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절묘한 때
여봉선 일행은 손장초가 자신들을 배신한 게 아니라, 유청봉이 사실 악랄하고 음흉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공 하나를 배우겠다고 그 오랜 세월 선량한 척 연기를 하다니,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게 용하지 않은가.
어쨌건 그들이 이리된 건 사람을 쉽게 믿는 여봉선 탓이 컸다. 그리고 그를 호위하겠다고 나선 청년들도 아직 어려서 강호 물정에 어두웠다. 만약 초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유청봉이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음흉한 연기를 하는 걸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여봉선이 방천화극을 쳐들자 그의 수하들도 무기를 빼 들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유청봉은 그 광경에 혀를 끌끌 찼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들이군!”
유청봉이 손을 ‘척’ 하고 쳐들자 청봉산장의 무인들이 대청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온갖 병기를 손에 들고 살기가 흉흉한 꼴들을 보니 한참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게 분명했다.
“나를 따르라!”
방천화극을 든 여봉선이 우렁차게 외치며 유청봉을 향해 덤벼들었다. 여봉선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유청봉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오기조원의 고수가 천인합일의 고수를 죽일 정도라면 여봉선의 실력은 분명 무시무시하지 않겠는가. 유청봉은 이렇게 대단한 실력의 젊은이를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맹원룡이라는 고수를 죽인 대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를 해치우느라 큰 부상을 당했으니 이렇게 청봉산장까지 기어들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상태의 여봉선이라면 상대하기가 버겁겠지만, 중상을 입은 여봉선이야 왜 못 이기겠는가.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여봉선을 응시하는 유청봉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여봉선의 화극이 곡선을 반쯤 그렸을 때, 눈을 찌를 듯 붉은 광선이 피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이 허공을 울리며 번쩍하고 피로 물든 달을 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청봉은 방천화극에 검째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에 대청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제대로 출수하기도 전에 장주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청봉산장의 무인들은 경악했다. 저토록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장주를 단숨에 두 동강 내버리다니! 청봉은 이런 상황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포상을 받겠다는 꿈에만 부풀었지 순식간에 귀신이 되어 황천길로 떠날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여봉선의 화극이 얼마나 빨랐는지 유청봉은 후회라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저승으로 가버렸다.
여봉선의 명성은 초휴, 섭동류보다는 못했지만, 용호방 십위 권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충분한 실력자다. 어쩌면 이번 전투가 끝난 뒤에 용호방 십위 권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지도 모를 터였다.
여봉선은 전과 다름없는 안색으로 방천화극을 거두며 말했다.
“가자.”
여봉선이 성큼 한 발을 내디디자 청봉산장의 무인들은 물이 빠져나가듯 우르르 흩어졌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이 곱상한 미모의 청년이 흉악하고 무시무시한 마신으로 보였다.
일행은 청봉산장을 나왔다. 청봉산장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흥분한 그들이 입을 열려는 찰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봉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처럼 창백하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홍조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여봉선이 왈칵 입으로 피를 쏟자 그의 얼굴은 종전의 창백한 빛깔로 돌아왔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창백하고 파리한 낯빛이었다.
“형님!”
“봉선 형님!”
모두 놀라자 여봉선은 손짓으로 그들을 만류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취의장 사람들이 쫓아오는 중이니 지체하다가는 잡히고 말 거다. 어서 가자!”
손장초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
“형님! 이게 다 저 때문입니다. 저만 아니었다면 상처가 이렇게 악화하지는 않았을 텐데······.”
여봉선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 할 거 없다. 네가 나를 위하려다가 생긴 일이 아니냐.”
그때 왕쌍동이 옆에서 손장초를 밀치며 쏘아붙였다.
“네가 결백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아무도 네 탓을 하지는 않으니 괴로워하지 말고 비켜.”
그는 단약 몇 알을 꺼내 여봉선에게 주며 말했다.
“형님, 이건 우리 사부님이 만드신 비전 단약입니다. 어서 드세요. 얼마간은 상처가 진정될 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가 비아냥거렸다.
“왕쌍동, 네 사부가 만든 단약을 먹어도 괜찮은 거냐?”
왕쌍동은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다.
“우리 사부님이 독약사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독약 제조 솜씨가 뛰어날 뿐이지 약사는 약사야. 당연히 치료 약도 만드실 줄 안단 말이다. 계속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리면 너희들이 먹을 음식에 춘약을 타 버릴 줄 알아!”
그러자 모두가 한바탕 큰소리로 웃었다. 물론 그들은 왕쌍동이 여봉선에게 절대 독약을 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왕쌍동이 딴마음을 먹었다면 독주를 마시기 직전에 위험을 알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손장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숙에게 배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는 좋은 형제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그때 조롱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정말 우애가 두터운 형제들이군. 여봉선, 맹 총관을 죽인 것도 모자라 유청봉까지 죽일 줄은 몰랐구나? 용호방 십위 권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단한 실력이 아닌가. 하지만 아쉽게도 그게 실제로 이루어질 일은 없을 거다. 네놈이 취의장 사람을 죽인 이상, 살아서 북연을 빠져나가게 두진 않을 테니까.”
이윽고 수십 명의 무인이 빛의 속도로 몰려나와 여봉선 일행을 단단히 포위했다. 가운데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참수도(斬首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취의장의 천인합일 고수 ‘혈귀도(血鬼刀)’ 한방(韓放)이었다!
‘혈귀도’ 한방의 실력은 맹원룡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맹원룡은 취의장의 객경 총관인 데다가 섭인룡의 의형제인지라 실력이나 지위, 어느 면으로 봐도 한방보다는 한 수 위였다. 맹원룡을 죽인 여봉선이니 한방은 한주먹감이어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금의 몸으로 천인합일인 한방을 상대하는 것은 부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맹원룡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할 터였다.
한방의 핏빛 참수도가 어둠 속에서 사악한 적색 광망을 내뿜었다. 한방은 입가에 사악하고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한방 입장에서는 여봉선의 덕을 봤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맹원룡이 취의장에 있을 때는 그의 견제로 인해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주인 섭원룡과는 의형제 사이고 실력도 월등한 맹원룡이 살아있는 한, 객경 총관은 꿈도 못 꿀 처지였다. 그런데 뜻밖으로 여봉선이 맹원룡을 제거해 줘서 기회가 생겼으니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지금은 반드시 여봉선을 죽여야 한다. 여봉선을 죽여야 그 공로로 신임 객경 총관의 자리를 꿰차지 않겠는가. 한방은 지체하지 않고 참수도를 휘두르며 출수했다. 괴기스러운 참수도에서 붉은 살기가 일며 폭발적인 기운이 세차게 몰아쳤다.
“놈의 목표는 나다. 이 자는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어서 떠나라!”
여봉선은 부하들에게 외치며 방천화극을 휘둘러 피에 젖은 달빛처럼 반짝이는 적색 강기를 내뿜었다. 여봉선은 섭동류의 저의를 모두 꿰뚫지는 못했으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보낸 자들이 노리는 것도 벗들이 아니라 자신일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고생시킨 것도 면목이 없는데 여기서 자신과 함께 유명을 달리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떠나라고? 누구 맘대로! 난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한방이 여봉선을 조롱하며 외치는 순간, 참수도와 방천화극이 맞부딪치며 강기가 격렬하게 폭발했다. 참수도를 타고 거센 힘이 강렬하게 밀려들자 한방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경악했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로군! 이러니 맹원룡이 맥을 못 추고 두 동강이 났지.
한방이 경악하는 반면 여봉선은 놀랍도록 창백한 얼굴로 왈칵 붉은 선혈을 토했다. 여봉선도 이제는 끝인 듯했다. 천인합일의 고수인 한방은 고사하고 별 볼 일 없는 오기조원 무인을 이길 기력조차도 이제 그에겐 남지 않은 것이다. 한방은 기력이 다한 여봉선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공을 세우는 건, 식은 죽 먹기로군!’
그러자 왕쌍동 등의 일행이 황급히 몰려와 여봉선의 주위를 감싸며 외쳤다.
“봉선 형님!”
여봉선이 가라고 했지만 정말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 여봉선은 연서 지역에서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이번에 북연으로 돌아와서도 적지 않은 친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봉선이 취의장에게 쫓기기 시작하자 의리를 저버리고 곁을 떠난 자들이 수두룩했다. 지금 곁에 남은 이들은 여봉선과 함께 죽기를 각오한 진정한 벗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끝까지 의리를 지키겠다고 남은 이들인데 여봉선이 가란다고 떠날 리가 없었다.
여봉선을 보호하려고 몰려든 청년들을 보며 한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의리로군. 좋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한꺼번에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주마.”
한방이 냉소를 머금으며 손짓하자 취의장의 모든 무인이 일제히 여봉선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한방도 여봉선을 죽이려고 다시 참수도를 쳐들어 도강(刀罡)을 강렬하게 뿜어냈다. 십여 장의 길이는 될 듯한 붉은색 도강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광경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여봉선이 최후의 힘을 쥐어짜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자 왕쌍동 일행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마기가 섞인 강렬한 도망(刀芒)이 번쩍하고 내리쳤다. 귀곡성을 동반한 채 하늘로 위엄 있게 치솟는 마기에서는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마기의 소용돌이가 핏빛 도망을 순식간에 파괴하자 한방도 공중으로 튕겨 나가며 피를 토했다.
여봉선의 얼굴에 화색이 떠오르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네, 여 형. 내가 좀 늦었군그래.”
새까만 옷을 입은 초휴가 밤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손에 쥔 천마무가 흉악한 마기를 잔뜩 뿜고 있었으나, 왕쌍동 일행은 공포가 아니라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여봉선은 당연히 초휴가 자신을 도우러 올 거라고 믿고 있었던지라 놀라움 대신 미소로 초휴를 맞이했다.
“그렇게 많이 늦지는 않은 것 같네. 아주 절묘한 시점에 왔으니까.”
초휴를 바라보는 왕쌍동 일행의 눈에는 경이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초휴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간 여봉선에게 초휴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였다. 북연에서 쫓기다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낭인 무사로 착실히 실력을 쌓으며, 마침내 용호방의 육 위에 오르고 관중형당의 관서지부 장형관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
이들에게 초휴는 전설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그의 명성을 말로만 들었기에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들이 아는 건 오직 여봉선의 실력뿐이었다. 물론 여봉선의 의리와 인품에 반해 죽음도 각오하고 이 자리까지 함께 왔지만, 인품뿐만 아니라 여봉선의 실력에도 감탄했고, 용호방의 십 위권에 들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초휴의 등장은 경이로웠다.
오기조원의 무인이 단칼에 한방에게 중상을 입혀 피를 토하게 만들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휴가 천인합일이고 한방이 오기조원이라고 오해할 판이었다. 여봉선이 맹원룡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초휴처럼 가볍게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여봉선 본인도 맹원룡을 죽이다가 심한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이들에게 맹원룡과 한방의 차이를 분별할 눈썰미는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방이나 맹원룡이나 모두 강력한 천인합일 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