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4)
“귀장의 소장주인 섭동류 공자를 뵈러 왔소이다.”
장백도가 공손히 대답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응대했다.
“공자께서 양해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소장주님은 지금 여러모로 공사다망하셔서 만나기 힘드십니다.”
사실 섭동류는 별로 바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유명 인사이다 보니, 평소에도 그와 만나길 원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다 만나주면 본인의 수련에 지장이 있기에 일단은 이렇게 거절하고 보는 것이다.
장백도는 다시금 공손히 청했다.
“나는 정말 급한 일로 소장주를 뵈려는 것이오. 아무쪼록 파산검파의 장백도가 만나길 청한다고 전해주시구려.”
그 제자는 장백도가 파산검파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접견실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소장주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장백도를 접견실로 안내한 제자는 섭동류에게 보고하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문파 출신의 무사가 섭동류를 만나려면 굳이 만나줄 필요가 없었지만, 칠종팔파에 속하는 파산검파의 제자라면 섭동류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취의장(聚義庄)의 한 서재에서는 남색 도포 차림의 준수한 외모를 가진 젊은이가 권법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한 그는 칼과 도끼로 깎아낸 듯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다만 가끔 입가에 어린 미소는,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그의 예리한 기세를 가려주었다. 그 덕분에 남들 눈에는 전체적인 인상이 매우 온화하게 보였다. 이 젊은이가 바로 취의장의 소장주인 ‘능운포우(凌雲布雨)’ 섭동류(聶東流)였다.
섭동류는 ‘능운포우’라는 별호로 불리었다. 별호는 대개 강호의 동료 무사들이 붙여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원래의 이름에 비해 좀 더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름은 틀리게 불러도 별호를 잘못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별호에서 ‘능운’은 그가 익힌 무공을 가리켰다. 그는 젊디젊은 나이에 이미 부친 섭인룡의 건곤능운수(乾坤凌雲手)를 상당한 경지까지 터득한 상태였다. 또한 ‘포우(布雨)’는 섭동류가 일을 행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덕을 입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강호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하며 말하길, 섭동류의 의로운 성정은 자기 부친을 닮아 그런 것인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행하는 협행은 그가 진정한 협객이라고 부르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포우(布雨)’ 또 다른 의미는 섭동류 본인의 능력과 관계가 있었다. 일찍이 그는 의형제를 맺은 강호의 벗들과 힘을 합쳐, 갖은 악행을 일삼는 흑운십팔채(黑雲十八寨)를 궤멸시켰다. 당시 지휘를 맡았던 그는 마치 구름을 일으켜 비를 뿌리는 도술에 버금갈 만한 탁월한 전술을 펼쳐서, 백 명 남짓한 인원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흑운십팔채를 처단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한 번의 승전으로 섭동류는 단숨에 풍만루 용호방의 육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강호 최대 정보조직인 풍만루는 강호의 정상급 세력들을 대상으로 서열을 매겼을 뿐만 아니라, 용호방(龍虎榜), 풍운방(風雲榜), 지존방(至尊榜)이라는 세 가지 영역별 순위표도 작성해 공개한 바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 세 종류의 순위표를 ‘용호풍운지존방’이라고 통칭해서 부르기도 했다.
이중 ‘용호방’은 규정상 마흔 살 이하의 젊은 무사에 한했는데, 풍만후는 일 위에서 백 위까지 순위를 적은 표를 만들어 공개했다. 이 순위표에 오른 젊은 세대의 준걸들은 하나같이 용과 호랑이의 상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용호방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풍운방’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 우리가 탄생했다’라는 의미로, 연령 및 무공에 제한이 없고 실력도 따지지 않는 대신, 천하의 정세에 영향을 줄 만큼 강호에서 명성을 얻은 인물이면 순위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마도의 거물급 우두머리, 정도 문파의 고수, 무기제조의 대가 등이 올랐다. 심지어는 황족 출신에 무공이라고는 무공의 ㅁ자도 모르는 일반인도 올라있었다. 단, 이 순위표에는 상위 오십 위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한편, 지존방에는 단 열 명만이 올랐다. 순위표의 이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 오른 자들은 하나같이 한 시대의 강호 구조,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최강의 실력자들이었다. 말 그대로 ‘지존’에 위치한 자들이 실리는 순위표로 너무도 실력이 쟁쟁한 나머지 풍만루도 감히 순위를 매기지 못했다. 그저 강호 전체에서 공인을 받은 존재들에 한해서만 순위에 오를 자격이 주어졌다.
현재 지존방에는 이름을 올린 자는 여덟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나마 이름을 올렸다는 자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그마치 천 년 전 인물인 곤륜마교(崑崙魔敎)의 교주 독고유아(獨孤唯我)와 삼청도문(三淸道門) 중 진무교(眞武敎)의 장문인 ‘선인(仙人)’ 영현기(寧玄機)였다.
당시 이 두 거물이 엄청난 혼전을 치른 후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간 강호에서는 누가 첫 번째이고 누가 두 번째인지를 둘러싸고 툭하면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아직도 그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취의장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과는 달리, 섭동류의 서재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취의장의 소장주라 해도 좋고, 용호방의 서열 육위인 젊은 준걸이라 해도 좋았다. 어떤 호칭으로 불리건, 이게 다 섭동류 본인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 결과임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취의장의 소장주라는 칭호는 그저 허울뿐인 감투일 뿐이니 말이다.
외부 사람들은 모를 수 있으나 섭동류 본인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취의장은 결코 섭씨 가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난날 부친과 의형제 결의를 맺었던 네 사람이 모두 고인이 되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엄연히 자손들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섭동류가 그만한 그릇이 못 된다면 강호의 규칙에 따라 그 자손들에게도 취의장을 물려받을 자격이 똑같이 주어지게 된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격 미달인 사람이 소장주를 찾아왔을 때는 절대 그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규칙을 취의장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나름 중요한 인물이 찾아왔겠거니 하고 그는 짐작했다. 그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제자가 들어와 보고했다.
“소장주님, 파산검파의 장백도라는 자가 소장주님을 뵙길 청합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장백도?”
그는 장백도가 누군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의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강호에 알고 지내는 젊은 준걸들이 워낙 많은 탓이었다. 섭동류는 취의장이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널리 불러 모으는 것을 어려서부터 봐왔다. 따라서 그 또한 취의장의 취지에 따라 인맥을 쌓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고로 소매가 길면 춤추기도 좋다고 했으니,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을 받기에도 유리할 터. 따라서 왕년에 그가 지휘하며 흑운십팔채를 무너뜨렸던 강호의 젊은 준걸들 역시 취의장의 인맥이 아닌 그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동원된 이들이었다.
잠시 후, 섭동류가 그 이름을 생각해냈다.
“기억이 나는군. 그는 파산검파의 장로, ‘비추부(悲秋賦)’ 잠부자(岑夫子)의 제자야. 파산검파에서 정상급 인물은 아니어도 내문 제자 축에 들긴 하지. 저번에 아버님 대신 파산검파 장문인의 생신 축하연에 갔을 때, 말을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어. 진중한 사람으로 보여 인상에 남았었지.”
“제가 접견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겠다.”
섭동류가 읽고 있던 권법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무렵 장백도는 마치 죽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찻잔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저, 초조하게 섭동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섭동류와 안면이 있기는 하나, 그저 파산검파 장문인의 생신 축하연에서 인사말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라서 친구 사이라고 부를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만 아는 사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섭동류가 정의로운 자라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이번에 자신이 부탁할 일은 강호에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취의장의 힘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살인을 종용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이를 섭동류가 받아들일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들어선 섭동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장형이 아니시오? 저번에 파산검파에서 헤어진 이후로 못 뵈었군요. 장형의 사부님께서도 강녕하시지요?”
그러자 장백도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평안하십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백도가 입술을 깨물더니 섭동류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장주, 어려운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지금 북연 전체를 통틀어 날 도와줄 이가 소장주 하나뿐이구려. 해서, 이렇게 송구함을 무릅쓰고 온 것이니, 아무쪼록 날 좀 도와주시오. 그러면 소장주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소이다.”
장백도가 자신을 보자마자 큰절부터 하자 섭동류는 어안이 벙벙했다. 장백도는 젊디젊은 나이에 선천경에 오른 대문파의 내문 제자였다. 그렇게 콧대 높은 자가 자기한테 큰절을 올린 것도 모자라서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니, 부탁하려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섭동류는 선뜻 승낙하겠다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섭동류가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자 부드러운 한 줄기 내력이 장백도의 몸에 스며들어 그가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장백도는 깜짝 놀랐다. 이 젊은 소장주는 어느새 어기오중의 내강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연체삼경(練體三境, 쉬체경·응혈경·선천경을 일컬음)과 어기오중 사이에는 엄연히 분수령이 존재하기에, 어기오중에 이른 자는 어디를 가든 고수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지금 섭동류는 장백도보다도 몇 살이나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엿한 고수로 인정받을 실력에 오른 것이다.
섭동류가 장백도의 어깨를 털 듯이 툭툭 치며 말했다.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소이다. 나 섭동류의 곁에는 수하라고는 없소. 다 같은 친구일 뿐이라오. 장형과는 오래전에 보고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군요. 힘든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보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껏 도우리다.”
섭동류가 반드시 돕겠노라고 확답을 한 것도 아닌데, 장백도는 이 말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직 많이 가까워진 사이가 아님에도 이처럼 친절하게 나오니, 장백도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 그간의 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에이기지 못한 장백도는 결국 이야기를 울분으로 끝맺었다.
“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소. 멸문의 원수에게 복수를 못 한다면 이깟 무예를 익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장백도의 말을 들은 섭동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선천경 무사 혼자서 한 가문을 멸문시켰다고?’
사실 강호에는 그런 짓을 저지를 능력이 되는 선천경 무사들이 많다. 섭동류 본인도 그런 일쯤은 쉽사리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흉수가 젊디젊은 나이였다고 하니 섭동류는 더더욱 의아했다. 섭동류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형, 걱정 마시오. 이 일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소. 다만 장형도 보다시피 지금 취의장에 일이 잔뜩 밀렸구려. 하룻밤만 여기 묵었다가 내일 다시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장백도가 분별없는 위인은 아니었기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섭동류는 장백도가 나가자 사람을 불러 산양부 장씨 가문의 멸문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게 했다. 이곳 북연에서 만큼은 취의장의 정보력이 풍만루보다도 대단했다. 이곳을 드나드는 무사들이 정보를 하나씩만 물고 와도 그게 상당한 양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섭동류의 수하가 상세하기 그지없는 정보들을 잔뜩 입수해왔다.
끝
ⓒ 봉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