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69)
469화 사랑에 눈이 멀다
영백록이 나타나자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른 듯 주변까지 환해지며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너나없이 여섯 글자가 박혔다.
‘절·세·의·매·력·남’
딱 이 여섯 글자로 그에 대한 평가가 총망라된 셈이다. 현재 그의 용호방 순위가 초휴 및 방칠소보다 아래일지라도, 사람들은 가장 준걸에 걸맞은 기개와 풍모를 느끼는 인물은 그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이어 향한 곳은 초휴 쪽이었다. 얼마 전 초휴가 그를 밀어내고 용호방 오 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 둘이 정통으로 마주친 게 아닌가. 두 사람이 과연 기 싸움을 벌일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옮겨간 건 물론이다. 용호방 오 위권 간의 싸움이라니, 이건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좌중의 예상을 깨고 영백록은 초휴를 못 본 척 지나치더니 곧장 안비연에게로 향했다.
안비연을 둘러싸고 있던 젊은 무사들은 영백록의 등장과 함께 속속 뒤로 물러났다. 영백록의 옆에서 비교당하면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자체 발광 중인 그의 앞에서 그들은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그녀를 양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영백록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다정히 말했다.
“안 소저, 또 만났구려. 지난번 헤어진 후 그대의 수련이 크게 증진되었다던데 진심으로 축하하오.”
이어서 그가 비단 함을 하나 건넸다.
“이건 내가 그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백화로(白花露)라오. 육급 이상의 꽃잎에 맺힌 이슬만을 모아 만든 것이니, 그대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요.”
이에 안비연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 공자님, 이처럼 진귀한 것을 소녀는 감당할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이 백화로를 그대가 감당할 수 없다면 이 세상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 내 성의를 봐서라도 일단 받아 두시구려.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그대에게 딱히 뭘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잖소.”
안비연이 살포시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도 영백록이 싫지는 않았다. 영백록 같은 남자를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느껴진다 한들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는 감정밖에 더 되겠는가.
그녀는 월녀궁의 제자임을 넘어서 장차 월녀궁을 승계해야 할 존재다. 월녀궁을 부흥시켜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그녀의 가녀린 두 어깨 위에 놓인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남녀 간은 애정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꿈에서라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이다. 해서 영백록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님에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자님의 성의는 마음으로만 받으렵니다. 이건 정말 받기가 난감하네요.”
그녀의 거듭된 거절에 영백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화로는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요. 그대가 받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도 없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수중에서 금색 강기가 터져 나오더니 비단 함을 뽀얀 연기로 만들어 버렸다. 주위 사람들이 말릴 새도 없이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타고 짙은 꽃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저런 낭비가 다 있나!’
백 가지에 달하는 육급 이상의 진귀한 화초들만 골라 만든 백화로가 안비연의 퇴짜 한 마디에 연기로 변하다니, 그야말로 귀한 걸 귀하게 다룰 줄 모르는 처사가 아닌가.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방칠소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런, 두손 두발 다 들었네. 민들레 노릇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게지. 굳이 저렇게 비싼 대가를 치러가며 여자 환심을 사야 하는 거야? 영가가 그나마 살 만하니 망정이지, 가세가 약했으면 패가망신은 떼어 놓은 당상이겠군그래.”
또 시작이다 싶어 초휴가 그를 슬쩍 째려봤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웬만한 세가의 경우라면 백영록과 같이 출중한 자질을 갖춘 제자를 보유할 수만 있다면 패가망신마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안비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영백록에게 일침을 놓았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야 있나요? 영 공자, 우리는 정말로 안 됩니다. 지금 사부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잠시 제가 월녀궁의 일을 돕고 있어요. 이런 일에 마음 뺏길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월녀궁의 규율이 절대로 허락지 않음은 물론이고요.”
이에 영백록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요. 하늘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오. 아 참, 임 궁주께서는 어디가 심하게 편찮으시오? 우리 가문에 전적으로 의도(醫道)만을 연구하는 고수들도 있고, 온갖 진귀한 영약들도 많으니 뭐든 도우리다.”
이에 안비연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공자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귀 가문에까지 폐를 끼칠 이유는 없습니다. 지난번 부옥산 정마대전 당시 사부님께서 마도의 요녀와 겨루시다가 습격을 당해 좀 다치셨지만, 그리 위중한 상태는 아니십니다. 다만 상세가 좀 특이하긴 하군요. 제가 알아보니 서초의 신의 풍불평이라면 치료가 가능할 것 같지만요. 마침 동가 개산제에 왔으니, 일이 끝난 후 풍 신의를 월녀궁으로 모셔갈 생각이에요.”
“아, ‘기사염라’ 풍불평의 이름은 나도 들어보았소. 소속된 문파는 없어도 의술에 있어 실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더이다. 다만 성격이 괴팍한 데다, 치료에 응하기에 앞서 조건도 까다롭다던데······, 하긴 뭐 상관없소. 우리 영가에 없을 게 뭐가 있겠소. 그자가 원하는 대로 뭐든 내어주리다.”
이때 내당 내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안 소저, 풍 신의를 찾아가기에는 한발 늦었소. 이미 사인곡을 떠났다오. 관중 땅에 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을 거라더군. 아, 풍 신의와 소온후는 막역한 사이니, 그가 한마디만 거들어주면 풍 신의가 이것저것 까탈 부리지 않고 흔쾌히 임 궁주를 진료해드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인곡이 고릉군과 별로 멀지 않은 데다, 서초에서 워낙 풍불평의 명성이 대단하니, 사인곡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알려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를 귀띔해 준 이가 좋은 마음에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영백록을 자극해서 어떻게든 초휴와 붙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봉선과 초휴가 막역지우 사이인 걸 누가 모를까. 안비연이 여봉선에게 부탁하게 되면 이걸 지켜보는 영백록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순전히 이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려는 목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자의 권고를 들은 안비연이 여봉선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에게 꾸벅 예를 취해 보였다.
“여 소협, 또 뵙게 되는군요. 풍 신의가 정말로 관중에 있는지요?”
통천탑 일전 당시, 그녀는 여봉선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물론 그가 없었더라도 그녀 나름대로 헤쳐나갈 비장의 패가 있었지만, 그걸 사용하자면 적잖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여봉선이 기껏 도와준 다음 그 마음의 빚을 사사로이 써먹는 대신, 이를 월녀궁과 초휴 사이를 화해시키는 데 쓰자 깊이 감복 받은 바 있었다.
작금의 강호에 도의는 나 몰라라 한 채 자신의 실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자들이 태반이다. 여봉선처럼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의로움을 베푸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여봉선의 실력을 겪은 결과, 그가 좁은 연못에 머물지 않고 장차 큰 바다로 나가게 되리라는 걸 직감했었다. 과연 그녀의 짐작대로 여봉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용호방 십 위권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그녀보다 고작 하나 아래 순위였다.
여봉선과 제대로 붙어본다면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그보다 순위가 앞선 것은 그녀가 여인, 그것도 무림 사대 미인에 속하는 어여쁜 여인이라는 이유가 컸다. 실력이 아니라 유명세와 영향력으로 여봉선을 앞질렀다는 말이다.
그녀의 질문에 여봉선이 흔쾌히 답했다.
“풍 신의는 지금쯤 관중에 거의 당도했을 겁니다. 안 소저께서 그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다만 풍 신의는 자기만의 규칙이 분명한 분이라서 진료비 쪽으로는 아무래도 안 소저가 직접 그와 협의하셔야 할 겁니다.”
강호에서 구경거리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구경거리가 이왕이면 떠들썩하니 규모가 크다면 더 좋고 말이다.
어느덧 내당에는 용호방 준걸이 다섯 명이나 모여 있었다. 일반 개산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옥산 정마대전에서도 이렇게까지 많이 모인 적이 없었다. 지금 이 다섯 준걸들 간에 흐르는 기류는 미묘하고 복잡했다. 해서 구경거리가 생기길 고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부딪히는 광경을 보고 싶어 은근히 안달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안비연이 여봉선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자 영백록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도,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대신 그 역시 여봉선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보탰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여 형한테 부탁 좀 드립시다. 진료비라면 염려 마시오. 풍 신의가 달라는 대로 다 드리리다. 우리 상수 영가가 뒤에 있는데 뭐가 문제겠소.”
시종일관 점잖은 영백록의 언행과 태도에 좌중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호평 일색인 그의 평판이 결코 허구는 아니지 않은가. 말 한마디,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째서 강호의 손꼽는 준걸인지를 모두가 알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영백록의 방금 그 말은 자신이 안비연의 부군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함께 여봉선에게 부탁한 격이 되었으니, 남들 눈에도 두 사람의 사이가 부쩍 가깝게 느껴졌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안비연이 살짝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으나 굳이 영백록을 탓하지는 않았다. 거듭 차갑게 대하자니 그의 체면이 손상될 게 염려되어서였다.
이때 영백록이 초휴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어 보였다.
“초 형, 또 만났구려. 낙가에서의 일은 부디 오해하지 말아 주시오. 지금 그대도 보다시피 내 평생 여인이라고는 오로지 안 소저 하나뿐이니까.”
초휴에게 순위가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옛 벗을 대하는 듯,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해서 남들 눈에는 그의 바다처럼 넓은 도량 역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이 말과 함께 영백록은 안비연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사실 지금 이 말은 초휴가 아닌 안비연이 들으라고 한 해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안비연이 낙가에서의 일로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내심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그리 보이는군요. 당시 영 형마저 출수했더라면 낙비홍을 데리고 무사히 탈출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거요.”
초휴의 말에 그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번에는 방칠소에게 눈길을 돌렸다.
“방 형, 우리도 한동안 못 만났었지요?”
방칠소가 그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며 실실 웃었다.
“헤헤, 한동안 못 만났으니 다행 아니오? 그대와 자주 만나면 내가 곤란해지니 말이지. 그게 그렇잖은가. 우리가 함께 있으면 아래는 막 걸음마를 뗀 계집아이에서 위로는 아흔아홉 살 호호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여자라면 누구나 그대한테만 시선이 고정되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니, 내 기분이 어떻게 좋겠냐는 말이오.”
“아이고, 이런! 역시 방 형은 농담도 잘하시오. 하하하!”
영백록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얼핏 유쾌하게 한담을 나누는 듯 보였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서 안비연이 제일 먼저 작별을 고하며 일어났고 영백록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제야 남은 이들 사이에 한 줄기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방칠소가 수중의 술잔을 만지작대며 가지고 놀다가 킥킥 웃었다.
“정말이지 영백록이 난 인물은 난 인물이네.”
초휴와 여봉선이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새삼스레 말하기엔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닌가.
“아니, 아니. 내 말뜻은 그의 잠재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용호방 실력자들 가운데 정말로 나를 탄복게 했던 인재는 몇 안 되거든. 그러나 영백록이 아무리 가공할 잠재력을 가졌으면 뭐 하나. 딱하게도 저렇듯 연정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니 끝내 정겁(情劫)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평생 참담하게 살 팔자 아니오!”
방칠소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머리까지 흔들어가며 점괘를 읊는 도사 시늉을 해 보였다. 어쩐지 잘 나간다 했더니 그놈의 오두방정이 습관처럼 또 도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