론 동제 황제가 선언하길, 강문원의 수급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육 선생은 마도 중에서도 단연 극악한 집단인 무상마종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강문원의 수급을 바치러 갔다가는, 상을 타기 전에 자기 목이 위태롭게 될 터였다. 해서 차라리 초휴가 재미를 보게 밀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서서히 일의 내막이 보일 듯했다. 어느덧 강문원의 얼굴이 온통 침으로 찌른 양,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살짝 손톱으로 건드렸다가는 핏방울이 뚝 하고 떨어질세라 노기충천한 모습이었다.
강문원이 육 선생을 가리키며 대로하여 소리쳤다.
“이 개자식! 감히 나를 배신해?”
기백과 장검 무사의 표정도 강문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기합리화일진 몰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안락왕부는 무상마종과 결탁할 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초휴는 다르지 않은가. 한창 잘나가는 관중형당의 상징적인 준걸이 뭐가 아쉬워서 마도의 무리와 손을 잡는단 말인가. 자칫 이 사실이 새어나갔다가 무슨 패가망신을 당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의혹은 육 선생의 매몰찬 답변에 가로막혀 길게 지속하지 못했다.
“왕야의 말씀에는 어폐가 있군요. 우리 무상마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의 수하였던 적이 없었소이다. 그런데 배신이라니? 그래도 한때 당신과 한편에 섰던 정리를 생각해서, 오늘 이 몸이 친히 황천길을 배웅나왔으니 고맙게 여기시오. 이것만으로도 나는 큰 성의를 표한 것이니까.”
강문원이 죽일 듯이 초휴와 육 선생을 노려보았다. 이 자리에서 저 둘을 산 채로 찢어발기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또 다른 깨우침이 강문원의 뒤통수를 때렸다. 지난번 육 선생이 초휴를 죽이는 데 실패했던 것은, 이 둘이 진작에 손잡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초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태연히 말했다.
“안락왕, 원래 우리는 서로 참견할 일이 없었지요. 취룡각에 가로막혀 사건 조사가 더 진척되지 못했어도, 나는 동제 조정이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 봐서 움직이려 했습니다. 굳이 당신에게 초강수를 두려는 생각은 없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당신이 굳이 나를 죽이려고 하니, 나도 모진 마음을 먹을 수밖에요. 남 탓할 일이 아니란 겁니다. 지금 황제가 당신 목을 가져오라 한 이상, 당신이 북연으로 가든 서초로 가든 영원히 추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될 건 뻔할 터. 평생 그런 개고생을 감수하느니, 그냥 이 자리에서 화끈하게 결말을 짓는 게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 제 편의를 봐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러자 장검 무사가 강문원의 앞을 막으며 결연히 말했다.
“기백, 왕야를 모시고 먼저 가시오.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
그러자 육선생이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비추검객(悲秋劍客)’ 한동락(韓東樂)이 아니신가. 그대가 강문원의 객경 노릇을 한지도 얼추 십년이 다 되어가지? 지난날 그대가 여자 문제로 남창 하후씨와 원한을 맺었을 당시, 강문원이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고 들었네. 그러나 당시 강문원은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어. 단지 그 한 마디 때문에 자그마치 십 년을 강문원에게 충성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실력은 그대도 잘 알 텐데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겠나.”
한동락이 묵묵히 등 뒤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기이한 꽃문양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장검에는 이상하리만치 찬란한 광채가 감돌았다.
“무릇 협객(俠客)이라면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고, 밥 한 끼를 얻어먹어도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법이라 했소. 지난날 왕야께 은혜를 입었으니, 이럴 때 보답하는 게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 고작 밥 한 끼의 은혜도 그럴진대, 왕야께서 나를 남창 하후씨로부터 보호해주신 은혜야 말해 무엇할까. 당시 한마디 말씀에 불과했다고는 하나, 그 한마디가 내 목숨을 살린 유일한 구명줄이었소. 육 선생, 당신의 출수를 본 적이 있소. 무도종사를한 끗 앞둔 실력이더군. 나는 영원히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 테지. 그러나 지금 내게 검을 잡을 기운이 남아있는 한, 당신은 절대로 왕야를 건드릴 수 없소!”
한동락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자 육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 같은 초야의 낭인 무사가 허세만 가득한 대문파 제자들보다 훨씬 충성스럽고 정의롭군그래. 강문원이 무슨 연유로 갖은 대가를 치러가며 당신 같은 낭인 무사들을 영입하는가 했더니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겠소. 이대로 죽이기 아까울 만큼, 당신의 어리석은 충직함을 높이 사는 바요. 나는 웬만해서는 기회를 잘 안 주는 사람이지. 그러나 당신에게는 예외를 두어, 기회를 주고 싶소. 자, 그런 의미에서 다시 묻지. 물러날 거요, 끝까지 버틸 거요?”
그러나 한동락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거요. 곤륜마교가 무너진 지 이처럼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무상마종이 여전히 곤륜마교를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요. 해서 나도 당신들처럼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소!”
말을 맺은 한동락이 검을 들고 돌진했다.
바람처럼 빠른 검세가 휘몰아치며 더없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애석하도다! 이 어리석고 고지식한 자 같으니!”
육 선생이 탄식과 함께 일장을 내리치자, 섬찟하리만치 거대한 손의 형상으로 응집된 마기가 한동락의 검세를 산산이 파괴했다. 이른바 ‘음라마조(陰羅魔爪)’가 하늘을 찢고 땅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누가 봐도 이건 육 선생의 승산이 압도적으로 높은 싸움이었으나, 한동락은 전혀 위축됨 없이 자신의 정혈을 태워 가면서까지 육 선생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 광경을 보는 강문원은 가슴은 미어질 듯했다. 그가 초목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애초에 문객과 객경들을 영입할 때는 상대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짧게는 십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그를 모셔온 대가가 그를 보호하려다 죽는 것이라니! 강문원이 제아무리 속물일지라도 울컥하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백이 강문원을 잡아끌며 외쳤다.
“왕야, 이 틈을 놓치지 말고 빨리 가십시다!”
기백은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도의 속도를 내더니, 신분의 격차는 따질 여유도 없이 강문원을 강제로 들쳐 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 초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시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그냥 순순히 목을 내놓지 그러시오. 내가 당신 목을 가져다가 상을 타면 내년에 지전은 태워드리리다. 지하에서 팔자 편하게 안락왕 노릇을 계속하면 좋을 텐데, 어찌 생각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