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89)
789화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가
허언이 애도를 표하는 동안 정작 수보리선원 승려들은 줄곧 아미타불만 읊조릴 뿐, 슬픈 기색이라곤 내비치지 않았다. 그 광경에 허언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허언은 이곳 승려들과 왕래하기를 꺼려왔었다. 강호인들은 불문 중에서는 대광명사 화상들만이 급진적이고 편집적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수보리선원의 고행 승들이 좀처럼 남만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들의 진면목을 모르는 탓이 컸다.
실제로 이들과 접촉해보면 정작 이들이야말로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때 허언의 뒤에서 온화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언대사,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시구려. 정선지장 사백은 수보리선원 내에서도 연배가 가장 높은 분이었소이다. 그의 죽음이 애통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불경을 읊어 사백이 조속히 피안의 극락정토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것밖에 없구려. 원래 이 세상은 고해인즉, 부침(浮沈)의 연속이 아니겠소? 정선지장 사백이 못 돌아올 곳으로 떠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해탈을 맞은 셈이오.”
허언이 고개를 돌리자 젊은 승려 한 사람이 보였다.
붉은 혈색이 도는 입술에 새하얀 치아가 돋보이는 영준한 외양은 약관의 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용 문양 가사를 걸친 그가 몽롱한 불광에 휩싸인 채, 서서히 다가오자 허언이 황망히 고개 숙이며 합장의 예를 올렸다.
“나마 방장을 뵙습니다.”
젊은이로 보였던 그 승려는 놀랍게도 수보리선원 당대 방장인 ‘신승’ 나마로, 살아있는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태어나자 상서로운 구름이 내려앉고 부처의 광명이 비쳤으며 백 리 밖에서도 그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고 한다. 이에 선대 방장이 그를 입양하여 키웠다는 것이다.
세 살이 되자 입에서 줄줄 경문을 토해내더니 일곱 살 때는 고승들과 불법을 논했고, 열세 살에는 남만 땅을 떠돌며 인생의 온갖 질곡과 고통을 겪어냈다.
심지어 남만의 한 토착 부족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 섬기기까지 했다. 이처럼 온갖 겁난을 이기고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수보리선원 방장 자리에 올랐다.
허언의 사형인 허자보다 더 일찍 천지통현에 오른 그는 허언보다도 젊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강호 풍운의 향배를 좌우할 지존 급의 인물이었다. 나마는 양손을 합장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불원천리 이 먼 곳까지 정선지장 사백의 유품을 가져다주시다니,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곳에 대사의 거처를 마련해드릴 터이니 며칠 묵다 가시지요.”
“방장 어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 같은 불문 일맥끼리 이 정도 일이 무슨 큰 수고겠습니까. 그리고 대광명사에 일이 많아 속히 돌아가야 하니, 제 거처를 마련하는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비록 대광명사와 수보리선원이 껄끄러운 관계는 아니라도, 이곳에 묵고 가라는 말이 마냥 편하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허언이 그리 말하자 나마도 굳이 붙잡을 명분이 없어 그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작별을 고했다.
* * *
선원으로 돌아온 나마는 영성을 잃은 칠보유리장을 집어 들더니 표면에 남은 도흔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탄식을 터뜨리듯 입을 열었다.
“봉문 중에 내가 폐관에 들어간 사이 정선지장 사백이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사백께서는 십년이 넘게 선원을 나서시지 않았건만 이번에 북연은 왜 가셨던 것이냐? 너희들 중 누구라도 설명을 좀 해 보거라.”
나마의 음성은 마치 평범한 일을 의논하기라도 하자는 듯 무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연배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있는 승려치고 그의 말에 섬뜩함을 느끼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이때 마흔은 되어 보이고, 눈썹과 수염이 희끗희끗하게 샌 승려가 나서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정선지장을 해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그 말씀만 드리지 않았어도 정선지장께서 초휴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품으셨을 리 없으니까요.”
그 승려는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는 별로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굴 여기저기에 주름이 깊게 팬 모습이었다. 소싯적에는 여자들깨나 울리고 다녔을 법해 보이건만, 지금의 그에게는 저물어가는 황혼의 잔영 같은 기운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평생 모진 산전수전을 겪은 것으로 유명한 소마가(蕭摩訶)였다. 초휴가 훗날 수보리선원을 파멸시킬 거라고 점쳤던 바로 그 인물인 것이다.
초휴와 관련된 점괘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닌지라, 그는 정선지장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이 내용을 말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정선지장의 죽음에 자신이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하고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마가가 모든 진상을 죄다 털어놓자 나마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탄식을 토하며 물었다.
“자네가 점친 내용이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소마가가 고개를 들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방장 어른, 이런 일에 어찌 거짓을 꾸미겠습니까. 종문의 안위가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수명을 백년이나 소모하면서 천기를 점치는 일을 제가 왜 했겠습니까. 단언컨대, 제 점괘에는 한 점의 오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광명사의 허정이라 해도 저만큼 정확하게 점쳐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자 나마는 한 번 더 탄식을 토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틀렸다. 틀리게 이해한 것이다. 자네는 평생 인과 고리의 속박에 시달린 삶을 살아왔고 마침내 거기서 벗어난 줄로만 알고 있겠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도 그 속에 갇혀있어. 자네는 수보리선원이 초휴에게 파멸 당하리라는 걸,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결과라고 여기고 있어. 그러나 사실은 그게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될 수가 있다는 점을 간과했네. 우리 수보리선원을 파멸로 몰아갈 엄청난 피의 보복이 만들어질 원인 말이네! 원인과 결과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순환하건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어찌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인과의 천기는 사람의 힘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아니니, 사람의 힘으로 바꾼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
“자네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고, 정선지장 사백은 섣부르게 그 미래를 바꿔보려 했네. 자네나 사백이나 천명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겠지만, 사실 둘 다, 천지간의 인과라는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돌에 불과할 수가 있단 말이네. 이것이 운명이고 겁난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으로 점철된 혼돈의 세상을 그 누가 피해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오래도록 남만에만 머물러 온 덕에 그 싸움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제 그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로 보이는구나.”
말을 마친 나마는 말을 몸을 돌려 가버렸다.
남겨진 소마가의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이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우느니만 못한 허망한 미소를 짓더니 갈라 터진 목소리로 말했다.
“인과 순환 중의 한낱 돌에 지나지 않는 내가, 가당찮게 인과를 바꿔보려 했구나. 허정, 나는 그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사색이 되더니 입에서 분수처럼 피를 내뿜었다. 다른 승려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도움을 거절하더니 제 발로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이제야 잘못임을 깨달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상황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이미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으니, 계속 어그러지는 채로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제 수보리선원은 끝이 없는 시련에 직면할 일만 남은 것이다.
* * *
이 무렵 동제 은마 일맥의 거점에는 대장로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초휴의 죽음은 은마에 있어 심각한 의미였다.
은마의 미래를 맡기려 했던 우수한 제자를 잃었음은 물론, 중인환시리에 눈에서 불꽃이 튈만큼 호된 따귀를 맞은 것이니, 여간 분하고 모멸스러운 게 아니었다.
‘맞은 따귀를 그대로 되돌려 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참고 넘길 것인가?’ 이것이 오늘 회합에서 논의될 주제였다.
위서애와 진조선 등 환허육경에 들어갔다 나온 무사들은 당연히 수보리선원에 대한 복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좀 달랐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발언했다.
“위 옹, 초휴가 죽었으니 당신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고 절통할지는 우리도 잘 아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냉정해져야 하지 않겠소? 상대는 자그마치 남북 이불종 중 하나인 수보리선원이 아닌가. 지존방 칠 위의 ‘신승’ 나마가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복수하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오.”
“그리고 참아야 할 이유가 또 있소. 듣기 껄끄러워도 좀 참아주시구려. 먼젓번 원천방이 대광명사 망념선당 상좌 허도에게 당했을 때도 우리는 복수하지 않고 그냥 참고 넘겼지. 하지만 이번에 초휴 같은 일개 후배가 죽었다고, 은마 전체의 힘을 동원하면서까지 복수에 나선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하는 거요. 우리가 불합리한 결정을 내린다면 아랫사람들도 승복하기 어려울 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서애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뚫어질세라 상대를 노려보았다.
위서애는 시간 대부분을 잠이 덜 깬 양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을 때가 많았다. 햇볕 좋은 날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쯤 해서 한 번 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위서애는 그런 노인네가 아니라, 왕년에 구천산에서 정도 전체에 맞서 싸웠던 오대천마 중 마지막 생존자인 것이다!
“먼젓번이라고 했소? 먼젓번에는 원천방이 먼저 죽을 짓을 한 데다, 자기보다 어린 후배 놈한테 피살당했으니 복수를 한다는 것도 민망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연배도 한참 위인 수보리선원의 중이 새카만 후배를 죽였소. 그것도 아주 심하게 괴롭힌 끝에 죽였단 말이외다. 저들은 우리 은마의 제자를 잘도 죽였건만, 은마는 어째서 저들의 제자를 죽일 수 없다는 거요?”
“당신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내가 왜 모를까. 자기 제자가, 자기 사람이 죽은 게 아니니까 남의 일에 희생되고 싶지 않다는 심보일 테지. 그러나 우리 은마 일맥은 곤륜마교의 후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만에 하나 언젠가라도 교주님이 귀환했을 때 우리의 이런 못난 꼴을 보시면 뭐라 하시겠소! 설령 교주님이라 해도 이런 우리를 후예로 인정하고 싶으시겠는가 이 말이오!”
위서애의 말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입을 다물자, 누군가가 슬며시 운을 떼었다.
“위 옹, 우리가 희생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게 아니오. 우리를 그렇게까지 못난 사람들로 생각하면 곤란하오. 다만 문제는 무의미한 희생까지 감수하기는 어렵다는 거요. 정마대전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천지통현 경지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까먹었소이까? 관건은 과연 누가 신승 나마를 상대할 건가 하는 거란 말이외다. 나마의 출수만 피해갈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가 무슨 정선 뭐시기건, 나부랭이건 간에 과감히 맞서 싸울 거요. 과연 저들의 대가리가 단단한지 아니면 본좌의 천곡마도(天哭魔刀)가 더 단단한지 붙어보면 알겠지!”
이에 위서애가 담담히 답했다.
“나마 말이오? 우리가 못 막는다면 다른 이가 막아줄 테지.”
“누가 나서서 막는다는 거요?”
“야소남!”
좌중은 흠칫 놀라서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누군가 머뭇거린 끝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위 옹, 당신 뜻은 배월교에 가서 부탁이라도 해보자는 소리요?”
“부탁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인 셈이지. 우리가 명마를 상대로 부탁이야 할 수 있나. 이건 엄연히 거래인 셈이오. 지난번 배월교 측에서 우리를 찾아왔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러나 우리 수중에 거래를 위해 내놓을 만한 것이 과연 있겠소? 자그마치 천지통현의 절대 강자에게 출수를 맡기는 것인 만큼, 치러야 할 대가가 어마어마할 게 뻔할 텐데? 저번에 동황태일이 치르마고 약속했던 대가보다 훨씬 더 엄청난 걸 야소남이 요구하면 어찌하오?”
그리 말하는 상대를 위서애는 힐끗 째려보더니 부연 설명에 들어갔다.
“염려 마시오. 초휴는 내 사람이었으니 응당 노부가 좀 더 많이 내놓아야겠지. 야소남을 불러내는 데 필요한 대가는 노부가 치를 것이오. 그러나 수보리선원의 나머지 떨거지들을 상대하는 건 여러분이 맡되, 절대 사정을 봐주지 말길 바라오.”
이에 다들 입을 모아 찬동하고 나섰다.
“그야 물론이오. 염려 붙들어 매시오. 이는 우리 일맥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일인 만큼 우리도 절대 봐줄 생각이 없소.”
위서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그마치 자기 조직의 차기 승계자로 내정되다시피 했던 제자가 죽었다.
만약 방칠소나 장승정이 죽었다면 검왕성과 천사부 측에서 저렇듯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했을까? 이변이 없는 한, 상대와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달려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반면 은마는 직전까지만 해도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고작 복수하자는 제안을 가결 시키는 데만도 대가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주저하느라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로 인한 실망감과 서글픔은 위서애 혼자만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