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54)
454화 신분을 ‘사칭’하다
이원이 죽은 지금, 이 세상에는 옥간이 강렬한 광채를 발하게 할 존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현재 인과적인 측면에서 이원과 직결된 자는 누굴까? 그건 이원의 부모나 가족도 아니고 바로 그를 죽인 초휴였다! 해서 초휴의 존재를 감지한 순간 옥간은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간에 응집된 천기의 주인공이 이미 죽은 탓에 그 빛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빛이 약한 탓에 현연대사는 초휴에 대해 확신을 두기 어려웠다. 해서 그가 건넨 상자를 받아들며 물었다.
“감히 묻소만, 초 소협은 이황자 전하 휘하에서 관직을 맡고 계시는 거요?”
“오해이십니다. 소인은 그저 이황자 전하를 대신해 온 것일 뿐, 동제 조정과는 무관합니다. 현재 관중형당 관서 장형관 직을 맡고 있지요.”
초휴의 부인에 현연대사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조정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정말로 옥간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현연대사는 수십년 전에 중원을 떠난 탓에, 관중형당에 대한 인상은 초광가가 막 강호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유명세를 누렸던 건 관중형당 전체가 아니라 초광가라는 불세출의 영웅 한사람이었기에, 초휴가 관중형당을 들먹였어도 그리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이때 경천회 회주 용천영도 배에서 내려 다소곳하게 현연대사 뒤에 섰다. 경천회는 동해와 동제 내륙을 오가며 상단을 운영하는 터라, 중원 소식에 정통하기로는 중원 현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해서 현연대사는 관중형당 및 초휴에 대해서 그에게 전음으로 자문을 구했다. 이에 용천영은 어리둥절했다. 현연대사가 갑작스레 왜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는지 영문을 몰라서였다. 하지만 질문을 받았으니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걸 다 들은 현연대사는 더욱 오리무중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초휴가 점괘 속 인물과 비슷한 듯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아닌 듯도 해서였다. 하지만 살짝 다른 각도에서 점괘를 추론해보면 지금 이게 영 터무니없는 상황만은 아닌 듯했다.
일단 ‘노봉화개차양구(路逢華蓋遮兩口)’는 ‘관(官)’자를 의미했다. 해서 현연대사는 무의식중에 상대가 조정 벼슬아치려니 생각했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의식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점괘는 그저 ‘관(官)’ 한 글자에 불과했다. ‘조정’이라고 못 박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꼭 조정 내에 있지 않더라도 ‘官’과 연관될 수 있지 않은가. 예컨대 초휴만 봐도 현재 직위가 관서 장형관(掌刑官)이니 ‘官’이란 점괘와 일치한다.
다만 둘째 구절 점괘가 초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미 용호방 육 위에 오른 그를 잠룡이라 하기에는 타당치 않아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육 위라는 순위 앞에는 그와 현격한 격차를 보이는 강한 실력자가 다섯 명이나 더 있는 셈이니, 그런 의미에서 잠룡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관중형당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젊은 연배 중에서는 가장 걸출하다고 인정받지만, 관사우를 비롯한 모든 이가 그를 관중형당의 계승자라고 보진 않는다. 그저 극히 일각에서나, 그가 계승자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을 할 뿐.
그렇다면 장승정과 종현은 어떤가? 그 둘은 어려서부터 진즉 종문의 계승자로 인정받은 운명이다. 도중에 죽지만 않는다면 분명히 강호의 태산북두가 되리라고 예정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인 초휴는 확실히 잠룡이 아니겠는가. 현연대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초휴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초 소협, 그대는 지금 관중형당 장형관으로 용호방 육 위에 올라있는 몸이오. 그렇다면 본인의 장래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현연대사의 뜬금없는 질문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기껏 이 많은 사람이 오랜 기다림 끝에 그를 만났다. 태자는 물론이고 종현과 같은 불가의 영웅까지 있는데, 그들 모두를 젖혀두고 굳이 초휴를 붙잡고 이런 시시껄렁한 질문을 하는 저의가 대체 무얼까. 초휴가 무슨 덕업을 그리도 많이 쌓았길래 현연대사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초휴가 건넨 선물이 유독 마음에 들어서?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현연대사는 아직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초휴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원의 기연을 차지할 생각으로 여러 경우의 수를 미리 대입해보았다. 하지만 단번에 될 일이 아닌지라 일단 현연대사에게 접근하여 몇 마디를 건넨 다음, 반응을 봐가며 차차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 측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정말로 하늘이 도와서 이원의 행운을 고스란히 그에게 넘겨주려는 걸까?
초휴가 갈피를 못 잡던 것도 잠시.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앉은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하늘에서 절로 행운이 떨어질 정도로 본인이 행운아라고 초휴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연대사가 어떤 의도에서 저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초휴의 머리는 최대한 이원의 사고방식에 기반해 최적의 대답을 만들어내려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원이 죽지 않았으면 이때쯤 그에게 주어질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초휴의 분석에 의하면 ‘알 수 없다’, 이 네 글자로 대변될 수 있으리라. 이원이 비록 국공(國公)의 자제고 태자의 심복이긴 하나, 국공부는 이미 몰락에 가까운 데다 태자의 심복은 이원 하나뿐이 아니고, 더불어 태자가 가장 신임하는 심복 또한 아니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태자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위에서는 여호창이 양위할 생각이라곤 없이 버티는 중이고, 밑에서는 여륭광이 시시각각 위협을 가하는 판이다. 이처럼 태자 본인도 자기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그 밑의 수하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순간 초휴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원으로 빙의한 것처럼 답했다.
“대사님, 농담이 과하십니다. 저같이 한 치 앞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 어찌 장래를 운운하겠습니까. 그저 몸담은 문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다 보니 강호에서 절반의 명예만 얻었을 뿐, 제대로 된 무공 하나 전승받은 게 없습니다. 상갓집 개처럼 추살에 쫓기다가 낭떠러지 끝에 몰려서야 간신히 천운이 닿아 관중형당에 구제된 몸입니다. 지금이야 그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초휴가 천연덕스럽게 내놓은 대답에 다들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절반의 명예? 강호에서 초휴 당신이 반쪽짜리 명예나마 누린 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연대사만은 그 답변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초휴가 토로한 심경과 처지가 점괘의 흐름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전승받은 무공 하나 없는 잠룡의 신세이니,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바로 화룡점정이 되지 않겠는가. 영웅의 기운을 일거에 모아 하늘로 승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점괘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는 현연대사 나름의 해석이 뒤따랐다. 삼국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관중형당은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지난날 초광가는 혼자 천군만마에 대적하여 양국 간의 전쟁을 막기도 했다. 초휴도 무공을 전승받은 후 실력이 대폭 증강되면 초광가와 같은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더 잘 해내어 삼국 간 전쟁이 종식됨으로써 무수한 백성을 화마로부터 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초휴가 점괘에 정확히 부합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현연대사는 억지스럽게나마 그 일부에 뼈대를 잇고 살을 붙여 나머지 추론을 완성했다. 게다가 미약할지언정 빛을 발했던 옥간도 무시할 순 없지 않은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호 전역을 다 뒤진들 초휴보다 더 강렬한 광채를 발할 인물을 찾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가 제자를 고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본인이 짜 맞춘 시나리오대로라면 초휴가 옥간과 점괘의 요구조건에 맞는 제자인 듯싶긴 하지만, 기나긴 세월에 걸쳐 농익은 그의 직감이 좀 더 신중히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순간 현연대사는 내장 깊이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겉으로는 별로 티가 안 났어도 체내에서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현연대사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두고 신중히 판단할 기회는 없지 싶었다. 앞으로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체내 통증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해지는 것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현연대사도 불종의 무공을 수련했다. 대광명사의 연체공법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화의 과정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해왔고 결국 내상이 급격히 악화하여 한계점에 달한 것이다. 더는 몸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병든 몸이 신중히 판단할 기회를 허락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여전히 자기 수중에서 옅은 빛을 발하고 있는 옥간을 힐끗 쳐다본 그는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초 소협, 내가 중원에 죽으러 온 건 사실이나, 내 일신의 무공마저 흙 속으로 가져가고 싶진 않소. 해서 내 무공을 전수받아 이 세상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해 줄 제자를 찾고 있소. 다시 말하자면 내 무공을 사람 죽이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살리는 데 써줄 후계자를 찾고 있다는 말이오. 내 평생 익힌 모든 것과 마지막 남은 공력까지 남김없이 그대에게 전승할 것이나 그렇다고 나를 사부로 여길 필요는 없소. 우린 그저 기술적인 무예를주고받을 뿐, 도를 함께 나눈 사이는 아닐 테니 말이오. 그대의 의향은 어떠하오?”
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발언에 현장의 모든 사람은 충격에 빠졌다. 현연대사가 제자를 거둔 적이 없다는 건 강호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사실 대광명사와 수보리선원, 양쪽 다 서로 설법을 빌미로 그를 모셔 가려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각자의 존재감도 과시하고 대사에 대한 경외심도 피력하기 위함이었으나 내심 꿍꿍이속이 있었다는 말이다. 현연대사는 제자가 없으니, 설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도를 그 두 곳에 남기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법의 종가 격인 수보리선원도 아니고 현재 불계에서 단연 촉망받는 차기 방장감인 종현도 아닌, 강호에 나날이 악명을 더해가는 초휴에게 일신의 무공을 전수하겠다니! 심지어 불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를 나눈 혈육도 아닌 저 야차 같은 자에게 말이다!
현연대사가 대뜸 초휴를 후계자로 삼아 무공을 전수하겠다고 한 건 초휴 본인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원래 이원의 것이었던 용이 될 기회를 이처럼 쉽사리 대신 차지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초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격분한 주위 무사들이 들고일어났다. 초휴가 마도의 전승물을 차지한다면 문제 될 게 없지만, 현연대사와 같은 성승급 인물의 무공이 그에게 전승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특히 불종 무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대사님, 부디 숙고해 주십시오! 어찌 저렇게 극악한 자에게 무공을 전수하려 하십니까!”
“맞습니다! 성승께서는 명을 거둬주십시오. 우리 불종에도 뛰어난 제자들이 부지기수이건만, 어째서 불제자도 아닌 악인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십니까!”
격분한 건 비단 그들뿐이 아니었다. 수보리선원 무도종사들도 현연대사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순 없었다. 수보리선원을 대표하는 무도종사의 신분으로 여기 온 마당에 현연대사의 개인적인 결정에 대놓고 왈가왈부하기에는 체면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종현은 입을 꾹 다문 채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현연대사의 무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현연대사의 실력이 한창 절정에 달했을 때는 진화련신의 경지도 뚫었다지만, 결국 그는 낭인 출신에 불과하다. 물론 진화련신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대광명사 내에서 진화련신을 뚫었던 고수들이 백 명은 아니어도 족히 여든 명은 될 터였다. 그들이 남긴 무공이 설마 현연대사의 것만 못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