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487)
487화 진청제의 등장
동제곤이 청산유수와도 같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것과는 달리, 워낙 말주변이 없는 사소루는 얼굴이 벌게진 채 딱히 반박할 말도 못 찾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깨고 고막도 찢을 우렁찬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동제곤, 네놈이 뭔데 감히 누구 체면을 봐주고 자시고 떠들어대는 건가? 좁아터진 소갈머리 주제에 간덩이 한번 크군그래.”
그 말소리에 이어서 벼락이 줄줄이 내리꽂히는 듯한 굉음이 뒤따랐다. 다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나무들이 잇따라 쓰러지는 가운데, 흑영 하나가 질주해오고 있었다. 번개라도 치듯, 빛의 속도로 단숨에 사소루 앞에 도착한 흑영은 놀랍게도 웅크린 자세만으로도 사람 키의 높이인 흑호(黑虎) 한 마리였다.
흑호가 귀티마저 흐르는 장엄한 모습으로 사소루 앞에 꿇어앉더니 의젓하게 앞발을 내밀어 그의 등을 툭툭 쳤다. 마치 그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거대 흑호의 출현에 대경실색한 사람들과는 달리, 사소루의 눈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서초의 원시림에서 이와 같은 흑호는 극히 드물다. 위압감을 자아낼 만큼 빠른 속도에다, 사소루와 이처럼 친근한 정경을 연출할 수 있는 흑호는 세상에 단 한 마리뿐이었으니, 다름 아닌 천하맹 맹주 진청제가 친히 키우는 영수(靈獸)였다.
아니나 다를까. 흑호가 나타났던 방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쏠린 순간, 사람 그림자 하나가 나는 듯한 보폭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가 여유롭게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무려 수십 장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은 몸에 붙는 검은 장포 차림에다, 두 팔은 드러낸 채 금빛 찬란한 용 문양의 보호장구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햇볕에 반사된 표면의 용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연신 꿈틀대는 착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누가 봐도 범상치 않았다.
허리에는 팔 보호장구와 같은 문양과 속성의 허리띠를 차고 있었고, 시뻘건 망토가 바람을 받아 펄럭였으나 사악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없는 패기.
이 한마디면 형용이 끝날 그자의 기세는 다가올수록 더 짙어졌고, 이에 사람들은 점점 숨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천하맹 진청제, 철권 한 쌍으로 천 리 강산을 평정했다던 전설의 진청제(陳靑帝)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나타난 순간, 다들 그의 숨 막힐 듯한 기세에 짓눌려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정신도 없었다.
진청제의 등장에 사소루도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라, 죄라도 지은 양 떠듬대며 물었다.
“사, 사부님, 어찌 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원래 진청제가 이번 개산제에 오길 원치 않아서 대신 자기가 온 것이었으니, 사소루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진청제가 담담히 답했다.
“네게 준 백벽도(百辟刀)를 쓰지 않았더냐? 네가 그걸 사용하면 내가 감지할 수 있게끔 미리 거기에 인호(印號)를 남겨두었다. 기껏 힘들게 키워낸 제자가 밖에서 뭔지도 모를 것들한테 비명횡사라도 하면 내 손해가 막심할 테니 말이지.”
그제야 사소루도 어찌 된 상황인지 알 듯했다. 아까 분묘 안에서 진청제가 주었던 호신용 무기들을 사용했었는데, 거기에 그가 남긴 인호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얼핏 무정하게 들릴 수도 있을 말이었지만, 이미 그의 거친 언사에 습관이 된 사소루는 자기를 걱정하는 사부의 진심 어린 애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일로 진청제까지 끌어들일 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동제곤과 동가 노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진청제가 없을 때야 패도니, 우격다짐이니 하며 잘도 말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까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침묵만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가 막 입을 열려는 데, 진청제가 돌연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왼손으로는 흑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영수는 애완 고양이인 양 눈을 가늘게 뜬 채, 머리까지 흔들어가며 주인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자기를 쏘아보는 진청제의 눈빛에서 태산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극강의 압박감을 느낀 동제곤은 자기도 모르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진······.”
하지만 그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청제가 손을 내저으며 입을 막았다.
“당신이 내 체면을 뭘 어찌해주고, 내가 규칙을 뭘 어쨌다고? 아까 얼핏 들으니 나에 대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골라 하던데 말이지, 내가 뭘 그리 내 맘대로 했다는 거요?”
“진 맹주,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보고 나서······.”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청제가 성큼 한 발 내딛자, 발밑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면서 반경 수백 장으로 균열이 퍼져나갔다. 누가 보면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을 터였다.
뒤이어 그가 일권을 내지르자 세상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라도 된 양 정지하나 싶더니, 주위 모든 게 그 위력 아래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과연 말로만 듣던 귀신도 참살하고, 강산도 쪼개버릴 파괴력이 아닌가.
정색하며 수중의 장검을 치켜든 동제곤이 별자리를 따라 무수한 검망을 수놓았다. 하지만 그의 검세는 완전히 펼쳐지기도 전에 진청제의 일권에 파훼 되고 말았다. 뒤이어 강기가 와해되고 병기가 부서지더니, 동제곤 본인마저 일권에 맞아 수십 장 밖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날아가는 와중에 연달아 열 그루도 넘는 거목과 부딪혀 줄줄이 쓰러뜨리고서야 가까스로 멈춰 설 수 있었다. 왈칵 피를 토하는 그의 모습은 중상을 입은 게 확실했다.
진청제가 가공할 일권을 거두며 그에게 비웃듯이 말했다.
“이제야 좀 제정신이 드는가? 당신이 뭐길래 감히 내 체면을 봐주니 안 봐주니 떠들어대지? 쓰레기 같은 당신 체면 따위를 나는 절대 챙겨줄 생각이 없다. 하긴 당신 따위에게 챙겨야 할 체면이나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의 일권은 좌중의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렸다. 명색이 같은 무도종사 간의 대결이 아닌가. 그런데 동제곤이 진청제의 일격에 종이 인형처럼 맥도 못 추고 나가떨어지다니!
애당초 그의 기량이 진청제의 한주먹거리도 안 되었던 모양이다. 연신 피를 토해대는 동제곤의 모습에 어느덧 수치감이 분노로 변한 노야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네 이놈, 진청제! 감히 우리 동가의 영역에서 네가······.”
하지만 이번에도 진청제는 상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번쩍하며 몸을 날렸다. 하위 실력 무사들은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건만, 어느샌가 그는 노야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급습당할 위기에 놓인 노야가 창졸간에 양손을 결인했다. 명색이 무도종사급 노강호가 돼서 유사시 꺼내 들 비장의 패 한두 개 정도가 없겠는가.
이윽고 점점이 빛나던 별빛이 하나하나 응집되며 진세를 형성했다. 하지만 진청제가 파리라도 때려잡듯 일장을 내리침과 동시에 강기가 파괴되며 별빛도 꺼져버렸다. 이어서 오른손으로 노야의 목을 잡자, 팔 보호장구 표면의 용 문양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진세라도 형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노야 전신의 진기 흐름을 차단하여 그의 몸을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게 만들어 버렸다. 뒤이어 진청제가 그의 목을 움켜잡은 채 위로 들어 올리자, 저항할 힘도 없는 그의 양다리가 맥없이 늘어졌다.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긴 노야를 노려보며 진청제가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노친네, 지금 뭐라고 했나! 여기가 동가의 뭐라고? 구대 세가 중 동가 하나쯤 없어져도 대신 들어갈 가문이 수두룩한 세상이야. 어디 한번 말해 보시지. 여기가 내일도 여전히 동가 땅이리라는 보장이 있을 거 같나?”
일권에 동제곤에게 중상을 입힌 진청제는 노야도 일 초로 제압했다. 말로만 듣던 진청제의 파괴력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을 본 중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대부분 무사에게 있어 무도종사는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런 존재가 둘씩이나 진청제의 수중에서 어린아이 취급받으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허정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냉정하고 침착해서가 아니라, 감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였다. 조금 전 동제곤의 편에 서겠노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청제가 나타나서 보여준 무력시위에 혼비백산해서 오금조차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진청제를 지그시 바라보던 초휴는 그가 머지않아 진화련신의 경지에 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도 진화련신 문턱에 한쪽 발을 걸쳐놓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 마도 연맹 당시, 위서애는 배월교 산귀를 상대로 일 초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물론 지금 진청제의 실력이 위서애 만한 경지에는 아니었고, 동가의 두 무도종사 역시 배월교 구대 신무제의 일원인 산귀만 못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당시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진청제의 출수 두 번으로 현장의 공기는 완전히 압도당한 상태였다. 튕겨 나간 충격으로 피를 토한 동제곤도, 도살장 개처럼 매달려있는 동가 노야도 감히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진청제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노야는 방금 그 말이 단순히 협박을 위한 으름장이 아니라, 수틀리면 정말로 그리될 거라는 경고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동가와 천하맹 모두 서초에 있었지만, 실제로 왕래할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왕래를 꺼려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전자는 이미 오랜 세월 전승되어온 구대 세가의 일원이고, 후자는 밑바닥에서부터 굴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당당히 서초 무림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해서 동가는 줄곧 천하맹에 대해 경원하는 태도를 견지하며 가급적 부딪히는 일이 없게끔 몸을 사려왔다.
지금껏 동가는 진청제가 하는 짓에 패도적인 측면이 있어도, 강호의 기본적인 규칙과 상식은 지키는 인물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오늘 보니 이건 단순히 패도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감정의 기복이 널을 뛰는 건 물론이고, 한번 눈이 뒤집히면 눈에 뵈는 게 없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마디로 일 처리 방식이 미치광이나 진배없었다.
사실 진청제는 자기가 정말로 동가를 쓸어버리면 과연 나머지 여덟 가문이 그에게 따지러 올 것인지, 천하맹이 그 일로 인해 타격을 입지는 않을지, 또 서초 무림이 어떤 시선으로 천하맹을 볼지 등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당장 눈이 뒤집힌 그에게는 다음 같은 극단적인 생각만이 가득한 듯했다.
‘내게 복종하는 자는 흥할 것이오, 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할 뿐이다!’
어쨌든 진청제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겪은 이상, 노야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진 맹주, 이 일은 확실히 우리가 경솔했소. 우리가 잘못한 게 맞소.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구려.”
노야가 이 치욕적인 말을 내뱉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중인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수치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동가 무사들은 개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험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더러는 체면을 챙기지 못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저렇게까지 비굴해지면 어쩐단 말인가! 이건 완전히 자기 체면을 진흙탕에 내던진 것도 모자라, 발로 마구 짓이기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 이 수모가 사방팔방으로 소문이라도 퍼지면 앞으로 어찌 얼굴을 들고 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