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00)
800화 엽소의 거짓말
할 일을 모두 끝낸 엽소가 현장을 뜨려 하자 초휴가 또 지시를 내렸다.
“네 몸도 두어 곳 찔러.”
“뭘 어쩌라고요? 내 몸을 찌르다뇨!”
“너 혼자 멀쩡한 몸으로 엽가에 돌아갈 생각이었나? 엽가 이공자를 비롯해서 모두 몰살당했는데 너 혼자만 살았어. 가주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산적 떼를 만나 죄다 죽었는데 너 혼자 만 아무 탈 없이 멀쩡히 살아남았다고. 물론 이런 경우도 드물게 있긴 하지.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몸에 상처 하나 없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아닌가. 설마 엽가에 죄다 눈뜬 소경들만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엽소는 이를 악물더니 독하게 마음먹고 힘껏 자신의 복부를 두 번 찔렀다. 도 끝이 몸을 관통하기 직전에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뚫린 상처에서 피가 콸콸 솟구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중 한 곳은 급소 바로 옆이었다. 마혈대법으로 기혈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했으면 과다출혈 때문에 엽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수일 뒤, 엽소는 기혈이 바닥난 몸으로 기다시피 엽가 대문가에 이르렀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던 그는 긴장이 풀린 탓에 입 한번 못 열어보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갈 때는 한 무리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갔건만, 올 때는 고작 한 명만 반죽음이 되어 돌아왔으니 엽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었다. 사람들은 부리나케 이것저것 가져다가 그를 치료했다.
이윽고 엽소가 소생하자 엽곤이 집안사람 모두를 불러모은 가운데 황급히 다그치기 시작했다.
“엽정은?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느냐? 어째서 너만 돌아왔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엽곤의 질문에 엽소는 삽시간에 마음 한쪽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지금 자기가 죽다 살아와서 누워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주라는 자가 입에 발린 말이라도 몸이 괜찮냐고 묻기는커녕, 자기 아들 안위만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이 집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새삼 확인하자 서러움이 복받쳤다. 이에 그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
“산적 떼를 만났습니다. 강동에서 돌아오던 중 특산물도 좀 샀는데, 이것 때문에 저들의 표적이 된 것 같습니다. 다들 놈들 손에 죽고 저만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그가 말하는 걸 보는 초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엽소의 연기력은 뻣뻣하기만 한 게 너무도 형편없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진정성도 부족해 보였다. 육강하가 연기를 펼쳐도 저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그토록 험한 일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사람 특유의 공포에 질린 모습도 아니고, 당시의 참담함을 떠올리기조차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아니지 않은가.
일행을 모두 잃었다는 처절한 슬픔에 몸을 떨지도 않았다. 자고로 저런 연기란 공포, 고통, 슬픔, 이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는 법인데도 말이다.
지금 엽소의 말투는 지나치리만큼 담담했다. 정서도 비정상적으로 안정되어 보였다. 다행히 원래 온갖 설움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위인인지라, 지금처럼 어색해도 의심을 사진 않았다.
자기 아들이 산적에게 피살당했다는 말에 엽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큰아들 엽릉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황급히 아비를 부축했다.
하지만 우는 척하는 엽릉의 눈빛은 비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렁그렁한 눈물 뒤로 벅찬 기쁨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 얄미운 아우 놈이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 들더니만, 이제 영영 그럴 기회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입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어느 놈들 소행이냐? 내 기필코 이 원수를 갚고야 말 것이다!”
그러자 엽소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집을 떠나 여행을 해본 터라 피습당한 곳이 어느 세력 구역인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산적인지를 어찌 가려내겠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원래 산적들이라는 게 어느 한 곳에만 문패를 걸어놓고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눌러사는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 경황없던 와중에 상대가 누군지를 몰라보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엽릉이 돌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둘째도 죽고 그 노련한 칠숙(七叔)도 죽었는데, 너만 무슨 재주로 살아서 도망쳐 나온 것이냐?”
그제야 사람들도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엽정은 엽가의 이공자로서, 산적 떼로부터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는 선천경인 데다 비상시 쓸 만한 비장의 무기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대오를 이끌었던 방계 선배인 칠숙도 바깥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둘 다 죽었다는 것이다. 대오에서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 중 하나여야 말이 되지 않는가. 어떻게 그게 하필 엽소일 수가 있단 말인가.
엽소가 힘들게 기침을 하더니 손장명이 자기한테 건넨 단도를 내보이며 말했다.
“손가에 갔을 때 대공자 손장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떠날 때 저한테 선물로 이 보병을 주더군요. 저 같은 놈 수중에 이런 보병이 있을 줄은 산적들도 생각지 못했겠지요. 저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이걸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내내 추살에 쫓기는 과정에서 선천경을 뚫은 덕에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엽곤이 단도를 받아서 보니 과연 도병에 손가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손가에서 제작된 병기가 분명했다.
엽소가 오자마자 기절했다가 지금 막 깨어난 바람에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지금에야 그가 선천경에 올랐음을 알 수 있었고, 이 또한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엽가와 같은 작은 가문에서는 가문의 집중 양성을 받은 경우만이 스무 살 남짓에 선천경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엽소는 가문의 도움이라고는 쥐똥만큼도 받지 않고 선천경의 높은 문턱을 넘었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엽곤이 단도를 한동안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정말로 네가 손 공자와 그리도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더란 말이냐?”
엽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런 일을 두고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당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가주께서는 축수연에 참석했던 아무에게나 물어보셔도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엽곤이 다시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단도를 엽소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손 공자가 너를 좋게 본 모양이니 앞으로도 처신을 제대로 해서, 다음번에 또 손 공자를 만나더라도 집안 망신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늘부터 문중 상단은 네가 맡아 관리토록 해라. 모르는 게 있으면 문중 어른들께 여쭈도록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일제히 얼어붙었다. 엽곤이 이처럼 막대한 권한을 엽소와 같은 방계 제자에게 넘길 줄은 그 누구 짐작이나 했겠는가.
물론 이런 조치를 하는 이유를 모를 자는 없었다. 손장명에게 끈을 대보겠다는 게 아니면 뭐겠는가.
기대도 안 했던 엽소가 자그마치 손가의 승계자 눈에 들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인 만큼 한번 잘 활용해봄 직한 것이다. 엽곤이 놀라워하는 좌중을 돌아보더니 준엄히 명했다.
“혹시 실낱같은 단서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니 사건이 발생했던 곳을 세심히 살펴보거라.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기만 하면 엽가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놈들과 싸울 것이다!”
엽곤을 비롯해 다들 물러가자 비로소 엽소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소행이 발각되어 이 자리에서 난도질당해 죽는 건 아닐까 싶어 여간 마음을 졸인 게 아니었다.
“그리 긴장할 것 없어. 이런 일은 차차 익숙해지기 마련이야. 처음이라 유난히 힘들었던 거지, 다음부터는 괜찮아.”
빈방에 홀로 남은 엽소의 귓가에 초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엽소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다음도 있단 말입니까?”
“이미 거짓말을 했잖아. 그 거짓말이 들키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무수한 거짓말을 하는 게 불가피하니까. 살인도 마찬가지야. 한 번 저지른 이상, 그 한 번의 살인으로 인해 자연히 다른 살인이 잇따르게 되는 거지. 그래야 네가 안전해지니까. 하지만 너무 염려할 건 없어. 결국, 모든 게 잘 마무리될 테니까.”
초휴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서 육강하가 초휴를 놀려댔다.
“본존이 장담컨대, 네가 첫 살인을 저지르고 거짓말로 때웠을 때, 분명 저 녀석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태연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척 보면 알지. 자네만큼 얼굴이 두껍고 속 시커먼 자가 흔할 거 같은가? 그야말로 타고난 마인이라니까. 자네가 처음부터 마도에서 굴러먹었으니 다행이지. 아니라면 아까운 인재 낭비를 할 뻔했군그래.”
초휴가 웬일로 육강하의 비아냥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사실 처음에는 마도와의 경계가 나름 뚜렷했던 듯도 한데, 갈수록 더 깊이 이곳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엽소는 몸이 다 회복된 후, 문중에서 확실한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위상 면에서 단번에 직계 제자, 다시 말해 대공자 엽릉 바로 다음 수준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초휴가 지도해준 공법과 무예들, 그리고 한바탕 살육을 저지르고 흡수했던 그 많은 기혈에 힘입어 그의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한 것이다.
대폭 증강된 실력과 권한을 양손에 쥐고 문중 사람들의 공경을 한몸에 받게 되자, 그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변화된 자신의 처지에 차차 익숙해졌고, 이와 비례하여 초휴의 존재감도 적잖이 희석되어 갔다.
그리고 한 달 후. 초휴가 오랜만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만하면 준비가 다 된 셈이군.”
“무슨 준비요?”
엽소가 당황하여 묻자 섬찟한 대답이 돌아왔다.
“엽곤 부자를 죽이거나, 혹은 엽가를 통째로 쓸어버릴 준비!”
‘엽곤 부자를 죽여? 엽가를 쓸어버린다고?’
엽소는 어느 쪽도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엽정의 경우야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댔으니 오랜 세월 묵은 원한이 초휴의 선동에 힘입어 살기로 폭발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엽곤과 대공자 엽릉은 자기한테 험한 말 한번 한 적 없고, 지금 엽가에서의 생활도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굳이 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엽소가 처음으로 초휴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가주님과 대공자를 왜 죽인단 말입니까? 그러기 싫습니다.”
초휴의 냉소가 뒤따랐다.
“달포 남짓, 남들에게 대인 소리 들으며 살다 보니 이젠 동서남북도 구별이 안 되나? 네가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저들이 너를 말려 죽일 거라고. 네가 지금 여기서 으스대며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네 실력이 훌륭해서? 아니야. 틀렸어. 여우 새끼가 호랑이의 후광 덕분에 으스대는 거란 말이지. 이게 다 네가 손장명 눈에 들었기 때문에 엽곤 부자한테 대접받으며 사는 건 줄 모르겠나. 하지만 요즘 들어 네가 능력을 보일수록 엽곤 부자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눈치 못 챘나?”
엽소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변하다니 뭐가요?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가주님이 명하신 대로 일을 잘 해낸 게 뭐가 문제죠?”
“바로 그거야. 엽릉을 압도할 만큼 잘 내해고 있다는 게 문제란 말이지. 엽릉은 엽가의 후계자야. 그런데 네가 뭐가 잘났다고 감히 엽가의 대공자보다도 잘 해내고 있는 거지? 주변을 돌아보란 말이다.”
엽소는 반박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삭였다. 그도 자신이 능력을 보일수록 엽곤 부자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이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