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24)
524화 상고시대의 비밀
초휴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던 매경령은 불현듯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이에 한껏 드러냈던 기세를 거두며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실력이 충분하다면야 누군들 숨어서 쥐 노릇이나 하고 싶겠어요. 오늘 안류년의 태도를 그대도 봤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그를 결딴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이렇게 참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인들 편하겠어요? 초휴, 그대도 이제 은마권 사람이니 은마권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알리라 믿습니다. 지금 은마권은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시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만약 예전의 초휴가 방금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적질을 했으면, 필경 매경령의 매운 손에 뼈도 못 추리고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좀 전 방살을 패퇴시켰던 초휴의 위세를 생각하면 이제 그가 자기와 동등한 자격으로 대화할 인물임을 그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으름장을 놓는 대신, 조곤조곤 자상한 말로 그를 이해시키려는 것이었다. 마도 출신은 정도 출신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라서 실력 앞에서는 숙이고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영웅이 시대를 만들고 시대를 영웅을 낳는다는 말도 있지요. 모름지기 시기라는 건 언제 올지 모르는 법이니,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겁니다.”
초휴는 그녀와 몇 마디 더 나눈 후 관서에서 조용히 대기하겠다며 돌아갔다. 소범천으로 들어가기 전에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놓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뒤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매경령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육진, 너는 대체 어떤 자를 은마권에 끌어들인 거냐?”
그녀는 자기가 초휴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오늘 일로 한 가지 확실해진 건 초휴가 언제까지고 남 밑에 고분고분하게 머물 위인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느덧 뼛속까지 스며든 그의 야심은 표정에서도 적나라하게 읽혔다.
맨 처음 초휴를 만났을 때는 그럭저럭 그를 통제하는 게 가능했다. 오죽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으면 매경령과 무상마종이 그를 장기적으로 육성할 생각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소문없이 지금의 경지까지 이르더니, 어느새 그녀와 감히 맞먹을 수 있는 입지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일이 정파에서 일어났으면 존장도 몰라보고 방자하게 군다는 질책을 받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명마와 은마를 막론하고 마도에서는 무엇보다도 실력이 중요했고, 그 외의 체면이나 예법 등 형식적인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해서 방금 초휴가 보인 태도에 매경령은 그다지 분노하지 않았다. 초휴에게 그럴 만한 실력이 있음을 인정한 때문이다. 다만 초휴가 너무도 급작스럽게 돌변한 건 마음에 걸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초휴가 지금 딱 그렇지 않은가.
방금만 해도 초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종잡기 어려웠다. 이건 결코 섣불리 상대할 인물이 아니잖은가. 초휴의 존재가 현 은마권에 있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하늘만이 알 터였다.
매경령은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원래 은마권 자체가 용과 뱀이 섞여 있는 진흙탕과도 같은 곳이다. 솔직히 말해서 은마권 전체를 통틀어 섣불리 상대할 만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 야심만만한 초휴 하나가 추가되었다고 해서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음마종은 오래전부터 그녀 하나만 살아남는 파국을 맞았다. 그녀는 지금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만도 바쁜 처지였다.
초휴는 육진이 데려왔으니, 장차 초휴로 인해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무상마종에 책임을 지우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때 초휴 역시 매경령이 그 복잡한 표정 뒤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찜찜하지는 않았다. 오늘 보란 듯이 그녀에게 한 방 먹인 것은 일부러 한 일이었으니까.
* * *
관서지부로 돌아온 초휴는 소범천 열쇠가 든 함을 열어 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소위 ‘열쇠’라는 게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인지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규칙한 형상의 기이한 돌덩이로, 어디에선가 일부가 떨어져나온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소범천 열쇠라는 물건은 울퉁불퉁한 돌조각에 불과했다. 표면에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이하다고 표현했던 이유는 그 돌조각이 단단해도 여간 단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험 삼아 힘주어 쥐어봤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단단해서 강기까지 써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천마무로 두어 차례 내리쳐보기까지 했건만 실낱같은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다. 그러니 기이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조각을 들고 궁리하던 초휴는 여봉선을 찾아갔다.
낭인 무사들 사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거기 들어갈 자격이 되는 대문파들 사이에서는 소범천이 대단한 비밀 축에 들지 못했다. 그러니 굳이 여봉선한테 쉬쉬할 일도 아니었다.
소범천에 관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대로 말한 후, 초휴가 수무상 무리에게 돌조각을 보이며 물었다.
“그대들이 살았던 상고시대 때 소범천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소? 이런 걸 본 적은 없나?”
수무상을 비롯한 네 명은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생존해왔으니, 지금의 무사들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을 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수무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상고 대겁난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갇혀버렸기 때문에 그 후의 일에 대해선 잘 모르지. 확실한 건 상고시대에는 소범천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요.”
이렇게 말한 수무상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초휴의 수중에서 돌조각을 건네받아 유심히 살펴보고 물었다.
“도창(刀槍)으로 찔러도 안 들어가고, 물과 불도 스며들지 않고, 강기로도 깰 수 없는 게 확실하오?”
초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무상이 더듬대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건…… 범천계비(凡天界碑)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거요. 하지만 범천계비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 부서졌을까?”
“범천계비라니 그게 무엇이오?”
“범천계비가 그냥 범천계비지.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오. 당신한테 ‘소범천’이라는 지명을 듣고, 또 이 돌조각의 특이한 재질을 보니 나도 범천계비가 떠오른 거요. 상고시대 때 서쪽 끝 최고봉인 천창산(天蒼山) 정상에 돌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지. 그 표면에는‘상범천(上凡天)’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소. 그런데 그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는 아무도 몰라. 힘의 파동도 전혀 없었고 말이오. 심지어 ‘상범천’이 무슨 의미인지도 다들 몰랐어.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그 비석이 범천계비라고 불리게 된 거지. ”
수무상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돌조각을 초휴에게 돌려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상고시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범천계비에 대해 알아내려 했소. 힘의 파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도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신병으로도 흠집 하나 내지 못했지. 셀 수 없이 많은 고수가 시험 삼아 출수도 해봤지만 역시나 아무 효과가 없었소. 지금 그 돌조각 색깔이 당시의 범천계비와 똑같은 데다 그 견고한 특징까지 고려할 때, 십중팔구 범천계비에서 깨져나온 조각인 게 틀림없소. 하지만 그 견고한 범천계비가 이처럼 산산이 깨졌다니, 우리가 갇혀있는 동안 바깥세상에 무슨 큰일이 있었던 걸까? 그 상고 대겁난이라 불리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나 보군.”
초휴는 말없이 돌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상고시대는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미지의 시대로 남겨진 모양이다. 심지어 상고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줄을 유지 중인 수무상 무리도 모르는 것이 있을 정도라니 말이다.
“그럼 아까 당신이 말했던 서쪽 끝 천창산은 어디에 있소? 그런 곳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상고 대겁난 이후 세상이 송두리째 변해버렸으니, 아마도 지금의 세상과 내 기억 속 세상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상일 거요. 지형의 변화가 생기지 않고 그대로일 만한 곳이 몇 군데나 될지 모르겠군. 대략적인 위치만 말하자면 아마도 지금의 동서 곤륜산이 있는 곳 즈음이 아닐까 싶은데.”
수무상의 답변에 초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옆에서 말없이 있던 여봉선이 돌연 공간 비전함에서 돌덩이 하나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건 초휴가 가진 것과 형상만 다를 뿐, 색깔이 똑같은 돌덩이였다.
초휴가 당황하여 물었다.
“여 형,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소범천이 삼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고는 하지만, 그곳과 관련된 규칙, 진입 방법 및 각종 금기사항 등에 관한 정보들은 이미 외부인들에게 알려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열쇠 대부분은 이미 강호 정상급 세력들이 골고루 나눠 가졌고, 그 외 밖으로 흘러나간 열쇠는 극소량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봉선이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아닌가. 초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켜지자 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일전에 서초에 갔을 때였어. 해가 진 후 길가에서 쉬고 있는데, 웬 놈들이 떼를 지어 누군가를 죽이려고 뒤쫓고 있더라고. 원래 강호의 일이라는 게 시시비비 가리기도 어렵고, 쫓기던 자도 딱히 도와달라고 하지 않길래 나도 모른 척하고 있었지. 그런데 누군가를 쫓던 그 무리가 나까지 죽여서 입막음하려 들지 뭔가. 해서 별수 없이 놈들을 죄다 죽여 버렸지. 그런데 쫓기던 자는 이미 중상을 입어서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어. 그가 이것을 내게 주더니 입 한번 못 떼고 숨졌다네. 나야 이게 뭔지도 모르고 내내 갖고만 있었는데, 이게 보물일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걸!”
이번에도 초휴는 할 말을 잃었다.
운이라는 건 본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허공의 공기와도 같은 것이건만, 어째서 여봉선한테는 늘 실체가 있는 양 붙어 다니는 걸까. 이쯤 되면 그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어 섬찟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무상 등은 이를 보고 환호했다. 그들로서는 주군의 행운이 곧 자신들의 행운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지난날 여온후가 패하고 살해당한 후 진령마저 갇히는 비극을 맞았던 데에는 자신의 불운한 운명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불운이 쌓여서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가 빚어진 셈이니, 그런 상황에서 천하무적이 아닌 이상 처단되지 않고 무사하면 되레 이상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환생한 여온후는 이처럼 운이 좋으니, 그들이 크게 기뻐할 만도 했다. 초휴가 놀랐던 가슴을 추스르며 말했다.
“마침 여 형에게도 열쇠가 있으니, 우리 둘이 여기서 함께 대기하면 되겠네. 소범천이 열릴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야.”
원칙적으로는 삼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고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날짜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 시차는 고작 며칠에 지나지 않는지라 문제 될 건 없었다.
얼추 소범천이 개방될 즈음이 되면 주요 세력 및 풍만루 정보원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강호 곳곳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즉시 사람을 보내어 점검케 했으니 말이다.
* * *
이 무렵 위군 상망산 모처의 특이할 것 하나 없는 숲속.
산의 형체가 일렁이며 비틀어져 보이는가 싶더니 영기(靈氣)가 대거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가뜩이나 울창하던 숲이 영기에 젖어 더욱 울창해 보였다.
위군 쪽의 변화는 삽시간에 세간에 알려졌다. 이곳에서 소범천이 열리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