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90)
790화 피의 빚을 피로 갚다
위서애는 딱 한 사람만 대동하고 배월교를 방문했다. ‘귀룡동주(鬼龍洞主)’ 무마교(巫馬鮫)라는 자였다. 그는 서초 출신으로 평소에도 서초에 머무는 때가 많은지라 배월교와 접촉할 기회가 단연 많은 인물이었다. 해서 위서애가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물론 위서애 혼자 갔어도 ‘위서애’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배월교의 고위층을 만나는 건 일도 아닐 테지만.
위서애가 왔다는 소리에 야소남, 동황태일 및 대제사와 성녀뿐만 아니라, 배월교 내부에 있던 신무제 여러 명도 몸소 맞으러 나와 위서애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사실 마도 전체로 봐도 위서애의 위상은 단연 최상급이라고 할만 했다. 그러니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간 명마와 은마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왔으나 배월교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늘 위서애를 존중해왔기에 반기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구대 신무제의 일원인 산귀 만은 예외였다. 그는 새삼 옛 기억이 떠올라 부아가 치미는 판이었다.
과거 부옥산 정마대전에 앞서 은마와 연맹 결성을 의논하던 자리에서 산귀는 배월교가 마도의 지존이라도 되는 양 한껏 우쭐대며 까불다가 위서애의 일장에 나가떨어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감히 산귀 따위가 그때의 분노를 내색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화풀이는커녕, 입 한번 벙긋할 자격도 없었다.
동황태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위 옹, 우리 배월교에는 어쩐 일로 오셨소?”
“초휴가 죽었소이다.”
위서애의 힘없는 답변에 동황태일이 탄식했다.
“너무 슬퍼 말고 마음을 추스르시구려.”
초휴를 기특하게 생각해온 동황태일도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를 배월교로 영입할 생각도 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초휴를 죽음까지 몰아갔던 현장에 동황태일은 없었다. 그가 그곳에 있었으면 초휴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우진 않았어도 같은 마도 일맥인 만큼, 힘닿는 선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었을 터였다.
배월교 성녀도 표정에 복잡한 심경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녀는 지금도 초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 따위는 영원히 비켜나갈 것만 같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마도 전체를 통틀어 초휴는 그 세대에서 가장 출중한 인재였다. 오죽하면 ‘배월교 성녀’인 그녀의 광휘조차 초휴에게 가려질 기세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초휴에게 반감을 품지 않고 되레 호기심을 품던 중이었다. 무림에서 누가 더 빛나 보이는지는 그녀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서 자기 실력이 초휴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딱히 자존심이 상하거나 약 오를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역대 배월교 성녀들이 죄다 고된 수련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오른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초휴가 죽었다니…….’
성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초휴의 죽음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위서애가 침통하게 말했다.
“노부는 애도하느라 시간만 허비할 생각은 없소. 우리 마도 일맥은 예나 지금이나 피는 피로 씻으며 살아왔소. 우리가 저들 때문에 피를 흘렸으니 응당 우리도 저들의 피를 봐야만 하오! 오늘 노부가 온 목적은 야 교주께 출수를 요청하기 위함이오. 신승 나마를 우리 은마의 실력만으로는 대적하기 힘들어 그렇소.”
동황태일을 비롯해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배월교는 정마대전으로 인한 타격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굳이 이런 때 출수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동황태일이 거절하기도 전에 위서애가 책자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은 독고 교주께서 휘하의 사대 마존을 위해 무도를 해석해두신 수기라오. 야 교주께서 내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감사의 뜻으로 이걸 드리겠소.”
은마에게 다른 건 몰라도 곤륜마교의 유산은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이 수기는 은마 일맥의 것이 아니라 위서애 개인 소유였다.
구천산 오대 천마는 곤륜마교의 진정한 적통 전인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소중히 간직해왔던 것들을 죽기 전에 특별히 위서애에게 남겨주었다. 그러니 그의 수중에 좋은 것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동황태일이 대답하기도 전에 야소남의 호쾌한 답변이 이어졌다.
“승낙하겠소.”
야소남이 독고유아의 무도 경험을 꼭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기와 독고유아 간의 격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다.
위서애가 호탕하게 웃으며 책자를 야소남에게 건넸다.
“야 교주, 과연 화통하시외다! 이로써 나마는 야 교주께 맡기도록 하지요. 나마가 수보리선원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하도록 교주께서 막아주시면, 다른 놈들은 우리 은마가 처리할 것이오.”
용무를 끝낸 위서애는 배월교를 나섰고 야소남도 책자를 받아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입을 다물고만 있던 대제사가 동황태일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초휴가 살해당할 때, 그대는 그 자리에 없었지. 만약 그대가 있었더라면 그 녀석을 도왔을까?”
동황태일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아마 그랬지 싶소. 내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런 놈이 하필 은마에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던 참이었지. 위 옹이 확실히 난 인물은 난 인물이오. 한참 고령인데도 저렇듯 큰일을 벌일 배포를 가진 걸 보면 말이오. 정작 젊은것들은 쥐새끼처럼 잔뜩 겁먹고 움츠리고만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호랑이 새끼를 키우려다 되레 후환거리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안 해봤소? 필경 그놈은 은마 출신이니, 다 같은 마도라고는 해도 우리와는 가는 일이 분명히 다르지 않았겠소?”
이 질문에 동황태일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이 호랑이였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 교주님은 용이 아니오?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용! 교주님이 버티고 계신 이상, 그 녀석이 호랑이건 뭐건 간에 교주님한테야 감히 상대가 될 수 없지. 그만합시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오? 솔직히 말해서 초휴가 죽었건 안 죽었건 간에 배월교 입장에선 어느 쪽도 나쁠 건 없소. 지난번 정마대전에서는 우리 배월교가 주인공이었지만, 이젠 은마가 나서서 한바탕 날뛸 차례구먼.”
동황태일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은마 일맥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고 그 위세가 강호인들의 예상 수위를 훨씬 뛰어넘었다.
* * *
그로부터 보름 후, 은마 일맥에서 이름을 떨치는 강자들이 운집하더니 일제히 남만 땅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복수는 일단 외곽에 있던 수보리선원 무사들 및 그들과 사이가 가까운 남만 부락을 처단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보리선원 화상들은 자력으로 식량 및 생필품을 마련하지 않는지라 민간의 공양을 받아 생활했다. 원래 남만 땅에는 신심을 다해 그들을 섬기는 부락민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물론 그건 대외적으로 하는 허울뿐인 이야기이고, 실상은 수보리선원의 무력 비호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호를 받는 대가로 부락민들은 수련자원 등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부터가 은마의 공격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간담이 서늘해진 남만 부락민들은 집 안에 모셔둔 불상부터 없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마 측이 서슬 퍼렇게 들이닥치면, 수보리선원 화상들과 연을 끊을 것을 맹세하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것이 바로 은마가 노리는 것이었다. 수보리선원을 지탱하는 근간을 최단 속도로 무너뜨리고 그들의 명성을 훼손하는 것!
이에 위기감을 느낀 수보리선원도 재빨리 반격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야소남도 수보리선원으로 향하여 나마와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야소남이 나마를 선원 밖으로 나올 수 없게 압박함에 따라 양측의 싸움은 한층 더 수위를 더해갔다.
물론 나마가 가세하지 못한다고 해서 명색이 남북 이불종 중 하나인 수보리선원이 대책 없이 손 놓고 당할 리는 없었다.
수보리선원은 즉시 소집령을 내려 타지에 있는 모든 고행승을 불러들였고, 선원 내 고수들도 속속 출수하여 본격적으로 은마와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번갈아 승패가 엇갈리는 싸움이었지만, 실제로 손해가 더 큰 쪽은 수보리선원이라고 봐야 했다. 전투 자체가 남만 전역에서 벌어지니, 이렇게 싸우나 저렇게 싸우나 훼손되는 것은 수보리선원의 기반이었으니 말이다.
이 사태와 관련해 무림인들이 취한 입장은 단 하나였으니, 당분간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자그마치 은마의 미래를 짊어질, 그것도 참으로 출중하다고 인정받던 제자가 죽었으니 은마가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은마가 참기만 한다? 그것은 되레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오해받든지, 아니면 그럴 실력과 배짱이 없다고 무시당하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은마 측의 과격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도 무림에서는 저지하려 나서는 세력이 없었다. 그냥 이번 출수를 기회로 은마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말로 통제 불가한 수준까지 사태가 확대되면 그때 가서 연합해 출수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그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피 한 방울이라도 헛되게 흘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강호인들의 예상대로 일정 범위 내에서 통제되었고, 보름 후 양측은 휴전에 들어갔다. 수보리선원의 손실이 막대했으나 은마 측의 손상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계속하면 결국 다 같이 공멸하는 꼴이 될 테니, 양쪽 다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위서애가 준 책자만으로는 야소남을 너무 오래 붙잡아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야소남이 중도에 빠지면, 은마도 감히 남만 땅에서 이렇게까지 계속 기고만장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렇게 싸움이 마무리되고 수개월이 지나자 강호도 어느덧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늘도 언제 비바람이 몰아쳤냐는 듯 고요하고 청명했다.
초휴에 대한 기억은 그와 각별하게 가까웠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원래 강호란 그런 곳이다. 무대에 올라 잠시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곳!
그 누구도 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사라진 사람들은 남은 사람에게 있어 그저 잠깐 스쳐 간 과객에 불과한 것이다.
* * *
동제, 장림군, 제주부, 안평가.
안평가는 제주부를 오가는 무사들이라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크고 번화한 거리다. 이 거리는 병기나 단약, 그리고 진귀한 보물 등을 사거나 파는 이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왕년에 안락왕이 버티고 있었을 때는 안락왕부가 인재를 대우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무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년 전 안락왕부의 몰락을 계기로, 오가는 무사들의 수도 절반으로 뚝 떨어져서 예전의 그 활기찼던 모습을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거리 한곳의 진보각(珍寶閣)이라는 점포 입구에 땅딸보 주인이 축 처진 모습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진보각은 제주부 주요 세력인 오원방(五元幇)의 사업장으로 예전에야 손님들이 성황을 이뤘지만, 오늘은 한낮이 다되도록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해서 한가한 주인은 햇볕이나 쬐며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때 깡마른 체구에 인상도 별로인 중년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주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봐요, 손 영감! 졸고만 있지 말고 이것 좀 보시구려. 내가 좋은 물건을 가져왔단 말이오.”
주인장 손 영감이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며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놈 자식, 이불삼(李不三)!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이 노인네나 놀려 먹으러 온 게야? 네놈 면상을 거울에 비춰보기나 하고 말해라. 좋은 물건이 행여 네놈 차지가 되겠는가 말이다.”
이불삼이 억울해 미치겠다는 듯 악을 써댔다.
“사람을 얼굴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소? 내게 빛 볼 날이 안 온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잊었을까 봐서 다시 말하지만, 이래 뵈도 내가 왕년에 엄청난 거물급을 모시고 제주부 안내를 다녔던 몸이라고. 그 양반이 자금 덩어리까지 내게 줬단 말이오. 차마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집 안에 고이 모셔두긴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손 영감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허풍 작작 떨어라. 네놈이 말한 그 양반은 수개월 전, 비경에서 수보리선원 고승과 싸우다가 죽었다더라. 자금이 있거든 모셔두기만 하지 말고 향불이나 피워주지 그래. 나도 다시 말해두는데, 자꾸 나를 속여먹으려 들었다가는 언젠가 단단히 혼쭐이 날 것이야.”
이불삼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혼쭐은 무슨! 내가 누굴 속였다고 그래? 영감은 누가 속이려 한다고 속는 사람도 아니잖소. 이것 좀 보라니까. 여기에 좋은 물건이 있다고. 자.”
말과 함께 이불삼이 품 안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을 펼치자 비전함 몇 개, 단약 몇 병, 그리고 고철 등이 섞인 잡동사니 몇 가지가 나왔다. 그중 시뻘건 구슬도 있었는데 핏방울을 뭉쳐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핏빛이 선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