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61)
461화 원적에 들다
명기는 굳은 표정으로 현연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마지못해 공수의 예로 작별을 고한 후 가버렸다. 명기의 불손한 태도에 초휴는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광명사는 그야말로 막 나가는 게 완전히 습관이 된 게 아닌가. 어쩌다 하필 저런 자를 보내서 자승자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가 말이다.
현연대사가 비록 소속이 없는 혈혈단신의 몸이긴 하나 성승으로서 불문은 물론, 무림 전체의 추앙을 받는 존재이다. 대광명사가 제아무리 기고만장하여 눈에 뵈는 게 없어도 그렇지, 죽음을 지척에 둔 성승에게조차 함부로 대한다면 자기 체면 깎아 먹기밖에 더 되겠는가.
명기가 속한 인과선당이 강호에서는 물론이고, 대광명사 내에서도 워낙 높은 위상을 누리다 보니 이런 패도적인 처사가 습관처럼 몸에 익은 듯했다. 애당초 명기만 보내서 대광명사 측 의견을 밝히는 선에서 그쳤더라면 이 지경까지 파국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사숙이 출수하란다고 대뜸 출수하고, 출수한 후에도 오로지 맹공을 퍼부을 줄만 아는 종현까지 보낸 통에 일이 이처럼 꼬이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항간에 비난받을 일만 잔뜩 남기고 떠난 셈이 되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현연대사가 용천영 등에게 다가가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용 회장, 그대들까지 애를 먹었구려.”
“대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저희 모두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너무 몸을 사렸던 모양입니다. 목숨을 걸고 저자들을 막아섰어야 하는 것을······.”
“나야 이제 곧 사그라질 몸뚱이지만, 아직 앞날이 창창한 용 회장이 목숨 운운해선 안 될 말이지. 이제 내 소원은 다 이루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나 해야겠구먼. 용 회장은 이만 돌아가시구려.”
이에 용천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간 대사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어찌 제가 잊을 수 잊겠습니까. 경천회는 반석에 오른 지 오래이니 잠시 제가 자리를 비워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대사님 가시는 마지막 길까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용천영이 간곡히 말하자 현연대사가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초휴를 돌아보며 물었다.
“초 소협, 내가 중원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그러는데, 자네가 나를 고향으로 좀 데려다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초휴가 이내 답했다. 비록 사제(師弟)의 연도 맺지 않은 채 초휴에게 일방적으로 무공을 편취당한 격이긴 하나, 그는 엄연히 사부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 그런 판에 초휴가 이 정도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할까. 여정에 오르려던 현연대사는 황주 병을 든 채 옆에 서 있던 방칠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도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거기 젊은이, 잠깐! 감히 묻소만, 혹시 검왕성 출신이오?”
“그렇습니다만, 어쩐 일로 그러시는지요?”
방칠소가 잔뜩 풀이 죽어 되물었다. 아까 영룡 해안에서 방칠소도 검왕성을 대표해 그에게 선물을 건넨 바 있다. 그러나 인제 보니 대사가 자신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방칠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꿀릴 거라곤 없이 제 잘난 맛에 살아온 방칠소가 이처럼 없는 사람 취급받는 날이 있을 줄이야! 지금 그의 기분이 좋다면 그게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현연대사가 자상히 웃었다.
“너무 언짢아 마시게. 아까 해안가에서는 속히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보니 노승의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지. 부디 날 원망치 말게나.”
현연대사가 이렇게 말하자 방칠소가 머쓱해져서는 언제 삐졌냐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언제 대사님을 원망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현연대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품 안에서 옥간 한 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어쩌다 손에 넣은 검도 비전이라네. 수천년 전 동해의 큰 검도 문파가 남긴 검 수련 기록인데 두서없이 이런저런 검술들만 잔뜩 끄적여놓았을 뿐, 온전한 검법이라곤 없더군. 그러나 검도 대문파 출신의 고수들이 남긴 깨우침도 많이 들어있으니, 자네라면 이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라 믿네.”
이를 받아든 방칠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현연대사의 말대로라면 이건 검객에게 있어 그저 유용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로 귀한 보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검에 관한 모든 게 총망라된 검왕성 출신의 방칠소에게 설마 검법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겠는가. 게다가 인과 검도는 여러 검법이 필요치도 않았다. 하지만 길가의 흔한 돌이 의외로 옥을 깰 수도 있는 법이다. 상고시대 고수들이 검 수련 시 깨달은 바를 주절주절 기록해 둔 이 자료가 바로 그런 경우일 수도 있을 터. 이 옥간을 다 보면 분명 검도 전반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방칠소가 잠시 머뭇대다 물었다.
“대사님, 이런 걸 어째서 제게 주십니까?”
“최근 몇 년 사이에 동해에서 괜찮은 것들을 많이 손에 넣었다네. 남에게 줄 만한 건 다 줘버리고 남은 거라곤 그런 것뿐이군 그래. 죽어서 죄다 가져갈 것도 아닌데, 남겨둔들 뭐 하겠는가. 그놈이 나를 따라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검왕성 출신인 자네 손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웬만한 무사들이라면 본인의 무도 전승물을 무엇보다도 귀히 여겨, 죽더라도 무덤까지 함께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현연대사는 세속은 물론, 무도에 대해서조차 초탈한 인물이었다. 평생 함께해온 무도를 자신의 몸과는 별개의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방칠소가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다.
“제가 이걸로 무슨 나쁜 짓을 저질러서 대사님의 명예에 해를 끼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말과 함께 방칠소가 힐끗 초휴를 곁눈질했다. 사실 방칠소가 초휴와 어울려 다니긴 해도 그를 선한 사람으로 인정한 건 아니었다. 아까 명기가 했던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현연대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선악(善惡)이란 단순히 겉으로만 판단할 것이 못 된다네. 누군가가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작심하면 무력을 쓰지 않고 간악한 주둥이만 놀려서 수천수만 명인들 못 죽이겠는가. 마찬가지 맥락에서 얼핏 사람을 많이 죽인 악인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구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는 거라네. 그러니 노승이 도박을 한번 해봄 직하지 않을까. 자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쪽에 걸도록 하지. 이 검 수련 기록이 오대 검파의 계승자 손에 들어가는 게 나를 따라 땅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일세.”
강호에 고수야 차고도 넘친다지만 이처럼 해탈의 마음을 가진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이는 지금 현연대사에게 정말로 남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허락되었어도 자기가 신중히 고른 적임자에게 모든 걸 넘겨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일이 이쯤 되자 늘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방칠소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팍에 덜렁대던 장검을 다소곳이 등 뒤에 제대로 매더니 현연대사에게 깊은 예를 올렸다.
“대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귀한 걸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저도 대사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배웅 가도 될까요?”
현연대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도 좋지. 사람이 많으면 저승 떠나는 길도 그만큼 재미있을 테니까. 노승의 마지막 길에 이처럼 많은 벗이 함께해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걸.”
* * *
현연대사의 고향은 동제 장양군(長陽郡) 송평부(松平府)에 있었다. 이는 동제의 내륙지로, 동해군에서 출발하면 족히 열흘은 넘게 걸어야 당도할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현연대사의 몸은 이미 썩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열흘은 고사하고 열 시간이나마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사의 집념이 워낙 강한지라 열흘도 넘는 여정은 별문제 없이 끝났다.
이윽고 송평부 외곽에 들어선 일행은 다 쓰러져가는 절간에 자리를 잡았다. ‘현제사(懸濟寺)’라 불리는 이 절은 현연대사가 있던 당시에도 열 명 남짓한 화상들만이 기거했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지금은 다들 떠나고 빈 절만 달랑 남겨져 있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몰살당했든지, 아니면 절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없어 이처럼 쓸쓸히 방치된 것이리라. 그러나 절이 보존된 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것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현제사 내 먼지가 뽀얗게 쌓인 불상을 어루만지며 현연대사가 장탄식을 내뱉었다. 중년의 나이에 동해로 떠나 무수한 풍파를 겪은 후, 죽을 때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대사에게 있어 이번 생은 시련의 연속이었고 더러는 방황한 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전혀 남지 않았다. 갓 동해를 건넜을 때만 해도 야만의 땅에 불법을 전파하고 불가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하는 초심이 있었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 이런저런 표면적인 명분들은 죄다 사라지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은 부처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본인이 옳다 믿었던 신념만은 끝끝내 지켜낸 것이다.
꾀죄죄한 부들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현연대사의 모습은 아까의 그 불상과도 같았다. 그가 두 눈을 감은 찰라, 일곱 빛깔 불광이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엄청난 힘 한 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천지 간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입지성불(立地成佛)이란 말처럼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 듯했다.
이때 용천영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초휴와 방칠소도 숙연히 침묵을 지켰다. 현연이 성불한 게 아니라 영면에 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사로 천지 간에 태어나 천지의 원기를 내 몸에 빌려 쓰기까지 했으니, 숨이 다한 지금 그동안 빌렸던 힘을 흩뿌려 천지로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동제 영화(永和) 육십구년, ‘성승’ 현연이 송평부 현제사에서 입적하니,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 * *
현연대사가 입적하자 초휴 등은 시신을 안장했다. 대광명사 무사들의 경우에는 입적 후 사리를 남기는 게 관례였다. 후손들의 기림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힘을 사리에 봉인하여 훗날 필요시에 후대 제자들이 그 힘을 이용하게 하려는 목적도 컸다.
하지만 현연대사는 제자를 남기지 않았다. 초휴가 그의 무공을 전승하긴 했으나 그저 무공만 받은 것이지, 그의 무도 정신까지 계승한 건 아니었다. 해서 현연대사는 사리고 뭐고 남기는 대신, 일신의 남은 힘 모두를 천지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한 것이다. 비통함을 무릅쓰고 안장을 마친 용천영이 초휴와 방칠소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방 소협, 초 공자, 대사님을 고향으로 모셔오는 임무를 완수했으니 나도 동해로 돌아가야겠구려. 두 분도 평안히 돌아가시오.”
“용 회장님도 살펴 가십시오. 이후로 제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힘껏 나설 것입니다.”
의리를 중시하는 용천영의 충직한 성품을 초휴는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용천영과 친분을 맺어두려는데는 그의 능력도 한몫했다. 경천회가 비록 저 멀리 동해에 있긴 하나, 중원과 무역 거래를 활발히 주고받는 중이다. 실력은 둘째 치고 그 엄청난 재력만 보아도 장차 크게 쓰임이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