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42)
442화 납치극을 벌이다
사람을 협박하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익숙한 일이었다. 평생 온갖 풍파를 겪어온 늙은 강호인들이 어떤 유형의 협박인들 안 해봤겠는가. 하지만 지금 초휴의 수법은 참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협박이 아닌 듯하지만, 결국에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오묘한 말장난에 유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이는 예물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극도로 분노한 때문이었다.
지금 초휴가 하는 짓이 칼을 사람의 목에 갖다 댄 날강도와 뭐가 다를까.
‘예물을 하사하는 거라고? 사약을 내린 게 아니고?’
하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그에겐 고를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 가득 놓인 예물들을 바라보는 유길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평소 같았으면 신나서 춤이라도 췄겠지만, 지금은 저 물건들에 손을 대는 즉시 심한 화상을 입게 될 것만 같았다. 목숨도 앗아갈 치명적인 화상 말이다.
유길은 이미 태자와 한 편이 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등을 돌려야 한다니······.
물론 태자와 등지지 않는다면 앞에 놓인 예물이 목숨값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는 무수한 살육을 자행하며 수십년 세월을 버텨온 백전노장이다. 맹수는 맹수를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은지라 그는 초휴의 눈빛에서 희미하면서도 짙은 살의를 느꼈다. 이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감지할 수 있는 살의였다.
이런 눈빛을 가진 자가 사람 목숨을 뺏는 건 일도 아닐 터. 요란하게 살기를 뿜어내며 대놓고 칼끝을 들이대는 자보다 이런 인물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다. 상대의 요구를 거절하면 유가에 피바람이 몰아칠 거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초휴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결국 예물을 집어 들었다.
이때 태자 측 사람이 남서지대에 있다면야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자는 한 달 후에나 올 예정이었다. 지금 이황자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그때쯤 태자의 수하는 유가의 싸늘한 시신들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초휴가 만족한 듯 모호하던 눈빛을 거두며 웃었다.
“상황을 잘 파악하는 이가 ‘준걸’ 소리도 듣는 게지요. 과연 유 가주께선 천하의 준걸이십니다. 이제 한 달 후 회합에서 누구 편에 서야 할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얼굴이 만감(萬感)으로 뒤덮인 유길을 남겨둔 채 초휴 일행은 곧장 그곳을 떠났다. 유가에서 벗어나자 이 공공이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초 대인, 유가가 물건을 챙긴 것만으로 확실히 우리 편이 되었다고 단정해도 되겠소? 만에 하나 지금 결정을 후회하고 태도를 바꾸면 어쩌지?”
“후회하고 태도를 바꿔요? 절대로 못 할 겁니다. 우리 물건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태자를 배반한 행위니까요. 설사 태자에게 달려가 이 일을 해명한다 해도, 한 번 드리워진 배신자의 잔영은 태자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힘들 테니까요. 설령 태자가 그를 믿어주겠노라고 말한들, 유길이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초휴의 말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졌지만, 이 공공과 방진기는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챘다. 확실히 일리 있는 분석이었다. 지금 유길이 예물을 챙기고도 배신한다면 그건 태자와 이황자 모두에게 배신자로 찍히는 짓이다. 태자 하나도 모자라서 이황자까지 기만했다가는 완전히 외통수가 될 테니까. 그 둘 다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분노를 터뜨리는 날엔 어디서도 구명줄은 기대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공공은 초휴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런 줄은 알았지만 새삼 그의 악랄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한 번 표적을 정하면 일절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가는 독보적인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하루에만 벌써 한 세력을 해결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일이 진행된다면, 그들에게 있어 한 달도 안 남은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지금쯤 유길이 세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입에 담지도 못할 쌍욕을 퍼부어댈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결과만 좋다면야 감수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초휴가 동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다음 세력은 십일파를 대표하는 점창산의 점창검종(點蒼劍宗)입니다. 하지만 거기 가기 전에 두 분께 납치극 한 편만 연출해주십사 부탁드려야겠군요.”
이 공공이 긴장하여 물었다.
“누굴 납치할 거요?”
“점창검종의 종주인 ‘추풍신검(追風神劍)’ 한천정(韓千霆)의 세 아들입니다. 철검문 측 정보에 의하면 그 세 아들놈이 얌전히 점창산 내에서 수련할 생각은 않고 매월 하루씩 날을 잡아서 나가 놀다 온다고 합디다. 그때를 노려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면 간단할 겁니다. 많은 인원도 필요 없고 두 분만 출수해주시면 순조롭게 진행될 듯합니다.”
초휴가 부여한 이번 임무에 이 공공과 방진기, 둘 다 반감을 느꼈다. 아무리 사안이 중대해도 그렇지, 점잖은 체면에 격 떨어지게 납치 같은 짓거리를 하라니······. 하지만 지금은 태자의 세력 확장을 어떻게든 막고 봐야 하는 상황이니, 체면 따위는 잠시 내려놓고 초휴의 요구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로부터 닷새 후.
점창산에 자리 잡은 점창검종의 종주, 한천정이 뒷산 절벽에 올라 잔뜩 수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변치 못한 세 아들 녀석들이었지만 그래도 똥인지 된장인지 가릴 정도의 분별력은 있는 아들들이었다. 그간 산을 내려가서 놀다 오는 일이 많았어도 어김없이 당일에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어찌 된 일인지 이틀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 아닌가.
“과연 점창산은 남서의 명산이로군요. 그러나 한 종주님의 지금 심정으로는 산수의 절경을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으실 테니 애석하군요.”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한천정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웬 젊은 무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일갈했다.
“웬 놈이길래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점창산은 수비는 수월하나 공격은 어려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외부로 연결된 오솔길 말고는 사방이 가파른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덕분이었다. 특히 이곳 뒷산은 점창검종의 제자만 들어올 자격이 주어지는 금역(禁域)이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낯선 침입자는 어떻게 그 많은 제자의 감시와 검문을 뚫고 이곳까지 유유히 들어왔단 말인가.
초휴가 한발 한발 그에게 다가갔다. 무도종사도 없고 이렇다 할 진법도 없이 지세에만 의존하는 점창검종의 방어선은 현재 초휴의 정신력 무공만으로도 어려움 없이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 초휴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다음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한 종주, 가급적 조용히 얘기합시다. 공연히 애먼 사람들 불러들이지 마시고요. 설마 세 아드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말과 함께 초휴가 옥패 세 개를 내밀었다. 표면에 감도는 핏빛이 꽤 화려하게 느껴졌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천정이 아들들에게 선물한 옥패였다. 기혈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일일이 깎아서 만든 물건들인지라 자신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한천정은 애써 흥분을 누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내 아들들을 어찌 한 거냐?”
“아직 뭘 어찌하진 않았습니다. 귀한 손님으로 모셔둔 것뿐인지요. 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그들이 어찌 될지는 저도 장담 못 하겠군요. 그들의 운명은 모두 다 한 종주의 태도에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닥쳐라.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 게 강호의 법도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고요?”
초휴가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머리카락 한 터럭만 잡아당겨도 머리 전체가 따라 움직이는 법이지요. 귀하가 무언가를 결정 내릴 때, 귀하의 가족도 당연히 그 결정에 연루되는 겁니다. 그러니 매사는 신중히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소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저 이황자의 사람이라고만 해두지요.”
순간 일의 전말을 깨닫게 된 한천정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 당당하신 이황자께서 이처럼 비열한 짓을 지시하셨다니. 정말 믿기 어렵군.”
초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를 욕한 게 아니라 이황자를 욕한 거니까 상관없었다. 그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본론에 들어갔다.
“먼저 좀 냉정해집시다.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건만 왜 이리 격노하십니까. 세 아드님의 자질이 하나같이 시원찮다고 들었소이다. 그런 아드님한테 귀하가 살아생전에 순탄히 종문을 넘길 수 있을까요? 미지수겠지요. 종문은 세가와 달라서, 점창검종이 귀하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종문의 이익 때문에 아드님들을 나 몰라라 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에 한천정이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듯 물었다.
“이황자님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요!”
“아, 그거라면 답이 간단합니다. 한 달 후 열릴 회합에서 점창검종이 이황자님 편에 서겠다는 뜻만 밝혀주시면 족하니까요. 세 아드님은 지금 멀쩡히들 잘 있으니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심지어 고수들한테서 무도에 대한 가르침까지 받는 중이니까요. 일만 잘 성사되면 아드님들을 무사히 보내드리지요. 그리고 훗날 귀하가 필요할 때, 이황자께서 귀하의 세 아드님 중 한 명이 순조롭게 종문을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실 겁니다.”
순간 한천정의 낯빛에 맑음과 흐림이 뒤섞였다. 처음과는 달리 마음이 요동치는 게 분명했다.
“급하게 지금 당장 답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회합에서 태도만 분명히 해주시면 되니까요. 암튼 그때까지 세 아드님의 목숨이 귀하의 결정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초휴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산에서 내려갔다. 타고난 동물적 감각이 이번 승률이 십할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굳이 그 자리에서 확답을 받아낼 필요조차도 없었다. 종문은 엄연히 세가와 다르다. 세가는 구성원 중 한 명이 영광을 누리면 나머지도 따라 누리고, 한 명이 망하면 나머지도 따라 망하는 혈통 중심의 운명공동체다. 그러나 종문은 핏줄이 아니라 거의 개인 중심주의로 운영되는 법이다.
한천정이 비록 점창검종의 종주이긴 하나, 한천정과 점창종주가 완전한 동일체는 아니라는 얘기다. 친아들과 종문의 미래 중 어느 게 더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라면 대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정천도의 제보에 의하면 한 종주는 종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대인배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자기 아들에게 종주 자리를 물려줄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로 머릿속이 복잡한 인물이라고 했다.
이윽고 초휴가 하산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 공공과 방진기가 물었다.
“갔던 일은 잘되었소?”
“마음 푹 놓으시지요. 절대적인 확신이 서기 전까지 저는 절대 출수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오문 팔가 십일파는 하나씩 해결됐고, 이십삼채만 남았군요. 이들 중 아무나 골라도 무방합니다.”
이 공공의 표정이 또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엔 또 어찌하려고 그러오? 또 우리더러 납치극을 벌이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이번엔 정말 간단합니다. 재물 공세로 끝나는 일이니까요. 이십삼채는 오합지졸들로 이루어진 도적 집단에 불과하죠. 가시적인 이익이나 밝히는 자들이란 얘깁니다. 그러니 태자도 이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철검문 등에 비해 공들인 티가 하나도 안 나는 게 그래서인 겁니다. 그러니 돈벼락만 맞게 해주면 저들 스스로가 산채를 송두리째 전하 밑으로 옮겨다 놓을 겁니다.”
“그러나 재물로 산 충성심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이에 초휴의 눈빛이 번뜩였다.
“당연히 믿을 수 있죠. 도적들이 탐욕스러워도 바보 머저리는 아니거든요. 우리가 저들을 매수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재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우리가 저들을 도륙 내기 위해서도 역시 그만큼의 재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