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796)
796화 아부의 기술 (2)
엽소의 모습은 시끄럽기만 한 까마귀들 틈바구니에 홀로 서 있는 고아한 백로처럼 느껴졌다. 해서 손장명의 관심은 자연히 그 백로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턱짓으로 엽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분은 뉘신지?”
엽정 등은 어이가 없었다. 손장명이 왜 갑자기 엽소에게 흥미를 보인단 말인가. 엽정이 머뭇거리는 사이, 엽소가 잽싸게 나서서 대답했다.
“소인은 엽가의 제자인 엽소라고 합니다. 공자님의 위명을 일찍부터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실제로 뵈니 의외로 알려진 바와는 거리가 좀 있으신 듯하군요.”
순간 엽정 등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말인즉슨, 손장명이 이름값도 못 하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뜻인가?
‘저놈이 하필 여기서 우리를 죽게 만들기라도 할 셈일까?’
‘엽가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했나?’
하지만 손장명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부쩍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그렇소? 좋소이다. 그럼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본 공자가 대체 어떤 점이 그렇다는 건가?”
“강호인들이 말하길, 당대 용호방 준걸들 수준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더이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공자님을 직접 뵙게 되니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세인들은 대개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고 합니다만, 저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생각하지요. 지난 용호방 준걸들이 강호에 풍운을 일으킬 때 공자님은 가문의 지엄한 분부에 따라 은인자중해야 했고, 불가피하게 시대의 주류에서 한발 물러나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예전과 같은 난세도 아닙니다. 이처럼 불리한 악조건을 딛고 용호방 십 위에 오르는 쾌거를 거두셨으니, 소인은 진심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거리가 있노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강호인들이 공자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말씀이지요.”
손장명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이거 좋은데? 아주 좋아! 엽가에 모처럼 명철한 제자가 나타났구먼. 뭐, 죄다 맞는 말이긴 하나, 본 공자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문중 어르신들께서 워낙 안정 제일을 추구하시니, 나도 가문의 일원으로서 응당 그에 따라야지 어쩌겠소. 작은 불만을 참지 못해 자칫 큰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낭패일 테니 말이지. 내 일신의 명성 따위야 가문에 비하면야 하잘것없는 거 아니겠소.”
엽소의 말은 심장명이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부위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이었다. 손장명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초휴와는 애초에 비교 불가인 건 물론이고, 장승정, 종현, 방칠소를 따라잡기에도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강호에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부옥산 정마대전에 참전할 때, 소범천에서 쟁탈전을 벌일 때, 그리고 온갖 기연을 차지할 때,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었던가?
가문에서는 그가 이런저런 무림의 풍운에 휘말리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저 그가 집안에만 틀어박혀 착실히 수련에만 전념하길 원했다.
‘만약 문중에서 날 그렇게 묶어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이고 가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 결과적으로 세인들의 눈에 비친 그는, 지난번 용호방 순위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손장명으로서는 몹시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엽소는 바로 그의 이런 심리를 공략한 것이다. 모처럼 자기 마음속을 훤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손장명은 부글부글 끓던 속이 한순간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로가 괜히 백로이겠는가. 시끄럽게 깍깍거리기만 하는 저따위 까마귀 떼와는 수준이 다르지 않은가.
저들의 번드르르한 입에 발린 소리와는 달리, 엽소의 말에서는 깊이 있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해서 그를 쳐다보는 손장명의 눈빛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자, 이야기는 이쯤 나누기로 하고, 가서 축수연 구경이나 합시다.”
어느샌가 손장명의 손이 엽소의 팔을 잡고 인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파격적 대우에 엽정 무리는 어리둥절한 동시에 불같은 시기심이 치솟았다.
솔직히 말해서 엽가 가주 엽곤이 친히 온다 해도 저런 예우를 받는 건 꿈도 못 꿀 일인 것이다.
모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인물을 만난 손장명이 그를 남달리 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우두커니 이를 지켜보며 부러운 마음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 무리의 무사들이 다가왔는데 고평 육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손가와 좋은 관계에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웬일인지 지금 서로 인사를 나누는 양쪽 모두에게서 짙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듯했다.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건지 여차하면 그 화약에 불이 붙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육가 무리 중에서도 남색 무인복 차림에다 등에는 뇌문 장창 두 자루를 맨 젊은 무사가 손장명한테 개인적인 인사를 건넸다.
“손 형, 오랜만이오. 듣자니 요즘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세월아 네월아 음풍농월하신다지? 사내가 그래서야 쓰나. 모름지기 무사라면 강호를 구르고 치열히 싸워가며 성장해야 하는 법인데 말이오. 나도 그렇게 해서 최근에 용호방 구 위에 올랐지 뭐요. 그런데 오르고 보니 하필 손 형 바로 위더라니까? 손 형, 앞으로 열심히 분발하셔야겠소.”
“저놈은 또 뭐야?”
초휴가 엽소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초휴 정도의 위치가 되면 풍운방 인물들에게나 관심이 갈 뿐, 용호방 소식에 대해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새로 용호방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엽소처럼 아직 본격적으로 날갯짓도 못 해본 무사들의 눈에나 용호방 인물들이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엽소는 즉시 대답했다.
“고평 육가의 젊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기뢰쌍창(棄雷雙槍)’ 육광릉(陸廣陵)이라는 자인데, 근래 이삼년 사이 강호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지요. 용호방 구 위에 올라있고요.”
초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가로저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패기 부족이 아닌가. 될성부른 나무는 몇 그루 보이지도 않았다.
이는 초휴를 비롯한 그의 용호방 동기들이 어땠는지 비교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엽천사 정도나 명성에 목을 매었을 뿐, 나머지 준걸들은 용호방 순위 자체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다들 내가 일 위에 오르면 그것이 내 실력인 거고, 내가 끄트머리로 밀려나도 그 또한 자신의 실력이라는 마음가짐이었다. 즉 지위와 명성은 내가 싸우는 과정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것일 뿐, 그깟 순위표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육광릉처럼 용호방 구 위가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훈장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모습은 왕년의 상위권 무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만이요, 허세였다.
명성과 순위를 중시했던 엽천사만 해도 언젠가 장승정 내지 초휴 정도의 거물들을 이기고 올라서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건만, 이 육광릉이라는 자는 그저 구 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희희낙락하며 못난 꼴을 보이는 것이다.
“아 참, 강동 손가와 고평 육가는 혼인동맹을 맺어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왜 분위기가 저렇게 살벌한 거지?”
엽소가 잠시 생각 끝에 답했다.
“자세한 내막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반년 전 환허육경에서 갖고 나온 물건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 같아요. 무슨 공법 한 부인가 보던데, 손가 노야와 육가 노야가 이걸 놓고 서로 갖겠노라 다투다가 결국 반씩 나눴다더군요. 하지만 제대로 그 공법을 익히려면 반쪽으론 안되고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 두 집안은 그 문제로 벌써 몇 차례나 의견을 교환했지만, 합의에 못 이르고 충돌만 했습니다. 아무리 머릴 싸매도 좋은 해결책이 나오질 않자 계속 관계가 냉랭해지더니 지금은 저렇게 관계가 나빠진 거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초휴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손가와 육가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이는 그야말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뭔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 셈이니 말이다.
이때 손장명과 육광릉은 서로에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손장명이 히죽대며 빈정대길, 육광릉이 애들 장난 같은 실력으로 구 위에 오른 걸 보니 용호방도 인제 맛이 간 게 분명하다고 했다.
육광릉이 조소하며 받아치길, 손장명이 간이 뭐같이 작아서 쥐새끼처럼 집안에만 꼭 숨어있는 꼬락서니를 보니 과연 강동 손가의 자손답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말싸움이 갈수록 수위를 더해가자, 보다 못한 손가의 선배가 나서 그 둘을 떼어놓았다.
오늘은 노야의 축수연이 열리는 경사로운 날이 아닌가. 이런 날에 대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 망신은 육가보다는 오롯이 손가의 몫으로 돌아올 게 자명했다.
육광릉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손장명은 제대로 뒤끝이 작렬했다.
“흥! 고평 육가도 이제 단단히 한물갔군그래. 선조 대에나 대단했지, 지금 자기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다고 감히 내 앞에서 으스대며 강아지처럼 짖어대는 건지 모르겠군. 별것도 아닌 도적 몇 놈 죽인 걸 갖고 자기가 대단한 고수라도 된 양 착각하는 모양이지?”
그렇게 내뱉은 손장명의 시선이 문득 엽소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저 육광릉이란 자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용호방 순위가 나보다 위에 있으면 정말로 나보다 강한 걸까?”
엽소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자 초휴가 즉시 대답할 말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엽소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르침 받은 대로 읊어댔다.
“소인이 고평 육가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지라 함부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풍만루 쪽 정보는 그래도 공신력이 있다고 봐야죠. 육광릉의 실력이 실제로 공자님보다 더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풍만루는 육광릉이 더 강하다고 판단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의 순위를 공자님 위에 올려놓았겠지요.”
그 말에 엽정을 비롯한 엽가 사람들은 엽소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저 방정맞은 주둥이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손장명이 육광릉만 못하다고 떠들어대다니, 엽가를 압살시켜 버리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니나 다를까. 손장명의 낯빛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엽소의 그다음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풍만루는 통상 실력이 아닌 전적에 근거해서 순위를 매깁니다. 따라서 공자님이 정말로 육광릉보다 못하다는 건 전혀 증명되지 않은 거지요. 그간 문중의 방침에 성실히 따르시느라 불가피하게 전적을 쌓는 데 소홀하셨던 건 사실이니까요. 제 눈에는 육광릉이 지나치게 오만방자하다고 판단됩니다. 언젠가 저 불손한 행동거지로 크게 한번 낭패 볼 날이 있을 겁니다.”
“반면 공자님께선 은인자중하면서도 꾸준히 실력을 쌓아오셨으니 반드시 크게 되시고야 말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해서 조급히 생각하실 건 전혀 없는 거죠. 길고 짧은 건 실제로 대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진정한 실력을 갖춘 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손장명이 호쾌하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엽소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들어. 엽가에 자네와 같은 인재가 있는 줄 내가 왜 진작에 몰랐을까.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세상 이치를 꿰뚫는 안목도 탁월하고! 참 그러고 보니 방계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엽소의 대답에 손장명이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