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13)
513화 초휴만의 법상
이번 일전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패착은 임엽을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을 과대평가한 데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니 그다음 단추들이 줄줄이 잘못 끼워졌다. 이제 최락의 무리는 저승문이 바짝 다가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야 매복 공격만으로 임엽을 금세 처치할 수 있을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이제 그들의 생살여탈권마저 임엽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 * *
초휴가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음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모호했으나, 야차처럼 시뻘건 두 눈만은 너무도 선명했다. 초휴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마기가 표표히 피어올랐다. 물론 그들도 어떻게든 대항할 궁리를 했지만, 그 마기가 한 사람씩 몸을 휘감을 때마다 감전이라도 된 양 움찔하며 기혈을 뺏기고 죽었다.
그들이 뺏긴 기혈들이 마기와 한데 섞여 초휴의 주위를 에워쌌고, 죽어 쓰러지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그 섬찟한 기운은 한층 더 짙어졌다. 한마디로 그들의 눈에 비친 초휴의 모습은 마신의 재림과 다를 게 없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이들이 뒤늦게야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자 초휴가 최락을 덮쳤다. 다른 놈들이야 보내줘도 주모자만은 이곳에 뼈를 묻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락이 이를 악물며 수인을 결하자 찬란한 강기와 함께 족히 수천 송이에 달할 기이한 꽃송이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강력한 강기의 파동이 장전된 꽃송이들이 초휴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공세에 맞서 초휴는 아까 비축해두었던 기혈로 진옥명왕(鎭獄明王)의 법상을 응집해냈다. 뒤이은 그의 일격과 함께 최락의 공세는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낸 최락은 피를 뿜으며 경악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맹강이 일신에서 강렬한 금빛 광망을 터뜨리며 기혈까지 태워내니, 그 모습이 영락없는 거령신(巨靈神, 산도 쪼개고 물길도 가를 괴력을 가졌다는 전설 속 신)의 화신처럼 보였다.
맹강이 초휴를 덮치며 외쳤다.
“최 형! 어서 가시오!”
그러자 주위에 아직 남아 있던 무사들도 자기만의 비장의 절기를 사용하며 맹강과 함께 초휴를 공격했다. 비록 뼛속까지 소인배인 최락이어도 진정한 벗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변에 적만 잔뜩 만들며 분란만 일으키고 다니던 괴팍한 맹강이 그중 하나였다. 최락은 친구 하나 없던 맹강에게 친절히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맹강이 사고를 쳤을 때도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가면서 이를 해결해주곤 했다.
최락이 진심으로 자기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맹강은 그를 유일한 친구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맹강은 인의도덕(仁義道德) 가운데 ‘의’만 빼고 세 가지가 다 결여된 인물이었다. 태생부터 착하고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도적으로 생활할 때는 길가는 상인들을 많이도 죽였었다.
그런 인물이었지만 평생 의리만은 꿋꿋하게 지켜왔다. 적어도 군영 시절에 아군을 배반한 적은 없었고, 산적질을 하던 때도 같은 산채의 형제를 팔아먹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곤경에 빠진 이 순간에도 역시 ‘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있었다.
초휴의 눈빛에 냉기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아까 마혈대법으로 비축해두었던 기혈의 힘이 오롯이 실린 진옥명왕인이 격출되었다. 산도 쪼갤 그 위력에 맹강의 양팔이 으스러졌고 천인합일보다 하위 경지의 무인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 처참한 광경에 최락은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과 슬픔을 느꼈다. 이들이야말로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진정한 벗들이 아닌가. 그들을 영입할 당시 함께 취의장을 나눠 갖자고 했던 말은 단순한 사탕발림이 아니었다. 최락은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반평생 이룬 거라곤 없이 강호를 떠돌다 보니, 이런 생활을 접고 안주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후대를 위해서, 그리고 이 진실한 벗들을 위해서 자기만의 기반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애당초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맹강이 초휴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때 최락은 여기서 도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그는 피 끓는 노호성을 터뜨리며, 자신의 손을 심맥 한가운데 꽂아 선혈이 철철 흘러나게 했다.
그 피는 바닥을 적시기가 무섭게 사람 키만큼 거대하고 핏빛 선연한 꽃 한 송이로 응집되었다. 꽃잎이 발하는 핏빛 광채는 잔인할 만치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꽃은 불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피안화(彼岸花)였다. 황천길에 피어 망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고 알려진 꽃이었다.
탐스럽게 핀 피안화가 죽음의 기운을 발하며 초휴를 덮쳐왔다. 이는 최락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힘으로, 지옥에서 끌어온 힘이기도 했다. 피안화의 그 거대한 꽃잎 아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혈기가 사그라지고 마기도 흩어져 소멸했다.
초휴로서는 간만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그저 단순히 사력을 다한 비법이 아닌, 동귀어진할 각오가 분명한 살초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초휴 등 뒤에 어려있던 진옥명왕의 법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진장한 혈기와 마기가 유입되더니 진옥명왕이 부처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대자대비함과는 거리가 먼,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든 섬찟한 모습의 부처였다.
대거 유입된 마기는 부처 수중의 마도를 형성했는데, 얼핏 그 외양이 초휴의 천마무와 흡사해 보였다. 이 마도를 든 핏빛 부처가 바로 초휴만의 고유 법상인 살생마불상(殺生魔佛相)인 것이다!
그가 일도를 내지르자 천지의 마기가 이 도날에 응집되어 단번에 피안화를 동강 내버렸다. 처참히 조각난 그 꽃은 무수한 별빛만 점점이 남긴 채 밤하늘로 사라졌다.
이때 탈진해 쓰러진 최락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가까스로 마지막 힘을 다해 맹강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려고 입술을 뗐으나 끝내 소리 내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맹강은 그 입 모양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도망쳐!’가 아니겠는가.
소리 내 하지 못한 말을 끝으로 최락은 숨졌다. 피안화는 오직 자기가 죽어야만 피워낼 수 있는 죽음의 꽃이었다. 이 초식을 최락은 반평생에 걸쳐 수련해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해보기도 전에, 자신의 황천길을 장식하는 데 쓰고 말았다.
맹강도 도주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멍하니 넋을 놓은 채, 최락의 시신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살생마불상을 거두어들인 초휴가 번쩍하며 맹강 앞에 나타나더니 담담히 말했다.
“당신들의 의리에 탄복을 금치 못하는 바요.”
대개 이런 말을 하면 그 뒤에 ‘그 의리를 높이 사서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소’ 같은 소리가 튀어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초휴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을 내뱉었다.
“그토록 끈끈한 의리로 맺어진 당신들을 갈라놓는 것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니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한시에 죽게 하는 인정은 베풀어 드리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휴가 맹강의 심맥을 내리쳤다. 맹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상황에서 저항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잠시 맹강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곳을 떠났다.
초휴에게 있어 이 세상에는 자기가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의리는 실로 높이 살 만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자기를 죽이려 한 그들을 살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감지력을 거의 잃다시피 한 상태로 그 많은 사람의 협공을 상대했으니, 체력의 소모가 극심한 초휴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해서 일단 원래의 기량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물론 지친 와중에도 그 많은 일신의 무공 가운데 뜻밖에도 대금강신력을 대성하여 본인만의 법상을 만들어 낸 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원래 초휴는 무도종사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법상을 응집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대운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생각지도 못하게 살생마불상이 탄생했다. 대금강신력이 육신의 수행에 초점을 맞춘 무공이긴 하나, 궁극적으로 그 진정한 정수는 바로 이런 법상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왕년의 대금강신력 창시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숭고하기 그지없던 불가의 정통 무공이 초휴의 수중에 떨어져서 이처럼 사악하게 변질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 * *
초휴가 은신하여 실력 회복에 힘쓰고 있는 동안, 최락 무리의 몰살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전에 죽은 자들이야 대부분 어중이떠중이 오합지졸들이었으니 별문제였다. 하지만 최락 등의 이름값은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화공자’ 최락, 묘옥관의 관주 묘현진인, 그리고 ‘거령장’ 맹강 등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북연에서 쟁쟁하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그런 고수들이 다른 십여 명과 더불어 일거에 임엽에게 몰살당한 것이다.
이는 임엽의 수급을 손에 넣어 팔자를 고쳐보려던 많은 이들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제야 그들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애당초 임엽이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면 섭인룡이 뭣 하러 장주 자리를 현상금으로 내걸기까지 했겠는가. 아무리 아들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었어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결정을 섭인룡이 내렸다고 보기에는 뜬금없게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락 등이 뜻도 못 이루고 죽었어도 나름 공덕을 쌓은 셈이었다. 그들이 몰살당한 덕에 결과적으로 불길 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던 우매한 중생들이 생각을 고쳐먹었으니 말이다.
이때 취의장에 머물던 섭인룡은 그 소식을 듣자 분개하여 화병, 탁자, 의자 등등 방안 세간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미친 듯이 집어던졌다.
“실패했다! 또 실패다! 대체 그 임엽이란 놈은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모가지는 대체 몇 개나 달렸길래 그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도 죽일 수가 없더란 말이냐!”
광분한 장주의 모습에 취의장 제자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눈치만 볼 뿐이었다. 더 없이 이성적이고 희로애락도 섣불리 드러내지 않던 장주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섭동류가 죽은 뒤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어찌나 성격이 포악스럽게 변했던지, 가까이 다가가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한참이나 물건들로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섭인룡이 버럭 소리 질렀다.
“취의장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 마도 새끼를 죽이고야 말 테다! 당장 원길을 잡아 와. 그자더러 계속 놈의 위치를 추적하라고 해. 그리고 청룡회에도 사람을 보내라. 가서 달라는 대로 비용을 치르고 놈을 죽여달라는 청부를 하란 말이다!”
이에 나름 용기 있는 제자가 나서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직언했다.
“장주님, 어렵더라도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원길대사는 이미 이곳을 떠났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북연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청룡회의 규칙을 장주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전 같으면야 청룡회에 의뢰를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임엽의 위상은 그때와는 천양지차입니다. 그런 자를 죽여달라고 하면 무도종사를 죽이는 것에 버금갈 거액을 저들이 요구할 겁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살수가 놈에게 죽는 날엔 그들이 칼자루를 바꿔 잡고 우리를 겨눌 게 아닙니까. 장주님, 부디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섭인룡은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후에도 여전히 광포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섭인룡은 냉정을 되찾는 게 시급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키운 금쪽같은 외아들을 죽인 흉수가 지금 유유히 북연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이런 판국에 어떻게 냉정을 유지할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