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584)
584화 결정적 한 방을 노리다
바닥에 즐비한 시신을 본 허행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임엽! 홍풍곡에서 그렇게 많은 인명을 죽이고도 성에 안 차 여기까지 와서 악행을 저질러? 네놈은 인과응보가 두렵지도 않더냐? 강호에 악명높은 종사급의 노마두(老魔頭)들도 이렇게까지 도를 넘지는 않는다!”
지금 허행은 정말로 뼛속까지 분노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파산까지 임엽을 추적한 이유는 그리 순수하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지난번 소범천에서 당했던 걸 앙갚음하려는 사심이 어느 정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도 불종의 수행자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불같아서 문제이긴 해도 엄연히 마음에 부처를 모신 승려인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을 떠나서 이와 같은 참극 앞에서는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최근의 마도에서도 임엽처럼 오만방자한 마두는 좀처럼 드물었다. 그간 워낙 마도가 약세를 면치 못한지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여하튼 잘 알려진 마도의 거물급들도 감히 이렇게까지 함부로 굴지는 못했다.
예컨대 육 선생과 같은 무상마종 출신도 잊을 만하면 강호에 분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분명한 목적을 띠고 특정 상대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파급력은 제한적이었다. 이처럼 무차별적인 살육전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지난번 홍풍곡에서 벌어졌던 참극만도 강호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관련 세력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건, 하나하나씩 순서대로 처단하는 것보다 실제 사망자 수가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파급효과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했다.
초휴가 담담히 응수했다.
“인과? 말씀 참 잘하셨소. 내가 지금 그놈의 인과를 매듭짓느라 수고 중인 게 안 보이시오? 저들의 선조가 저지르고 안 갚은 빚을 이제 내가 받아내겠다는데, 이처럼 당연한 이치가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리고 허행대사, 귀하가 자비를 베풀어 돌봐야 할 중생은 여기 말고도 수두룩할 텐데? 매년 강호에서 복수로 인해 죽어 나가는 무사들의 숫자가 얼마인 줄이나 아시오? 아마 홍풍곡에서 내 손에 죽은 자들의 천배 만배는 족히 될 거요. 하지만 대사께선 그런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유독 나한테만 트집을 잡고 따지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오?”
“불종은 인과를 중시하고 더욱이 대광명사에는 인과선당까지 있다던데, 정작 귀하는 인과의 중요성을 이리도 모르니 참으로 답답하구려. 오늘 향가의 멸문을 끝으로 삼백 년 전 맺었던 원한은 종지부를 찍었소. 우리 은마는 더는 당시의 일을 문제 삼지 않을 거요.”
“그런데도 귀하가 계속 우리 은마를 물고 늘어진다면 양측 간 충돌이 격화되지 않겠소. 급기야 불마대전(佛魔大戰), 아니 정마대전으로 확대될지도 모르지, 그러면 결국 또 얼마나 또 많은 살상이 벌어지겠는가 말이오.”
“그리되면 허행 당신은 큰 죄인이 되는 거요. 정도 무림 전체에 죄를 지은 죄인 말이외다! 그 싸움에서 죽어 나갈 자들과 관계된 모든 업보를 모조리 당신이 지게 될 텐데 두렵지도 않소?”
나삼총이 넋 나간 듯 임엽의 입을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그는 개인적으로 임엽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던 참이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저 막강한 실력에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또한 그의 구미에 딱 맞았다. 중간에 어떤 과정을 거치건 간에 종국에 가서는 화끈한 살육전으로 일을 끝내는 임엽의 방식은 중독성마저 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저 현란하고 표독스러운 말주변이야말로 명불허전이 아닌가! 그는 임엽의 끝이 없는 매력에 정신이 다 몽롱해질 정도였다.
다만 지금 그의 머리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임엽의 실력이면 저런 화상 정도야 단숨에 처리하고도 남으련만, 뭣 하러 시간을 소모하며 길게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건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임엽의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생각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허행도 임엽의 허를 찌르는 독설에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 대광명사 산하의 삼대선당과 육대무원 중 무원이 왜 무원이겠는가. 그냥 무력만 쓰면 되는 곳이니까 무원인 것이다.
해서 삼대선당에 비해 육대무원의 입문요건은 훨씬 단순했다. 그저 독경을 능숙히 하고 계율만 잘 익히면 들어가서 수련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와는 달리 삼대선당의 경우에는 천부적인 깨우침이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해야 입문 자격이 주어졌다. 아등바등 노력만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해서 무원 출신인 허행의 경우, 아무래도 머리를 쓰는 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불염을 지펴 사마외도를 처단하는 게 그가 가장 자신하는 방식인 것이다.
“터진 입이라고 되는대로 잘도 갖다 붙이는구나! 임엽, 그 독사 같은 혀로 여태 무수한 사람들을 잘도 현혹해 왔는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한다. 지난번 소범천에서는 내가 잠시 부주의하다가 당했다마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없을 것이다!”
말이 끝나자 허행의 일신에서 불염이 크게 솟구치더니 임엽을 덮쳤다. 족히 수백 장 반경은 밝히고도 남을 그 불광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웠다.
초휴는 가면 속에서 맥빠진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저토록 머릿속이 단순한 자를 상대로 이치를 따지는 건 참 피곤한 일이었다. 곧 죽어도 자기가 옳고 잘났다는 자들과는 소통 같은 걸 해볼 여지 자체가 없지 않은가.
방금 초휴가 했던 말은 그냥 허투루 둘러댄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다가는 위서애 등의 개입이 불가피해진다. 이는 두 사람 간의 신뢰 관계가 그만큼 끈끈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의 위상이 그 정도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위서애가 인정한 정통 마도의 계승자이자 은마권 전체에서 가장 촉망받는 귀재다. 그런 그에게 자칫 문제가 생겼다가는 또 한 차례 정마대전이 초래될 소지가 다분했고, 그 규모도 지난번 부옥산 때보다 작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허행의 귀에는 그 누구의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해서 그의 일권에는 한치의 자비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어찌나 불염의 화력이 거셌던지, 몸에 닿기도 전에 마기가 제압되기 시작했다.
달마원 상좌인 허행의 실력은 과연 진검공 같은 평범한 무도종사와 동급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었다. 지난번 소범천에서 그와 겨루었을 때도 패퇴의 연속을 면치 못하다가 막판에 칠마도로 습격해서야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비록 지금 실력이 당시보다는 다소 증강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판세를 뒤집을 만큼 크게 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앞서 칠마도를 출수했던 여파가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였다.
지금으로서는 가급적 허행과의 전면전을 피하는 게 최선이니, 주저 없이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곧이어 천자망기술이 한계 수위까지 시전된 가운데, 무진장한 불광의 공격에 둘러싸인 초휴의 신형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얼핏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나름 허행의 공세를 잘 피하고 있었다.
임엽이 번번이 잘도 빠져나가자 허행이 미간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뇌성벽력처럼 진동하며 울려 퍼지도록 네 차례의 변화를 준 사자후를 터뜨려냈다. 벼락이 내리꽂힌 듯한 굉음과 함께 임엽의 온몸이 뒤흔들렸다.
초휴는 머릿속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몸놀림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천자망기술로 구변사자후의 운용을 간파하는 것까지는 가능했으나 딱히 이를 방어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원신비법도 적잖이 익혔다지만, 그런 유형의 공법들은 대부분 공격 위주라서 방어에는 별 도움이 못 되었다.
허행은 공세를 멈추지 않을 작정으로 만자(卍字)를 결인했다. 인법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사방 천지에 온통 폭음이 울려 퍼지는 기세가 여간 위압적이지 않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지라 초휴도 주위의 마기를 응집하여 살생마불상을 시전했다. 그러자 바닥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향가의 시신들로부터 기혈이라는 기혈은 모조리 마기에 흡착되어 살생마불상의 핏빛 칼날에 유입되었다.
곧이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혈도(血刀)가 한껏 위력을 높여 허행을 내리치자 만자 불인은 파훼는 되었으나 초휴의 몸도 그 충격으로 밀려났다.
“참으로 사악한 무공이구나!”
허행이 코웃음을 치며 널따란 소매를 휘두르자 일거에 엄청난 불광이 터져 나와 살생마불상 의 혈도를 산산이 파괴해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삼총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댔다.
“대인의 실력이 아까보다 약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러자 조승평이 점잖게 설명했다.
“대인이 약해진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 전력 출수를 자제하는 걸세. 공격에 온 힘을 쏟는 대신, 가급적 피해 가면서 결정적 한 방을 노리는 거지. 대인의 무도는 극강의 폭발력을 근간으로 하는데, 저렇듯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본연의 최강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지. 저 화상의 실력이 정말 대단한 모양이네. 대인께서 애써 본인의 약세를 감추며 정면 승부를 피하려 드니 말이야.”
관전하는 사람들 눈에는 확실히 임엽의 힘이 부쩍 떨어진 상태로 보였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막을 수 있으면 막되, 반격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않은가.
심지어 진검공도 우울한 낯빛이 되어 지켜볼 정도였다. 아까 자기와 싸울 때는 온갖 막강한 절기란 절기를 쏟아부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더니, 허행과의 싸움에서는 왜 반격을 할 엄두를 못 내며 맥을 못 추단 말인가.
이때 진검공의 옆에 있던 팽충이 전음으로 말을 걸었다.
“장문, 이 틈을 노려 출수하시지요. 놈이 허행대사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릴 때 기습하면 놈을 죽일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진검공은 주저했다. 체면을 따져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 구겨질 체면이 어디 있다고 체면 타령을 하겠는가.
다만 나삼총과 조승평 등이 파산검파 쪽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비록 무도종사이긴 하나, 저쪽의 실력도 절대 얕볼 수 없었다.
설령 일대일로 못 이기더라도 여차하면 떼로 달려들어 공격해오면, 제아무리 무도종사라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왠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석연찮다는 느낌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엽의 실력이 저 정도로 약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던 그때, 임엽과 허행의 싸움에 변화의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물론 임엽은 여전히 열세이긴 했다. 아까 칠마도를 출수했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만하면 우둔도의 반작용을 순조롭게 억제한 셈이긴 하나, 정신력과 진기에 가해진 소모는 금방 복원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임엽이 무도종사라면 마르지 않는 천지의 힘을 끌어들여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다소라도 힘이 회복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비록 지금까지도 정신력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일거에 판세를 뒤집을 만한 치명타 한 방을 날리는 건 가능할 듯했다. 문제는 기회였다. 어떻게든 결정적인 한 방의 기회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허행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줄곧 피하기만 하는 상대의 지연책에 짜증이 날 대로 난 그는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강력한 한 방을 날려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된 것이다. 순간 허행의 일신에서 다시 거센 불염이 치솟더니 부처의 그림자가 어른대며 내비쳤다.
곧이어 그가 수인을 결하자 가없는 광채가 터져 나와 기이한 범문의 형상으로 응집되는가 싶더니, 임엽의 정수리 위로 강대한 불염이 퍼져나가며 그의 전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었다.
이것은 무슨 특정한 절기가 아니라 그 옛날 불종의 승상인 보리달마가 남긴 일종의 문자로, 얼핏 범문처럼 보일진 몰라도 실제로 이와 대응하는 범문은 없었다.
다만 보리달마가 손수 써서 남긴 문자를 보고 사람들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저마다 각기 다른 깨우침을 얻은 결과물이었다.
허행의 경우는 그 문자로부터 사악함을 멸할 힘을 깨우쳤고, 그 힘이 무진장한 광채를 터뜨려내는 것으로 표출되었으니, 그 위력이 가히 독보적이었다.
초휴는 엄청난 힘을 품은 거대한 범문이 자기 머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피하는 대신 등에 차고 있던 칠마도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분노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