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01)
501화 섭인룡의 속셈
“데려와라.”
백한천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하자, 잠시 후 백가 하인을 따라 정청으로 들어선 초휴가 백한천을 향해 공수를 올렸다.
“백 성주께 인사드립니다.”
순간 백한천의 눈에서 남청색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초휴를 향했다. 그러나 초휴는 심마륜전대법을 극한까지 펼쳐 천절지멸이혼대법의 힘과 융합시켰다.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처럼 강대한 정신력은 백한천이 내뿜은 빙백신목의 힘을 압도해 버렸다.
극북표설성의 무공은 아주 기이하여 주로 근접전에 특화된 포악하고 맹렬한 무도였다. 백씨의 비전 무공 중에 빙백신목 같은 정신 비법이 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많은 사람이 빙백신목은 백씨 일족의 무공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의심하곤 했다. 왜냐하면 백씨 일족이 주로 수련하는 무공에서는 이런 정신 비법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한천이 무도종사라 해도 정신력의 강약으로만 놓고 보면 지금의 초휴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정신력을 거둬들인 초휴는 쉰 소리로 웃었다.
“빙백신목은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그러나 저는 손님으로 여기 왔는데, 백 성주께서는 늘 이런 식으로 손님을 맞이하십니까?”
“물론 우리 극북표설성은 손님을 후대하오만, 손님이라 해도 규율은 지켜야 하오. 가면을 쓰고 기운을 위장하여 정체를 숨기는 것은 손님의 도리가 아닐 듯한데?”
그 말에 초휴는 공수를 올렸다.
“백 성주께서 양해해 주시지요. 제 신분이 워낙 민감하여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면을 벗는다면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겁니다.”
백한천은 코웃음을 쳤으나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은마권의 상황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강호에는 적지 않은 은마 일맥이 숨어 있었다. 낮에는 정도의 대협이거나 큰 문파의 제자로 활동하다가 밤이 되면 마도의 잔당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그걸 대놓고 들춰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은마는 너무 깊이 숨어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의심만 만연해지고 적은 찾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이 계속 숨어 있겠다면 그냥 둬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작은 속임수나 쓰는 것으로는 큰일을 이루기 어려운 법이니까. 마교에 독고유아 같은 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 한, 어둠 속에 숨은 쥐새끼들이 어찌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겠는가. 그리고 그 독고유아는 몇천 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었으니, 다시 나오기가 어디 쉽겠는가? 천하의 대세란 들고 나는 바닷물과도 같은 법, 지금은 마도에서 강하게 나올 수 있는 세월이 아니었다.
해서 백한천은 그저 코웃음 쳤을 뿐, 초휴에게 정체를 드러내라고 더 압박하지는 않았다.
“나와 은마 세력은 서로 간섭하지 않던 사이인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은마권이 아니라 기련채를 대표하여 온 것입니다.”
백한천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기련채? 기련채가 은마권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장 떠나시오. 기련채는 우리 극북표설성과 묵은 원한이 있는 데다가 지금은 취의장에 쫓기는 중이잖소. 그런 판에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소?”
옛날 북연 조정이 북연 무림 세력과 연합하여 북방 삼십육대도를 멸망시켰을 때, 가장 큰 힘을 보탰던 세력이 극북표설성이었다. 기반이 북지에 있기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엄격하게 말하면 극북표설성과 기련채가 원수지간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초휴는 담담하게 말했다.
“원한은 이미 지나간 일일 뿐, 기련채에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 일을 백 성주께서 신경 쓰실 필요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련채 일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취의장은 한창 기세가 올라 있습니다. 기련채를 박멸하고 요동군을 점유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가서 북지까지도 목표로 삼고 있다는 말이 있더군요.”
“흥! 뭘 좀 알아냈다고 불을 좀 붙여볼까 하고 오신 게로군. 그래 봐야 소용없소. 이번에 우리 땅에서 소란을 일으킨 자들은 취의장 연맹 휘하의 군소 세력일 뿐, 취의장 자체가 아니오. 다 같은 북연의 종문인데, 우리 극북표설성이 그 정도 작은 일로 취의장과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 있겠소? 취의장이 해명 한마디만 해도 무마될 일이오. 극북표설성과 취의장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고 싶어서 온 거라면 나를 바보로 생각한단 말이 될 테지.”
취의장과 극북표설성은 둘 다 북연의 대종문이고, 거리도 그리 먼 편이 아니었다. 전에도 마찰을 겪긴 했으나 자주 있는 일이었고 규모도 작았으므로 곧 잠잠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백한천은 취의장이 경계를 넘어왔다는 말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초휴의 도발에 넘어가 취의장과 사생결단을 낼 생각은 없었다.
“백 성주, 저는 이간질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성주께서야 조용히 계시고 싶겠지만 취의장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천년 전통의 극북표설성으로서야 세력 확장에만 몰두할 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의 기반을 잘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취의장의 역사는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합니다.
섭인룡은 자신이 죽기 전에 충분한 기반을 쌓고 싶을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취의장은 반드시 세력을 넓혀야 하는 상황이란 거지요.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제 말에 오해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정 믿기지 않으시면 백 성주께서 직접 취의장을 찾아가 따지시면 어떻겠습니까. 경계를 넘어와 분탕질한 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를 해보시란 거지요.
그들이 규율을 어긴 자들을 벌해도 좋다며 순순히 내줄까요? 취의장이 그 요구를 수락한다면 제가 이간질하러 온 것이 맞을 테니 당장 쫓아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 말이 사실이라면 백 성주께서는 취의장의 야심을 드러낸 이때, 숨통을 눌러 죽일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 우리와 손을 잡으신다면 극북표설성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초휴는 더 군말하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알려준 뒤 몸을 돌려 떠났다. 그 태도로 봐선 싸움을 붙이려는 뜻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뒤에 남겨진 백한천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 정도 꼬드김에 가볍게 넘어갈 그는 아니었으나, 지금 취의장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백한천은 섭인룡을 찾아가서, 도대체 어떤 속셈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초휴의 말대로 섭인룡을 만나러 간다면 필경 얼굴을 붉히고 헤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백한천은 알지 못했다.
만일 초휴가 아니었다면 백한천은 백금호 정도 되는 인물을 보냈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휴의 말을 듣고 취의장이 대체 어쩔 셈인지 직접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도종사 두 사람이 이런 일로 만나서 시시비비를 가린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양측 모두 체면을 따져야 하는 위치가 아닌가. 직접 얼굴을 맞대는 순간 물러날 여지는 없어지는 것이다.
초휴가 생각하기에, 취의장은 백한천이 요구하는 수준의 해명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르기 이전에, 섭인룡이 백한천 앞에서 한 발짝도 아니고 반 발짝이라도 물러나는 순간 취의장 연맹은 불안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맹이 아닌가. 대세를 따라 한몫해 보려는 자들이 오로지 이익만 보고 모였다. 한 번이라도 좌절하게 되면 결과는 처참할 터였다.
초휴가 떠나고 나자 백무기가 비웃었다.
“저 마도인의 말이 옳은 것 같은데요. 취의장의 콧대를 눌러 줄 때도 됐습니다. 이대로 두면 섭가 부자는 자기 성씨가 뭔지도 잊어버릴 것 같으니까요. 섭동류는 한패선을 스승으로 모신 뒤부터 기고만장한 상태고, 취의장도 점점 공격성이 강해지고 있단 말이죠. 이런 때에 우리가 방호의 기련채와 손을 잡는다면 취의장에는 큰 타격이 될 겁니다.”
백무기와 섭동류는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용호방에서는 백무기의 순위가 섭동류의 뒤였으나, 북연 땅만 놓고 보면 백무기의 명성은 섭동류에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백무기가 심백의 검에 중상을 입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 사이, 섭동류는 북연 무림의 거두 한패선을 스승으로 모셨다. 해서 두 사람의 명성에는 큰 격차가 생겼고 이제는 북연 사람들조차 대부분 섭동류가 백무기보다 한 수 위라고 보기에 이른 것이다.
백무기는 심백에게 중상을 입은 뒤로 예전의 오만함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자신이 섭동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실력은 심백보다 못했고, 심백을 폐해 버린 초휴보다 떨어지는 것도 맞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음험한 계략이나 꾸미는 섭동류보다야 못하겠는가.
백한천은 손을 내저었다.
“무기, 너는 너무 충동적이구나. 과격하게 나서야 할 때가 있고 신중하게 살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충돌할 때가 아니야. 내가 취의장에 가서 섭인룡과 이야기해 보겠다. 섭인룡도 바보는 아니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겠지.”
백한천이 그렇게 말하자 백무기와 백금호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백한천이 극북표설성을 장악한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니, 당연히 헤아린 바가 있지 않겠는가.
* * *
요동군, 북지의 작은 성 근처에 한 저택이 있었다. 본래 기련채가 잠시 은신하던 곳이었으나 얼마 전 이곳을 알아낸 취의장이 기련채 잔당들을 박멸한 후 임시 거처로 삼고 있었다.
저택의 큰 누각 창가에 섭인룡이 흰 여우 모피를 두르고 정좌해 있었다. 탁상에 팔팔 끓는 차를 올려 둔 그는 설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십여 세에 강호에 뛰어든 섭인룡은 온갖 험악한 일을 겪었고, 반평생 동안 책략과 다툼을 반복한 끝에야 취의장의 기반을 이만큼 쌓을 수 있었다. 배반을 당하기도 했고, 자신이 타인을 배신한 일도 있었다. 이제는 은원과 시비를 가릴 수 없게 된 지 오래지만 말이다.
옛날 취의장에서 협의를 행하고 마도를 박멸하겠노라 결의하던 청년 호걸 섭인룡이 언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뱃속에 모략이 가득한 속 검은 취의장 장주일 뿐이니까.
섭인룡은 창밖에 흩날리는 눈꽃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고 있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번 북방 삼십육대도와의 싸움에서 섭인룡은 큰 흐름만 이끌었고 자잘한 일은 모두 섭동류가 알아서 처리하게 했다.
노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섭동류가 완전히 취의장을 장악하고 강호에서 충분한 명망을 쌓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취의장이 북연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수천 년을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아들 섭동류는 충분히 잘 해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고, 섭인룡의 기대를 뛰어넘은 감마저 있었다.
장승정이나 종현, 방칠소 같은 강호의 청년 준걸들은 든든한 뒷배에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그 자리까지 갔다. 맨손으로 일어선 인물은 초휴 하나뿐이었다. 섭동류에게 천부적 자질은 없었으나 섭인룡은 개의치 않았다.
세상일의 칠할은 사람에게 달렸으나 나머지 삼할은 하늘에 달린 법이다. 자신이 직접 악착같이 다투지 않아도 삼할의 천명을 지니고 있으면 결국 성공하는 것이다. 섭인룡 자신만 해도 젊은 시절에는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리석은 젊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화육방의 취의장 장주가 되지 않았는가? 섭동류의 출발 지점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아들이 이뤄낼 성취도 그보다 더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누군가가 누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섭동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섭인룡 앞에 앉더니 입을 열려고 했다. 섭인룡은 손을 내젓더니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당황할 것 없다. 큰일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허둥댈 게 뭐 있느냐? 차부터 마시고 천천히 말해 보아라. 명심해라. 앞으로 취의장주가 되면 누구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희로애락과 마음의 동요는 감추고 얼굴에 내보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