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52)
452화 현연대사
불문 제자를 영접 나온다는 건 보기에 따라서 도문의 자존심이 깎이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가 제아무리 ‘성승(聖僧)’이라 불린다지만, 불문의 성승일 뿐 강호 전체의 성승은 아니었다. 해서 도문 측이 아예 그의 중원 방문을 모르는 척해버렸을 공산이 컸다.
* * *
영룡 해안에 모인 사람들이 오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저 멀리 해상에 거대한 배 한 척이 파도를 가르며 나타났다. 바람을 안고 나부끼는 돛에는 얼핏 진짜처럼 보이는 거경(巨鯨,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
그 고래 표식은 동해의 열 개도 넘는 섬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상회(商會)인 ‘경천회(鯨天會)’의 상징이었다. 동제와 동해를 오가며 상단을 운영하는 경천회는 동해 최대 세력은 아니지만, 재력에서만은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했다. 배 위에 선 늙은 화상 하나가 멀찌감치 한 가닥 검은 실선처럼 보이는 육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스라한 추억과 상념에 젖은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그 화상은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고령이었다. 눈썹과 수염은 이미 하얗게 세었고, 얼굴의 주름은 파리가 끼이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만큼 깊이 패 있었다. 몸에 걸친 회색 승복은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뚜렷했다. 전신을 통틀어 그나마 눈에 띌 만한 것은 목에 걸려 있는 염주 꾸러미 정도였다. 표면에 찬란한 광채가 감도는 가운데 저절로 불광이 생성되는 모습이 얼른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염주가 분명했다.
이 늙은 화상이 바로 그 유명한 불종의 고승이자 동해 전역에서 부처의 현신으로 추앙받는 성승 현연대사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동제 땅을 마주 보는 그의 심중에서 감정의 물결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 물결은 어느덧 격랑이 되어 무수히 요동치다가 결국 깊은 탄식과 함께 입 밖으로 넘쳐났다.
‘젊어서 떠난 고향 늙어서 돌아오네(少小離家老大回)······’
그는 문득 이런 시구가 떠올랐다. 물론 그는 그리 젊은 나이에 떠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늙었다고 할 나이에 돌아온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말이다.
사실 올해로 막 백 세를 넘긴 그는 수명을 삼백 년으로 잡는 무도종사로서는 별로 많은 나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진화련신의 경지에 딱 하루 머물렀다고는 하나, 그러고도 여전히 무도종사의 경지는 유지하고 있으니, 이치대로라면 앞으로도 이백년은 너끈히 더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요 몇 년간 동해 전역에 불법(佛法) 전파와 평화 정착을 위해 종횡무진 애쓰느라 본인의 수련에 정진할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러는 혼자 힘으로 한 개 세력에 맞서는 기염을 토한 적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는 세월이 길어지는 바람에 온몸에 골병이 든 것이다. 해서 무도종사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수명이 고갈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 쟁쟁하던 무도종사가 왕년의 좋은 시절을 다 날리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초라한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처량한 모습이 남들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본인은 자신의 생애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서라도 이루고픈 염원이 있지 않겠는가. 물론 지난날 그가 웅지를 품고 중년의 나이로 동해를 건넜을 당시, 그 자신도 방향을 못 잡고 막연하기만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의 수명을 대개 백년으로 잡을 때, 그 절반을 현연대사는 평범하게 살았다. 무도적 재능도, 불법적 자질도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작은 사찰 출신의 불제자인 그는 어쩌면 남은 생애도 여전히 평범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한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생의 큰 변화를 맞았을 수도 있고, 수많은 상념을 마음 깊이 숨긴 채, 방황뿐인 생을 살았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수십년이 넘게 초심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이에 만족했다. 욕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해 여러 섬에 크고 작은 절도 세웠고, 섬과 섬 간에 서로 칼끝을 겨누며 이권 싸움이 끊이질 않던 곳에 훈풍이 불게 하여 평화의 씨앗도 싹을 틔웠다. 그 결과 왕년의 무명지배가 성승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으니 이 어찌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 가볍게 한숨을 토한 그는, 품속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서 어루만졌다. 그의 오랜 벗인 동해 영오도(靈鰲島)의 천추도인(天樞道人)이 제자를 찾는 데 유용하게 쓰라며 건넨 선물이었다.
사실 현연대사는 무도 자체에 대해서 큰 집착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무도란 대부분 강호인의 해석과 달랐다. 참된 무(武)는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자신도 손에 남의 피를 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살린 이가 죽인 사람보다 수백 수천 배는 많을 터였다. 이처럼 남을 살리느라 경황이 없는 탓에 동해에서는 줄곧 마땅한 제자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운명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제야 후계자를 두고 싶다는 염원이 생긴 것이다. 그의 명성 정도면 제자 찾는 일이 뭐 그리 어려웠겠는가마는, 애석하게도 흡족하다고 느낄 만한 인연은 생기지 않았다. 사실 그의 요구조건이 까다로운 건 아니었다. 반드시 화상일 필요도 없고, 다른 문파 소속이어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도사라 할지라도 무방했다.
다만 한 가지, 무공을 전수할 제자가 살생에 목적을 두는 대신, 이를 사람 구하는 데 써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선악(善惡)이란 명성이나 겉으로 드러난 외양 및 행동거지만으로 쉬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천하에 둘도 없는 대마두가 불현듯 어진 마음이 생겨 수천수만 명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의 제자가 되길 바랐던 동해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무공에 대해 과도한 집착만을 보였을 뿐, 선과 악에 대한 원천적인 고민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귀향길은 그런 제자를 찾을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이 그에게 허락한 시간이 많지 않은지라, 중원의 인재들을 충분히 검증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해서 천추도인에게 특별히 이 옥간의 제작을 부탁한 것이다. 동해 출신인 천추도인은 소속된 문파는 없어도 무도종사급 실력자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유명해진 건 무공 실력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읽고 점치는 능력 때문이었다.
화상이 도사와 둘도 없는 친분을 쌓았다니, 얼핏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은 정말로 막역한 사이였다. 그간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도가와 불가의 견해가 상충하여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는 너, 나는 나, 불가는 불가, 도가는 도가일 뿐이다. 그들은 늘 기탄없이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런 막역지우가 생이 끝나감을 알게 되자 천추도인의 상심이 얼마나 컸겠는가. 해서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 현연대사의 요구조건에 맞을만한 제자를 점쳐냈다. 그리 나온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노봉화개차양구(路逢華蓋遮兩口), 잠룡재연심난수(潛龍在淵心難守)
낙필점정취풍운(落筆點睛聚風雲), 여아박화만광란(如蛾撲火挽狂瀾)
이 점괘는 금번에 현연대사가 찾게 될 제자가 관직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첫째 구절은 의장용 가마에 씌우는 햇빛 가리개(華蓋)로 양쪽 입구(兩口)를 덮었으니(遮) 이는 벼슬아치가 타는 가마를 연상케 하지 않는가. 이로써 이번에 거두게 될 제자가 조정 관리이며, ‘노봉(路逢)’이란 대목을 통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될 인연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구절은 그 제자가 현재 잠룡(潛龍,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해 묻혀 있는 영웅호걸을 비유한 말)에 불과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별다른 명성이 없는 건 물론이고, 본인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연한 상태라는 것이다.
셋째 구절은 현연대사 본인에게 해당하는 말로, 대사가 제자를 낙점하여 무공을 전수하면 이것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 장차 그가 영웅의 기운으로 천하를 오시할 절세의 실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그 제자가 훗날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나방이 횃불에 날아드는 심정으로 위험한 국면에 맞서 싸움으로써 수많은 중생을 구할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점괘가 모호하여 자칫 현연대사가 제자를 잘못 고를 걸 염려한 천추도인은 자신의 정혈 한 모금과 맞바꿔 읽어낸 천기를 이 옥간에 응집해 두었다. 점괘가 일컫는 상대를 현연대사가 만나면 옥간이 저절로 광채를 발하게 될 터였다. 이 정도의 안전장치까지 마련된 점괘라면 절대 착오가 생길 리 없지 않겠는가.
이 점괘를 초휴가 보았더라면 현연대사가 왜 하필 이원을 택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인과이자 숙명이었음을 말이다. 동제 조정 출신인 이원이 죽지 않았더라면 필경 이번에 태자를 수행해 현연대사를 영접하러 왔을 테고, 일단 그것으로 첫째 구절에 부합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큰 이름을 떨치지 못한 채 앞날에 대해서도 갈피를 못 잡는 것은 둘째 구절에 부합된다.
후반 두 구절은 이원의 미래를 가리킨 것이다. 화룡점정. 눈동자를 그려 넣은 그림 속의 용이 실제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처럼, 현연대사의 무공을 물려받은 그는 영웅의 기운으로 일약 창공으로 비상해 올랐을 터였다.
실제로도 그는 동제가 쇠락을 면치 못하여 국난에 처했을 때, 다들 비관적으로만 시국을 바라봤던 것과는 달리, 무모한 불나방이 불 속에 뛰어들듯 북연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동제 백성을 지켰고 진북왕을 거쳐 대장군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구절과 일치하는 것이다.
천추도인이 친히 점쳐낸 제자이지만 나중에는 손에 피를 가득 묻힐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인과(因果)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인과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한지라, 단순히 선악의 논리로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더러는 좋은 일을 행했어도 종국에는 더 큰 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더러는 누군가를 죽인 덕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원이 동제를 위해 나서지 않았더라면 북연은 필경 동제를 함락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중원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동제가 그리 쉽게 무너질 리 만무하니, 북연과 끝까지 격전을 치렀을 테고, 서초 역시 어부지리를 노리기 위해 이 싸움에 끼어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삼국 대전이 다시금 재개되면서 혼전에 빠진 천하는 피로 물들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원이 몸을 불사르며 전장에 뛰어든 덕에 북연은 움찔하여 퇴각했고, 전쟁은 일정 수위에서 통제될 수 있었다. 서초에게도 끼어들 여지를 허락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 발생이 불가피했지만,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원의 존재가 삼국 간 화마의 불씨를 잠재운 건 사실이다. 본인의 손에 많은 피를 묻혔어도 간접적으로 수천수만의 백성을 구한 셈이 아닌가. 이원이야말로 천추도인 점괘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인 셈이다.
해안가에서 사람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경천회의 거선이 접안을 시도했다. 마침내 배가 뭍에 닿자 부티 나게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현연대사의 뒤에서 도착을 알렸다.
“대사님, 당도했습니다.”
“용(龍) 회주, 수고를 끼쳤소이다.”
대사가 뒤돌아보며 온화한 미소로 치하하자 중년 사내는 황망히 답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지난날 대사님께서 의롭게 나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저희 경천회는 진작 동해 삼악도(三惡島)의 창칼 아래 무너졌을 겁니다. 그간 대사님께서 동해를 돌봐주신 덕에 불필요한 살육이 참으로 많이 줄어들었지요. 애석하게도 인재는 명이 짧다더니, 이처럼 일찍 가려 하시다니요. 대사님께서 가시고 나면 동해가 어찌 될지 걱정입니다. 필경 예전 같은 혼돈의 시절로 되돌아가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