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08)
408화 여봉선의 운발
두 사람을 말을 듣고 난 항충은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는가 싶었지만, 이내 해맑은 미소를 되찾았다.
“개의치들 마시오. 두 분이 그리 말씀할 줄 진작 알았으니까. 황위라는 게 가지면 행운이지만, 얻지 못한들 어쩌겠소. 다 내 운명인 게지. 뭐든지 무작정 바란다고 해서 얻어지는 건 없소. 사실 처음부터 나는 황위 찬탈의 꿈 같은 건 꿔본 적도 없었소. 다만 부황께서 나를 연왕에 봉하신 후부터 항려 그자가 부쩍 시기하며 나를 괴롭히니, 욱하는 마음에 약이나 올려 보자고 보란 듯이 황좌를 탐하는 척해 보이는 것뿐이니까.”
여기까지 말을 마친 항충의 입가에 돌연 자조적인 미소가 번져갔다.
“정말로 내게 황제가 될 기상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르겠소. 근래 들어 얻은 부황의 총애 말고는 수중에 가진 게 고작 이것밖에 안 되니, 누군들 나 같이 빈털터리 황자 밑으로 들어오고 싶을까. 부황께서 나를 아끼신다고는 하나, 그분은 누구보다도 냉철한 분이시오. 그러니 절대로 총애만을 내세워 나한테 힘을 실어준다거나 하진 않으실 거요.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든 황자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신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초휴는 항충의 말을 넋두리 정도로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입에서 ‘연왕’이라는 두 글자가 튀어나온 순간, 전율을 느낀 그는 다짜고짜 확인하듯 물었다.
“전하의 봉호가 혹시 연왕이십니까?”
“그렇소만. 아, 모르셨소?”
항충이 의아하여 되묻자, 초휴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제가 북연을 떠나있은 지가 오래인지라, 일부러 관심 두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것도 더러 있습니다. 한데 전하의 봉호는 정말 처음 듣는군요. 어쨌든 연왕 전하, 지레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건 늘 기복이 따르기 마련인 거죠. 시야를 멀리 두시지요. 훗날 전하는 크게 성장하실 겁니다.”
이에 항충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덕담을 감사히 받으리다. 나도 그리되길 바라겠소.”
초휴가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방금 했던 말은 사실에 근거한 말이었다. 맨 처음 항충이 십삼황자라고 들었을 때는 가뜩이나 많은 황자 중 한 명이구나 가볍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신을 연왕이라고 칭하자 초휴는 정신이 번쩍 났다. 게임 원본 줄거리에서도 다채롭게 다뤄져 있는 북연 황위 쟁탈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쟁탈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될 주인공이 바로 이 연왕이었다.
물론 현재의 처지로만 보자면 항충의 꼴이 처량한 게 사실이다. 지금껏 주위에 믿을 만한 수하 하나 두지 못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초휴와 여봉선과 같은 젊은 준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천요와 같은 무도종사에게도 끊임없이 지지를 청해보았건만, 아직 누구에게도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충성을 바쳐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지만 해달라는 부탁이었음에도 말이다. 하긴 지금 이처럼 비루한 처지로는 무도종사급에게 충성이건 지지건 간에 바랄 자격도 없겠지만······.
양측은 주거니 받거니 몇 마디 더 나눈 후 서로 작별을 고했다. 초휴는 은마권에 관한 일로 성천요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항충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있는지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훗날 재회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듯했다.
성천요 일행과 헤어지고 난 후, 초휴는 그길로 여봉선을 관중형당으로 데려갔다. 북연에 계속 머물렀다가는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여봉선은 맹원룡을 죽였고 초휴는 한방을 죽였으니, 두 사람은 취의장과 철천지원수를 맺은 셈이었다. 이번에야 성천요가 나서준 덕분에 섭인룡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금기 따위는 개의치 않는 섭인룡이 언제 또 공격해올지 모를 일이 아닌가. 반드시 초휴와 여봉선을 끝장내버리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을 터였다.
이번 부상으로 몸의 근간마저 손상된 여봉선은 관중형당에서 족히 한 달을 요양하고서야 얼추 회복될 수 있었다. 맹원룡을 죽일 때, 여봉선 본인도 중상을 입은 터라 이미 요양을 해야 할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유청봉까지 상대하느라 출수를 강행했으니 상세가 가중된 것이다. 초휴가 풍족히 단약을 제공해가며 요양을 도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몸 상태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훗날 언젠가 이 시기에 자기가 얼마나 신묘한 영단을 얻어먹었는지 알게 된다면, 또는 그 영단으로 연체공법 수련에도 진전이 있어 육신이 크게 강해진다면, 오늘의 이 부상이 전화위복이었음도 깨닫게 될 터였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여봉선은 초휴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초 형, 정말 고마워.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내 원혼이 영영 북연에 묶여 있을 뻔했네.”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사실 이번 일은 나 때문에 생긴 측면도 있어.”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초휴가 부옥산 정마대전 당시, 자신과 섭동류 사이에 벌어졌던 껄끄러운 일들에 대해 들려준 후 덧붙여 말했다.
“자네가 서초에서 북연으로 돌아간 지가 이미 한참 되었는데도 섭동류는 내내 자네를 가만 내버려 뒀어. 그런데 하필 정마대전이 끝나자마자 자네에게 누명을 씌웠고 추살대를 보내기까지 했으니, 이 일의 내막이야 뻔하지. 달리 꿍꿍이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리가 없지 않은가. 자네가 나의 둘도 없는 벗인 데다, 뛰어난 자질과 실력을 갖췄으니 위기감을 느낀 거야. 내 조력자를 하나라도 없애려는 수작이었던 거지.”
설명을 들은 여봉선은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간교한 자에게 자신이 너무 무방비 상태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추살에 쫓기는 내내, 영문도 모르고 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별안간 유가 멸문의 흉수로 지목되어 취의장의 추살 표적이 되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그는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예전에 북연에 있을 때, 그래도 섭동류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어. 종국에는 저들에게 쫓겨 정신없이 북연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그때야 이익이 걸린 문제였으니 그러려니 했었지. 섭동류가 이처럼 교활하고 옹졸한 인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초 형을 노리는 와중에 나한테도 마수를 뻗치다니, 의기를 내세우는 취의장 소장주라는 신분에 걸맞은 행동은 절대 아니지. 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군그래.”
“섭동류, 그 인간을 보노라면 명성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알 것 같아.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습관이 된 자야. 모진 강호행을 오래 해온 여 형도 그런 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로군.”
“여러 가지 이유로 남이 나를 죽일 수도 있고, 나도 남을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명분 없이 해치려 드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그나저나 초 형, 관중형당에 혹시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나?”
느닷없는 여봉선의 질문에 초휴가 의아하여 되물었다.
“그건 왜 묻지? 혹시 관중형당에 들어오려고 그러나? 자네한테 그럴 마음이 있다면야 당주께서도 흔쾌히 반기시겠지. 용호방 십 위권 실력자를 누가 마다하겠나. 조직 내에 용호방 십 위권 준걸을 둘씩이나 보유할 판이니, 당주께서도 당연히 크게 환영하실 걸세.”
맹원룡을 죽인 걸 계기로 여봉선은 지금 용호방 구 위에 올라있었다. 더는 예전의 무명지배가 아닌, 어디 내놔도 큰소리칠만한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런 인물을 관사우가 쌍수 들고 환영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초휴의 기대와는 달리, 여봉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니라, 나와 동행한 친구들 말이네. 저들 모두 북연에 소속은 없어도 실력은 알아줄 만하거든. 내 생각으로는 관중형당에 들어갈 자격은 되지 않을까 싶어. 저들이 이번에 나 때문에 취의장의 눈 밖에 나게 되었네. 아무래도 당분간 북연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거야. 이게 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내가 저들의 살길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내 인맥이 워낙 신통치 않으니 초 형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라네.”
그런 문제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지라 초휴는 흔쾌히 승낙했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미안해하나. 내 즉시 추진하겠네.”
여봉선이 언급한 친구들의 실력은 내강경에서 삼화취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서 약하다고도, 또는 강하다고도 볼 수 있는 실력이었다. 어쨌든 하나같이 쓸 만한 인재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여봉선의 눈에 들어 막역지우가 된 그들이 어찌 허접한 둔재들이겠는가. 물론 여봉선이나 초휴 등에 비하면야 평범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일반적인 강호 무사들 틈에서는 절대로 기죽지 않을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설령 평범한 인물들이어도, 그간 여봉선을 버리지 않고 내내 그를 지켜왔던 의로운 인성과 패기를 봐도 관중형당에서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처럼 한번 검증된 자들은 절대 조직을 배신할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자 나름의 재주도 있었다. 예컨대 왕쌍동(王雙冬)만 해도 북연의 그 유명한 독의 대가, ‘독약사(毒藥師)’ 두불구(杜不救)가 친히 키워낸 제자가 아닌가. 분명 단약 제련과 독을 다루는 수완에 있어 만만찮은 실력을 갖췄을 터였다.
이윽고 여봉선이 왕쌍동 무리를 불러 모으더니 초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이번에 내 문제에 여러분들이 연루되어 취의장의 원한을 사게 되었으니, 당분간 북연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성싶네. 해서 내가 특별히 초 형에게 여러분을 천거했으니, 혹시 관중형당에 들어갈 생각이 있다면 초 형이 흔쾌히 거둬줄 걸세. 물론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다면야 내가 달리 길을 모색해 봐야겠지.”
그러자 왕쌍동 등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봉선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들이 흔쾌히 결정을 내린 건 초휴를 믿어서가 아니라, 여봉선을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여봉선이 자기들을 저버리거나 위험에 빠뜨릴 결정을 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지난번 초휴가 보여준 실력과 위세도 이미 똑똑히 본 터라 빠르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조직에서는 위풍당당한 관서의 장형관이요, 개인적으로는 용호방 육 위의 준걸인 초휴를 따른다면 적어도 대책 없이 낭패 볼 일은 없지 않겠는가.
“초 대인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이들이 일제히 공수의 예를 올리자 초휴가 이내 그 예를 거두게 했다.
“격식은 그만 차립시다. 여 형의 벗들이라면 이 초휴에게도 형제나 다름없소. 내가 여러분에게 대단한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억울하게 당하는 일은 없게 해주리다.”
뒤이어 귀수왕을 불러들인 초휴는 왕쌍동 일행을 데려가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여봉선이 안도한 듯 말했다.
“초 형, 모든 게 원만히 처리되었으니 나도 이만 서초로 떠날까 하네.”
“아직 몸이 온전치도 않은데 서초행이 웬 말인가? 몸의 근간마저 손상을 입은 터라 끝까지 제대로 요양해야 할 텐데. 그래야 나중에 상위 경지를 뚫어서라도 손상을 만회하지.”
초휴가 펄쩍 뛰자 여봉선이 담담히 말했다.
“자네 말처럼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고 서초로 가려는 걸세. 일전에 서초에서 강호의 신의(神醫)로 통하는 ‘기사염라(氣死閻羅)’ 풍불평(風不平)과 안면을 텄었다네. 당시 내가 소소하게 도움을 주었는데, 참 괜찮은 사람이더군. 내가 부탁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치료해주겠다고 맹세를 했었네. 내가 기저부까지 심하게 다친 상태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풍 신의에게는 방법이 있으리라 믿네. 어쨌거나 시도는 해봐야지.”
여봉선의 설명에 초휴는 순간 턱하고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봉선의 최대 강점은 그의 잠재력도 아니고, 그의 잘난 외모도 아니었다. 그의 최대 강점은 바로 시종일관 기가 막힌 그 운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