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92)
792화 암흑 속 수호령
모처럼 손님이 왔으나 손 영감은 달려 나가 응대를 하기는커녕, 가판대 뒤에 앉은 채 목청만 높였다.
“엽소(葉蕭) 공자 아니신가? 또 치료약을 사러 온 거요?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엽가에서 주는 생활비를 잘 모아뒀다가 수련용 단약이라도 장만하지 그래? 엽가 젊은이들 가운데 공자의 자질이 그리 손색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아직도 응혈경이니, 보는 내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라네. 아무리 약을 쓴들, 쾌차하지도 못하는 아비를 위해 이렇게까지 돈을 들일 필요가 있겠소?”
이에 엽소라고 불린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도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버님을 저리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이 말에 손 영감은 고개를 저었다. 내심 참 구제 불능인 젊은이구나 싶었다.
엽소는 제주부에서 나름 한가락 한다는 엽가의 방계 제자로, 문중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원래 방계 제자도 엄연히 엽씨 성을 쓰는 친족인지라 그들에게도 소정의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해서 생계를 꾸리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엽소의 경우는 부친이 문중 일을 처리하던 중에 피습을 받아 두 다리를 못 쓰는 중상에 심한 내상까지 입은 폐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 엽소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나, 매월 문중에서 지급되는 생활비만으로는 약값을 대기에도 빠듯했다. 손 영감은 가망도 없는 부친한테 발목을 잡혀 본인의 수련이 정체되고 있는 엽소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했다.
부친 수발들기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혈육도 아닌 그가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는 없는지라, 이렇게만 말했다.
“내가 그대의 가정사에 간섭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 그래도 오늘 공자 운이 좋았나 보오. 얼마전에 좋은 물건들이 들어왔거든. 북연 진무당에서 제조된 회혈단인데, 공자에게는 특별히 은자 백 냥에 주지. 이급 단약이지만 약효는 삼급에 버금가는 명약이라네.”
잠시 주저하던 엽소는 결국 은자를 건네며 말했다.
“그럼 내게 세 병만 주시지요.”
그는 은자를 건네다가 웬 핏빛이 감도는 구슬에 손이 닿자, 집어 들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이건 뭐요?”
손 영감은 혈혼주를 힐끗 보더니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딱히 쓸모도 없는 건데, 다른 물건들에 껴서 들어온 거요. 마음에 들면 그냥 가지시게. 병기에 박아 넣으면 보기는 좋을 것 같으니.”
엽소가 그 물건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손 영감도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이불삼에게서 그것을 사들인 후, 대체 이게 뭔가 싶어 고서적까지 들춰본 손영감이었다.
하지만 이것과 유사한 것조차 찾을 수 없길래 자연석 내지는 외부 충격으로 우연히 이런 모습을 갖게 된 돌덩어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대개 비경이 붕괴할 때 공간에 파동이 일거나, 또는 강자들 간의 교전 시 발생한 온갖 힘의 영향으로 평범한 돌조각이나 금속이 기이한 형체를 띠게 되는 경우가 생겨나곤 하는데, 하나같이 쓸모도 없고 돈이 되지도 않았다.
얼마 전 북연 극북지역에서 비경의 붕괴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지라, 손 영감은 이것이 그때의 붕괴로 인해 생겨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보석처럼 휘황찬란한 빛이 감도는 것도 아닌지라 거상들에게 몇 번 구매 의사를 타진해 봐도 번번이 폐물로 간주되며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어차피 팔지도 못하는 것이니 선심이나 쓰는 게 낫지 않겠는가. 단약을 받아든 엽소는 핏빛이 감도는 구슬, 혈혼주도 품속에 챙겨 넣었다.
“고맙소이다.”
* * *
물건을 사 들고 엽가 대문 앞에 이른 엽소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놈의 집구석이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여기서 나고 자라긴 했으나 늘 숨도 쉬기 어려운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행여 누구 눈에 띌세라 조심조심 벽에 붙어 집안으로 들어섰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때 어디선가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엽소 형이 아니신가. 또 병신 아비를 위해 약을 사러 다녀온 모양이네?”
화려한 복색의 젊은 공자가 엽가 제자 몇 명을 뒤에 달고 다가왔다. 실력이 센 편은 못 되지만 그래도 엽소보다는 강한 선천경이었다.
그의 이름은 엽정(葉廷)으로, 이 집안 직계 중 차남이었다. 엽소와 같은 방계와 비교하면 성만 같을 뿐, 처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존귀한 신분인 것이다.
상대가 ‘병신’이라 아비를 비웃자 엽소는 이를 악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도 절로 불끈 쥐어졌지만 차마 내뻗지는 못했다.
반박 한마디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간 수없이 겪었던 경험으로 보건대 지금 자기 실력으로는 상대를 어찌하지 못함은 물론, 욕이라도 했다가는 엄중한 징벌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엽소가 애써 참았는데도 불구하고 엽정은 그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엽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 걸 본 그는 가소롭다는 듯 계속 도발해댔다.
“왜, 한 대 치고 싶어? 쳐봐. 쳐보라고!”
엽정은 우두커니 있는 엽소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뺨을 철썩 때렸다.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 기고만장한 행동을 말리기는커녕,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엽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엽정은 그가 주먹을 들기도 전에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손을 짓밟기까지 했다.
고통을 못 이겨 엽소가 비명을 질러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속을 뒤져 회혈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병을 훑어보며 연신 비웃어댔다.
“회혈단? 엽가에서 네 병신 아비나 치료하라고 다달이 돈을 주는 줄 아느냐? 아 정말, 집안 망신이 따로 없다니까!”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엽정이 단약병을 한옆으로 내던졌다. 약병이 산산이 깨지면서 단약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 참담한 광경에 엽소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땅을 기다시피 하면서 바닥에 흩어진 단약들을 줍기 시작했다.
엽정은 뜻밖에 줍지 못하게 막지 않고, 대신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미친 듯이 비웃어댔다.
“야, 너희들 저것 좀 봐라. 저 새끼 꼬락서니가 꼭 똥 무더기를 파먹느라고 정신없는 동네 똥개 같지 않으냐?”
다른 이들도 신나게 맞장구를 쳐댔다.
“완전 똑같네요. 이공자님이 똥개 같다고 하셨으니 인제 돼지가 되고 싶어도 못 되겠습니다, 푸하하하!”
단약을 줍는 엽소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그는 뭐에라도 홀린 양 부친의 처소를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병으로 바짝 마른 그의 아비는 정신이 혼미한 채로 누워있었다. 내상이 재발하여 거의 온종일 그런 상태로 있었다.
아비를 부축해 일으켜 회혈단을 먹인 엽소는 자기 처소로 돌아왔다. 엽정에게 짓밟혀 더러워진 옷가지를 벗어 던지자 뒤늦게 손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좀 전에 처참히 짓밟혔던 오른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바닥 쪽에서 ‘퉁’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 영감 점포에서 가져온 핏빛 구슬이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은가. 옷을 벗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피 묻은 손으로 구슬을 집어 들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구슬은 그의 선혈에 닿기가 무섭게 핏빛 광채를 발하며 찬란한 빛을 발하더니, 급기야 강렬한 사기(邪氣)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의 봉변으로 제대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그는 구슬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때 엽소의 뇌리에 의문이 요동쳤다.
‘대체 왜?’
엽가 내에서 그리 뒤처지는 실력도 아니건만, 엽정과 같은 직계 제자는 물론 다른 방계 제자들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고 있질 않은가!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자신은 그저 참고만 살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주먹을 들지도 않았고 욕 한번 내뱉지 않았건만, 왜 저들은 매일같이 자기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그가 끊임없이 속으로 부르짖었다.
‘대체 왜냐고? 왜? 왜? 왜?’
“그 이유를 알고 싶은가?”
그의 뇌리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엽소는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구야? 누가 내게 말을 거는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는 대답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저들이 왜 너를 괴롭히는지 알고 싶나? 그건 너의 실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너의 신분이 저들에 비해 보잘것없어 그런 거라고.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퍼주는 사랑은 없다지만, 이유 없이 무턱대고 미워할 수는 있는 법이거든. 인간은 본성부터가 악한 존재라서 그렇다고. 그게 바로 네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이유’야. 저들에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널 괴롭히는 줄 알아? 그냥 괴롭히고 싶으니까 괴롭히는 거지. 너의 신분이나 실력이 어정쩡한 탓에 저들에게 괴롭힐 빌미를 내어준 것뿐이라고!”
엽소는 그 음성의 출처를 확인할 생각도 않고, 마음속에 꾼 누르고 있었던 하소연을 자기도 모르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엽가 전체를 탈탈 털어봤자 직계는 몇 명 되지도 않아요. 방계가 훨씬 많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필 나만 괴롭히는 걸까요? 방계만 수십 명인데, 왜 다른 사람은 다 놔두고 나만 그러냔 말입니다!”
그 음성이 차갑게 웃었다.
“다들 네가 자기들 개 노릇이나 해주길 원하니까 그렇지. 오늘 엽정이 달고 다니던 자들이 어찌 행동하는지를 벌써 잊었나? 그들도 방계인 건 자네와 다를 게 없어. 심지어 자네보다 더 미천한 것들이지. 하지만 저들은 흔쾌히 엽정의 개 노릇을 자처했거든. 주인을 도와 다른 자를 괴롭히는 위치에 선 거지. 그러면 적어도 자기가 괴롭힘당할 일은 없지 않겠나.”
“그런데 자네는 어땠지? 개 노릇을 자청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원치 않았어. 해서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더욱 매몰차게 자네를 괴롭히는 거라고. 한마디로 지금 자네는 개만도 못한 처지로 몰린 것이네.”
그 음성은 세상의 잔혹하고 추악한 모든 것의 결집체가 엽정이라도 되는 양 몰아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엽소는 어디서 들려오는 음성인지 확인할 생각으로 조심스레 방안 곳곳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데 볼 필요 없어. 본좌는 바로 네 앞에 있다.”
엽소는 그제야 핏빛 광채에 둘러싸인 혈혼주에 눈길이 갔다.
‘설마?’
“이게 당신이라고? 뭐 하는 물건이길래······?”
“물건이라니! 하고많은 세월을 거쳤건만 아무도 본좌를 물건이라 부른 자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복수하고 싶으냐? 아무도 너를 괴롭히질 못하게 하고 싶으냐?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고 싶어? 그럼 당장 자네 피를 혈혼주에 떨어뜨려 보게.”
정체 모를 음성에는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흡인력이 있었다. 이에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강호 전설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이유로 영혼이 물건 안에 갇힌 상고 강자들의 사연이 종종 있었다. 어느 평범한 소년이 우연히 이런 물건을 발견한 후, 그 강자의 가르침을 받아 하루아침에 무림을 주름잡는 거물로 성장하여 인생의 정점을 찍고 강호의 전설이 된다는 대충 그런 내용 말이다.
그러나 전설 속 강자들은 하나같이 자상하고 온화한 이웃 어르신과도 같았다. 세심하게 무공도 가르쳐주는 일종의 수호령과도 같은 존재랄까.
하지만 지금 이 음성의 주인공은 잔혹하기 그지없게도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로 봐도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상고의 강자가 할 법한 말 같이는 들리지 않으니, 엽소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소의 속내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음성의 주인공이 괴이쩍게 웃었다.
“왜, 두려워? 당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오랫동안 개만도 못하게 살아온 게 확실한 거 같은데? 그런데 인제 와서 두렵긴 뭐가 두려워? 어차피 개차반 인생인데 그런 인생을 걸고 한번 도박해볼 용기도 없는 건가? 한심하고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