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86)
386화 정마(正魔) 고수의 등판
오랜 세월로 인해 이끼가 낀듯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백의를 입은 젊고 잘생긴 공자가 쥘부채를 살랑대며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 젊은 외모와는 달리 걸음새는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불가사의한 인물의 등장에 한정일 등의 낯빛이 굳어졌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때 정정산의 표정은 나머지 네 사람과는 달리 흉하게 일그러졌다. 뜻밖의 인물이 대놓고 모욕한 게 다름 아닌 장검산장이었기 때문이다. 정남북은 그의 조부도 증조부도 아닌, 그저 정씨 일맥의 선대 조상일 뿐이다. 증조부와 같은 연배로, 일찍이 마도 무리에게 살해당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건 이백 년도 더 된 과거지사였다. 지금 정정산이 오십 여세에 불과하니, 그의 부친조차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때의 일인 셈이다. 족보에서나 우연히 보았을 이름을 정정산인들 똑똑히 기억할 리 있겠는가.
그렇게 까마득히 잊힌 이름이 뜬금없게도 난데없이 등장한 청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저 공자의 나이가 적어도 이백 살이 넘었다는 얘긴데, 대체 정체가 뭐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정정산은 뭔가에 생각이 미쳤다. 너무 놀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옥면천마! 당신은 ‘옥면천마’ 위서애가 아닌가?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다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중은 펄펄 끓는 화로의 기름 솥처럼 삽시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이백 년도 더 된 일이지만, 구천산 오대천마의 명성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은 채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위서애가 목을 몇 번 비틀자, 옥처럼 곱던 공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허, 노부를 아직도 기억해주다니, 이거 영광일세그려. 보아하니 장검산장 측에서 아직도 왕년의 원한을 못 잊고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로군.”
그 말에 한정일 등이 부쩍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대회가 마도 무리를 단단히 자극한 건 틀림없지 않은가. 위서애와 같은 마도의 최대 거물마저 오랜 잠적을 깨고 뛰쳐나올 정도니, 말이다.
정정산이 위서애를 향해 독설을 퍼부어댔다.
“우리 장검산장 사람의 죽음을 헛되이 방치만 했을 리 있을까! 옛날의 피 값을 우리가 청산하지 않고 있었던 건 네놈이 진작 죽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늙어빠진 게 이토록 명줄이 길 줄은 몰랐으니까. 딱하게도 죽여달라며 제 발로 뛰어나왔구나. 당신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치 말아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정산의 등 뒤에서 다섯 개의 검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광포한 강기가 다섯 검신에 응집되더니 삽시간에 검진을 형성하여 위서애를 덮쳐갔다. 이와 더불어 정정산이 양손에 장검 한 자루씩을 잡더니 두 종류의 검법을 동시에 시전하며 위서애를 향해 치고 나갔다. 지난날 장검산장의 선조도 참살당했을 만큼 구천산 오대천마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죽을 날이 코앞인 노인네가 뭐 그리 두렵겠는가.
사실 강호에서는 나이가 많아 유리할 것도 없었다. 늙는 것과 비례해서 실력이 강해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늙을수록 실력이 강해진다면, 다들 출수는 때려치우고 문 닫고 들어앉아 누가 누가 더 오래 사나 겨루는 진풍경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최장수를 누린 자가 강호 지존 소리를 들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이 앞에 장사는 없는 법이니, 제아무리 강호를 호령하며 활보했던 자라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도종사에게 있어 정정산과 같은 쉰 남짓의 나이는 기혈이 가장 왕성할 시기에 해당한다. 반면 위서애는 늙어도 보통 늙은 게 아니다. 조금 더 지나면 출수 자체가 불가능할 건 물론이고, 수명이 다하게 될 터였다. 이처럼 기혈이 쇠퇴할 대로 쇠퇴한 노인네를 정정산이 겁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정정산의 검진이 덮치기 직전 위서애가 가볍게 하품하는가 싶더니, 그의 입에서 지독한 마기와 함께 귀를 뚫을 기세의 음파가 터져 나와 좌중의 혼을 쏙 빼놓는 게 아닌가! 이 충격으로 검진이 완전히 격파되어버렸다.
정정산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백 살도 한참 넘은 나이로 어찌 저런 위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위서애는 한 손을 뻗더니 맹렬히 아래를 향해 누르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천지 원기가 하늘도 뒤덮을 마기로 전환되더니, 족히 백 장(丈)도 넘을 거대한 크기의 손 하나를 응집해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한데 모은 형태를 갖춘 손은 정정산을 통째로 압사시킬 기세로 덮쳐왔다.
마기가 만계(萬界)를 덮치니, 일장(一掌)으로 하늘을 가리도다!
제대로 된 장력(掌力)이 덮치기도 전에, 맛보기로 밀어닥친 천근만근의 압력에 정정산이 왈칵 피를 토하고 말았다. 수일 전 골목산장 마도회맹 때 위서애가 산귀를 혼내주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물론 미우나 고우나 산귀는 마도 사람이고, 명마와 은마는 연합할 사이였기에 그때는 이 정도로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산귀를 꾸짖는 용도로 가볍게 시전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 정정산에게는 일말의 인정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을 덮쳐오는 가공할 마장(魔掌)을 올려다보며 정정산이 공포에 질려 부르짖었다.
“진화련신이다! 당신이 진화련신을 뚫었단 말인가!”
무도종사의 경지에 오르는 건 절대 쉽지 않다. 하물며 진화련신을 뚫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난날 한창 실력에 물이 올랐던 시절에도 위서애는 진화련신에 이르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어떤 수를 썼길래 저토록 형편없어진 노구(老軀)로 이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저 마장에 정통으로 가격당하는 날엔 요행히 목숨을 건지더라도 중상을 피하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 있던 한정일 등이 적시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간의 은원 관계와는 별개로, 지금은 한배를 탄 아군의 입장이었으니까.
한정일이 수중의 장검을 뽑아 들자, 평범하고 질박해 보이는 홍목으로 된 검집에서 눈을 찌를세라 광채를 발산하며 검 한 자루가 위용을 드러내었으니, 바로 공명검(空明劍)이었다! 그가 공명검을 뽑아 든 순간, 천지에 어려있던 힘이 응집되며 검세를 형성해 위서애의 마장에 맞섰다. 이때 그가 내리친 건 단순히 일검이 아니라, 천지의 한쪽이나 다름없었다.
가세한 연지도 손가락을 내밀더니 자신의 양미간을 찍었다. 그러자 금색 부러진 검 표식에서 광망이 터져 나오더니, 무형의 검이 실체를 갖춘 검으로 바뀌며 연지의 체내로부터 붕 떠올랐다. 뒤이어 그가 허공을 향해 검지(劍指)를 내지르자, 그 반쪽짜리 검 역시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마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자 검 주위로 섬찟할 정도로 강력한 검기가 동반되며 수십 장 길이나 이어지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윽고 거대한 충돌음이 지축을 뒤흔드는 가운데, 한정일을 비롯한 세 사람은 뒤로 한 발짝씩 밀려났다. 세 명이 힘을 합쳐서야 간신히 상대의 일장을 막아낸 셈이니, 위서애의 공격이 얼마나 매섭고 위력적이었는지 알만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위서애가 차갑게 내뱉었다.
“젊은것들이 참으로 형편없구나. 노인네가 한 대 갈기는 것도 제대로 못 받아내느냐!”
대부분 강호인한테야 한정일 등은 감히 우러러보는 것도 송구할 강호의 대선배들이겠지만, 위서애와 같은 살아있는 화석이 보기에 그들은 까마득한 후배일 뿐이었다. 그가 강호를 한창 주름잡던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애송이들이 적수로 보일 리는 만무할 터. 그때 어디선가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서애, 저들이 적수가 못 된다면 나는 어떻겠나? 당신이 구천산 오대천마 중 적혈천마(赤血天魔)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면서? 구천산 궤멸 작전에 들어갔을 때 나는 당신을 죽이러 갔었다. 그런데 적혈천마가 기를 쓰며 나를 막으려 들더군. 아홉 개의 혈고(血蠱) 분신을 나한테 잃고도 버티더니, 결국 나의 일검에 심맥이 으스러졌지. 당신이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그렇게 나와 싸웠던 거였지. 동료의 희생을 틈타 지금까지 연명해온 주제에 감히 오대 검파 앞에서 잘난 척 설쳐대느냐! 적혈천마가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준 명줄을 귀히 여길 줄도 모르고 죽을 자리를 찾아온 거냐? 이제 살기 지겨워진 게야?”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금색 망포(蟒袍, 황금색 바탕에 이무기가 수놓아져 있는 조정 대신들의 예복)차림의 노강호가 누각에서 걸어 내려왔다. 허리에 걸려있는 장검은 화염처럼 시뻘건 색이었다. 얼핏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발걸음이 실로 놀라웠다. 알고 보니 그의 두 발은 완전히 허공에 뜬 채였고, 발밑에는 그 어떤 계단도 없지 않은가.
허공에 걸린 계단이라는 뜻의 ‘현천제(懸天梯)’는 사실 천인합일의 경지에만 이르러도 시전할 수 있는 공법이다. 잠시나마 진기로 몸을 지탱하면 이처럼 현묘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연출해내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단순히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는 전혀 진기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번번이 천지의 힘이 그의 발밑으로 유입되어 허공에 뜬 발을 받쳐주었다. 실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다만 말본새나 내용을 들어보니 위서애와 동일 시대를 살아온 노강호가 틀림없었다. 구천산 오대천마와의 일전에도 참전하여 천마 한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니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젊은 연배의 무사들이야 당연히 용호방 준걸들에게 관심이 가장 많이 쏠려있고. 풍운방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백 년도 아닌 이백 년 전,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은 금시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하후진과 같은 무도종사들은 강호의 웬만한 대소사를 제집 안방처럼 꿰뚫고 있는 터라, 그가 등장하자 정체를 알아채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검남왕(劍南王)’ 독고이(獨孤離)가 아닌가!”
독고이의 별호는 검남왕이다. 하지만 여기서 ‘왕’이란 검존(劍尊), 검성(劍聖) 등과 같은 맥락의 존칭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왕야의 신분을 가졌다. 이백 년 전 하늘 아래에는 북연, 서초, 동제 외에도 위군(魏郡)의 전신인 위나라와 같은 여러 군소국가가 있었다. 독고이가 바로 당시의 소국인 양나라의 왕야로, 양나라 황제의 친형이었다. 서열상으로는 그가 태자였지만 워낙 검도에 심취한 터라, 아우에게 황좌를 양보하고 본인은 그저 검도수련에만 매진했다. 강호 전역을 주유하며 검도 고수들의 가르침을 청하러 다녔음은 물론이다.
훗날 검왕성 제자가 된 그는 폐관을 이어가며 본격적으로 검을 익혔고, 이후 전검당(戰劍堂) 상좌를 거쳐 검왕성 장로 자리에 올랐다. 세월이 흘러 양나라가 북연에 멸망하자, 살아남은 유일한 황족이 된 독고이는 복수하겠다며 북연 황실로 쳐들어갔다. 혼자 힘으로 북연의 진국오군 중 북상군(北殤軍)을 도륙 내는 와중에 상장군도 여럿 참살했다. 그러나 결국 북연 황실 고수에게 중상을 입고 도주하면서 복수극의 막이 내려졌다.
이백 년 전 독고이는 실로 큰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몇몇은 그더러 미쳤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조국이 북연에 망했다고 해도 그리 행동할 엄두를 어찌 내겠는가. 검왕성 전체가 달려들어도 꿈도 못 꿀 일이건만, 감히 혈혈단신 검 한 자루 달랑 들고 북연 황실로 쳐들어갔으니, 이게 보통 담력으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쨌거나 북연에 타격을 입힌 건 사실이니, 결과적으로 복수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 패기와 의기만은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