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70)
470화 개산제
초휴와 여봉선이 대꾸도 없이 계속 내당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잠시 후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뜻밖에도 그중에는 사소루가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사소루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초 형, 여 형, 자네들도 와 있었어?”
초대도 받지 않고 들이닥친 세 사람과는 달리, 사소루는 정식으로 받은 초대장을 갖고 있었다. 천하맹이 서초에서 손꼽히는 세력임은 물론이오, 맹주 진청제의 개인적인 명성을 봐서라도 동가의 초대를 받은 건 너무도 당연했다. 다만 진청제가 공사다망한 와중에 남의 집안 개산제를 하는 자리까지 챙길 만큼 동가와 친분이 깊은 건 아닌지라, 사소루라도 보내서 동가의 체면을 세워주려 한 것이었다.
초휴와 여봉선이 그를 반기며 방칠소에게도 소개했다. 하지만 방칠소는 격의 없이 두 사람을 대하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만은 꽤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형식적인 인사만 건넨 후 말도 거의 섞지 않았다. 사실 우스꽝스러운 일면에 잠시 가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방칠소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인물이었다. 늘 검도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로서는 용호방에 오른 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높이 평가하는 건 아니었다.
초휴의 실력은 이미 겪어봤고 충분히 인정할 만했다. 여봉선과는 겨룰 기회가 없었지만, 용호방 십 위권에 드는 실력자이니 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여봉선은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방칠소에게 자괴감을 안길만 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할 터였다. 하지만 사소루의 경우는 진청제의 제자이자 용호방 이십 위권의 준걸이라 해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격이 떨어진다는 게 방칠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소루는 개의치 않았다. 용호방 삼 위의 위엄이라면 저쯤 되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며 그의 고고한 반응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 덕분에 사소루만이라도 당분간이나마 방칠소에 대한 환상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 터였다. 이로써 개산제에 올 만한 이들은 다 온 셈이었다.
이윽고 동가 측에서 약관의 무사가 나오더니 좌중을 향해 개산제의 시작을 알렸다.
“여러분, 다 함께 뒷산으로 오르시지요.”
이에 내당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 젊은이를 따라 동가의 뒷산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뒷산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운집해있었다. 동가의 제자 외에 무도종사도 여럿이 모습을 보였다. 개산제는 동가에 있어 중차대한 일인 만큼, 혹여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처하려고 가능한 선에서 무도종사들을 몇 명이라도 더 초대한 것이다.
물론 이런 자리가 무도종사들에게도 나쁠 게 없었다. 개산제의 규칙상, 도움을 주러 온 무사들이 스스로 운반할 수 있는 귀한 것을 발견하면 그들 각자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다만 운반이 불가한 것은 주최 측에 양보하기로 되어있으니, 쌍방 모두 손해 볼 일은 없는 셈이다.
구대 세가 중 중위권 세력인 동가에는 무도종사가 두 명이 있었다. 고령의 동가 노야가 동가를 지키는 동안, 한창 중년의 나이인 가주 동제곤(董齊坤)은 동가 제자들을 인솔하여 개산 작업을 지휘할 계획이었다. 초휴 일행이 나타난 것을 보자, 동제곤의 옆에 있던 무도종사가 한껏 정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초휴, 썩 꺼지라고 말했을 텐데? 노부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게야!”
다시 보니 그는 ‘표혈신도’ 교연동이 아닌가. 그도 나름 한가락 하는 무도종사로서 동가의 초대를 받고 개산제에 참가하러 온 것이었다. 사인곡에서 물러난 후, 그는 생각할수록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자기가 지레 겁먹고 너무 순순히 초휴를 보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놔주겠노라고 공언한 일을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휴가 서초를 떠나 다시 자기 눈에 띄지만 않으면 그 일은 그냥 그렇게 덮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곳에 초휴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기껏 도망갈 구멍을 열어주었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시 자기 눈에 들어왔다는 건 도발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애써 분을 참는 그와는 달리 초휴가 담담히 응수했다.
“교 선배님, 볼 때마다 을러대시니 이거 겁나서 살겠습니까. 이 서초 땅 전부가 선배님의 안마당도 아니건만, 꼭 선배님의 허락을 받아야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면 어찌합니까. 서초의 황족도 선배님만큼 기세가 당당하진 않겠습니다그려.”
교연동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지난번에야 얼렁뚱땅 그리되었다지만, 이번만큼은 초휴 저놈이 무도종사를 상대할 실력이 있는가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때 동제곤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제 곧 오시가 되면 개산제가 시작된다. 하필 이런 때 무력충돌을 빚는 건 여러모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해서 누가 들을세라 한껏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교형과 같은 노강호가 한참 아래 후배와 드잡이질을 하면 어쩌겠다는 거요?”
“흥, 난들 저깟 놈을 상대하고 싶어 이러는 줄 아시오? 저놈이 연거푸 나를 조롱하며 내 위엄을 깎아내리려 든단 말이오! 내가 당하고만 있으면 내 체면은 누가 챙겨준단 말이오?”
교연동도 꾹 다문 잇새로 반문했다. 동제곤은 초휴와 교연동 사이에 중재자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둘 사이에 시비가 붙어 개산제에 영향을 미치는 걸 원치 않았을 따름이다. 동제곤이 초휴 쪽을 힐끗 본 다음 전음으로 말했다.
“교 형, 내 체면도 좀 생각해 주시구려. 저자를 혼내주는 게 화급을 다투는 일도 아니건만, 개산제가 다 끝난 다음으로 미뤄도 되지 않겠소. 이미 길시(吉時)도 잡힌 마당에 자칫 지체되기라도 하면 다들 이를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일 거요. 게다가 초휴 주변의 면면들을 좀 보시구려. 어린 후배들이긴 해도 검왕성 방칠소에다 천하맹 사소루까지, 하나같이 만만한 놈이라곤 없지 않소. 검왕성이야 저 멀리 서역에 있으니 그렇다 쳐도, 만에 하나 진청제의 제자를 건드리게 되면 그땐 어쩔 셈이오?”
‘진청제’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교연동은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금방이라도 칼을 빼 들 것 같던 서슬 퍼런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서초에서 진청제가 최강 고수인 건 아니다. 그 말고도 막강 고수는 부지기수였으니까. 예컨대 용호산 천사부, 배월교, 좌망검려에 진청제를 능가할 고수가 비단 한두 명뿐이겠는가. 그러나 유독 진청제의 명성이 지대한 이유가 무얼까.
다름 아닌 무지막지한 그의 철권(鐵拳)과 무소불위의 패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강호인이 그럭저럭 강호의 규칙을 지키려 하는 데 반해, 진청제는 규칙이고 나발이고 간에 무작정 주먹부터 휘두르는 거로 유명했다.
교연동이 순간의 패기로 용호산은 어찌어찌 올랐던 적은 있어도, 천하맹에 가서는 반 마디도 섣불리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자칫 사소루를 건드리는 날엔 진청제를 상대해야 할 판이니 교연동이 움찔할 수밖에. 이번에는 초휴도 들으랍시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흥! 오늘은 동 가주의 얼굴을 봐서 내가 참으리다. 그러나 저놈이 앞으로도 계속 내 앞에서 똥오줌 못 가리고 깐족댄다면 그땐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요!”
하지만 얄밉게도 초휴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아예 교연동을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그는, 무도종사의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교연동과 동제곤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초휴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장담컨대, 교연동은 말만 사나울 뿐, 방칠소 혹은 사소루가 신경 쓰여서라도 함부로 굴지는 못할 터였다.
* * *
개산제에서 제사를 올리는 대상은 하늘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했다. 상고시대 대겁난 이후 서초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이고 곳곳에 흉수가 들끓었다. 사람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무공을 익힌 무사라도 산속 깊이 들어가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작금의 서초가 이 정도나마 사람 살 만한 환경을 갖추게 된 건, 지난 수천수만 년에 걸쳐 선인들이 힘겹게 개척한 덕분이라 할 것이다.
해서 매번 개산 작업에 들어갈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길을 만들어준 선인들의 노고를 기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동가 뒷산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거대한 제사상들이 군데군데 차려져 있는 게 보였다. 동가의 혈통들이 그 앞에 늘어서 있었고 객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제사상은 여염집에서 볼 수 있는 소, 돼지, 양 등을 요리해 올린 상차림이 아니라, 하나같이 살기 등등한 호랑이, 표범 등과 같은 살아있는 맹수들을 제물로 바친 것이었다.
이때 알록달록 기이한 차림새에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노구의 주술사가 여러 제사상 사이를 파고들어 중앙에 서더니 뜻 모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예스럽고 투박한 춤사위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왠지 모를 처연함을 자아냈다. 이처럼 서초에서는 귀신을 부리고 무술(巫術)로 미혹하는 비법이 성행했는데, 이는 배월교의 성취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비록 동가가 구대 세가의 일원으로 정도 종문에 속하긴 하나, 이처럼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제례의식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정성껏 신봉해왔다. 늙은 주술사는 춤을 추는 와중에도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노래를 불러댔다. 그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가자 사납게 몸부림치던 맹수들이 희한하게도 길들인 애완동물처럼 순하게 변했다.
그러자 예리한 칼을 들고 있던 동가의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맹수들의 피를 빼내기 시작했다. 맹수들은 간간이 몸에 경련을 일으켰을 뿐, 아무런 반항의 몸짓도 없었다. 그저 자기 몸속의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만 볼 뿐이었다. 이윽고 주술사의 노랫소리와 춤사위가 멎은 데 이어서, 몸속 피를 전부 잃은 맹수들의 사체가 한가운데로 옮겨졌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모아둔 사체 더미가 대번에 핏빛 부적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이 신묘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광경 앞에서 동제곤이 술 사발을 허공에 받쳐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술을 하늘에 바치오니, 부디 동가의 이번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보우하소서.”
그가 내력을 터뜨리자, 사발 속에 담겨있던 술이 허공에 뿌려졌다.
이어서 땅에도 술을 부으며 그는 외쳤다.
“이 술을 땅에 바치오니, 부디 동가의 이번 작업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도록 보우하소서.”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의 선혈 한 방울을 술잔에 떨어뜨리며 묵직이 말했다.
“이 술을 조상님 전에 바치오니, 부디 동가가 세세 대대로 흥성할 수 있도록 보우하소서.”
세 번째 술잔까지 바친 다음 그가 근엄히 선언했다.
“이로써 개산제는 끝났소이다. 여러분, 아무쪼록 순조로운 작업이 되길 바라오.”
곧이어 동가 사람들을 이끌고 앞장선 그는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초휴 일행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인파를 따라 태곳적 모습 그대로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섰다.
서초의 숲은 동제나 북연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란 거목들인지는 몰라도, 여러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 굵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십여 장, 아니 심지어 수십 장에 달하는 높이로 쭉쭉 뻗어 있었다.
하늘까지 솟구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숲 안이 보이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다. 그러고 보니 개산제 때 동가 사람들이 온갖 도구들을 지참하고 있는 이유를 알 듯했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 모 구역을 대충 정리한 후 이곳이 안전하다든지, 또는 뭔가가 발견되었다든지 등을 공지하는 표식을 남기는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구역의 거목들을 베어내고 길을 내고 표식을 박으면, 그때부터 그곳은 동가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북연 및 동제에 비하면 서초 세력들 간의 경쟁은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 물론 더러는 쟁탈전도 벌였지만, 기본적으로 서초에는 주인 없이 남아도는 땅이 워낙 많았다. 필요하면 남과 경쟁할 필요 없이 자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개산 작업을 해서 땅을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저 원시림 속에 도대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여러 가지 사나운 독충과 맹수 종류는 그나마 애교에 속한다. 제일 골칫덩이가 바로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사악한 존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