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02)
802화 잘못을 되돌리는 약은 없다
엽곤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몸을 움직였다. 자기 몸 가까이에 병기가 없는 걸 확인하자 일신의 진기를 맨손에 실어서 엽소를 가격하려 했다.
엽소의 수중에는 보병급 단도가 들려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큰 경지의 격차가 있었다. 엽릉은 습격하여 죽일 수 있었지만, 엽곤은 보병을 가지고도 단번에 끝장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피 맛을 보자 그간 잠들어있던 엽소의 ‘악의’가 완전히 깨어나고 말았다. 그는 엽곤의 일장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향하는 걸 피할 생각도 않고 마주 오른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엽릉의 시신에서 뽑혀 나온 기혈이 그의 손에 응집되는가 싶더니, 예봉 못지않은 손날이 엽곤의 호체강기를 뚫고 그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현재 엽소의 실력으로는 내력의 방출은 물론이려니와, 화혈신도의 시전도 불가능했다. 해서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기혈의 힘을 손에 집중시켜, 그 손을 병기 삼아 엽곤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피하지 않고 공격한 대가로 그의 가슴팍도 엽곤의 일장을 받아내느라 경맥이 파열되고 말았다.
엽소가 피를 토하며 엽곤을 노려보았다. 입가에 채 사라지지 않고 남은 미소가 시뻘건 피와 대비를 이루어 섬뜩함을 더했다.
“내가 말해주지 않은 게 있지. 당신의 둘째 아들, 엽정 그 새끼도 내가 죽였다!”
엽소가 천천히 상대의 명치에 박힌 손을 뽑아내더니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시에 전신의 기운이 죄다 뽑혀나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초휴가 후속 조치를 지시했다.
“내가 너라면 당장 엽곤 부자의 기혈을 말끔히 흡수한 후에 도주하겠다. 엽가 사람들이 죄다 바보는 아니잖아? 여기서 큰 기척이 새어나가지는 않았지만, 한 명이라도 우연히 살해 현장을 발견하면 너는 오늘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거다.”
엽소는 이를 악물며 초휴가 시킨 대로 한 후, 즉시 이곳을 뜨려 했다. 하지만 초휴의 지시가 이어졌다.
“저 둘의 수급도 가져가야지.”
“네? 그건 왜······.”
“당연히 엽가를 멸문하기 위해서지! 지금 반신불수와 별 차이 없는 그 몸으로 혼자 엽가를 끝장낼 거냐?”
초휴가 무슨 의미에서 그러라는 건지 당장 이해는 안 갔지만, 여태 그가 하라는 대로 해서 문제 된 적은 없었기에 이번에도 지시에 따랐다.
애당초 초휴가 시킨 대로 고분고분 따랐더라면 아버지도 돌아가시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엽소가 매우 숙련된 솜씨로 수급을 베어 달아나는 광경을 지켜본 육강하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야! 이거 참! 학습 진도가 엄청 빠르군그래!”
그러더니 돌연 초휴한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너, 일부로 그랬지?”
“또 뭐가?”
초휴가 성가시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자 육강하도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일의 전후 인과관계에 대해 저 녀석한테 찬찬히 설명해준 다음, 너의 지시를 따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저 녀석은 광산으로 떠나지 않았을 테고, 그 아비도 어쩌면 죽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러자 초휴가 남의 일 말하듯 태연히 받아쳤다.
“맞아. 일부러 그랬어. 자고로 시련을 겪어야 더 크게 성장하는 법이니까. 사람이 평생 살면서 돈 주고 못 살 물건은 없지. 그러나 단 하나만은 예외야. 잘못을 되돌리게 해주는 약만은 살 수 없단 말이지. 내가 분명 경고했는데도 저 녀석은 듣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했어. 엄연히 본인 잘못인데 누굴 원망하겠어? 저 녀석은 나를 만난 덕에 기연을 얻었어. 나도 저 녀석의 힘을 빌려 몸을 만들 거니 이미 공평한 거래인 셈이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줄 작정이야. 일종의 특별 수당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려면 학습이 필요해. 뼈아픈 경험이야말로 그 학습에 큰 도움이 되는 거지. 안 그래?”
육강하는 묵묵부답이었다.
지금 초휴는 냉혹함의 극치가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초휴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친한 벗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든 늘 이런 식이었다.
그게 뭐든 가는 길을 가로막으면 무작정 밟고 죽였다. 죽고 싶어 앞에서 얼쩡대는 놈들을 왜 굳이 살려둔단 말인가. 지금 엽소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육강하는 초휴가 엽소를 잘 가르쳐서 제자로 키우려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인제 보니 설령 초휴에게 그럴 의향이 있어도 만에 하나 제자로 양성하는 과정에서 엽소가 버티지 못하면 순전히 본인 탓이라며 가차 없이 내칠 위인이 아닌가.
이때 바깥세상에서는 엽소가 수급을 챙겨 들고 정신없이 엽가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엽가의 경계 태세는 참으로 허술했다.
야간 순찰을 맡은 하인들부터가 게을러터진 것이다. 게다가 다들 엽소와는 안면이 있는 데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널리 알려진 터라 아무도 그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해서 그는 순조롭게 엽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선배님, 이제 우린 어떡하죠?”
엽소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음으로 할 일을 초휴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 엽가와 한창 적대 중인 세력이 채가라고 했던가? 그곳이 어디 있는 줄 아나?”
“당연히 알죠.”
“그럼 엽곤 부자의 수급을 채가 앞마당에 던져 놔. 그다음부터는 신경 안 써도 돼. 나머지 일은 채가 측에서 너 대신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엽소가 순간 멈칫했으나 초휴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채가와 엽가는 이미 강동 손가와 고평 육가 간의 갈등으로 인해 척을 진 상태였다.
채가 측이 엽곤 부자의 수급을 발견하고도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중팔구 가주의 유고(有故)를 틈타 엽가를 쓸어버릴 게 뻔했다.
엽가가 멸문하면 그때 가서 엽곤 부자가 어쩌다 죽었는지를 누가 조사하려 들겠는가? 관심 가질 이는 하나도 없을 터였다.
엽소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선배의 진정한 실력은 무공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판을 구상하고, 그 판에 맞게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귀신같은 지략에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일만 해도 자연스럽게 양쪽 가문의 갈등 국면을 활용해서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엽소 자신도 이 선배가 이용하는 바둑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암수에 걸려들어 허우적대는 중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그렇게까지 깊게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생각할 용기도 없거니와 생각할 능력도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이 선배 말을 들어서 득 볼 게 많으니 그걸로 족했다.
과연 그다음 일은 초휴가 예측한 대로 흘러갔다. 채가는 엽곤 부자의 수급을 보자마자 그길로 엽가로 진격해서 깨끗이 쓸어버렸다.
맛난 떡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격이었다. 채가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나 않은지 따져볼 생각도 않고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고 고평 육가에 이 쾌거를 알렸다.
엽가가 처참히 짓밟히는 광경을 엽소는 멀지 않은 주루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가 나고 자란 엽가가 다름 아닌 자기 손에 멸문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사뭇 착잡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가 초휴에게 물었다.
“선배님, 다음 할 일을 알려주시지요.”
초휴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설명에 들어갔다.
“강동으로 가서 손장명을 찾아가. 자네 가문이 멸문당했어. 그것도 손가와 육가 간의 싸움에 휘말려 그리되었으니 자네로서는 손가에 의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거지. 인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손장명의 심복이 되는 거야.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는 내가 차차 알려줄 테니, 너는 그저 네 속내가 들통나지 않도록만 해.”
고개를 끄덕인 엽소는 마지막으로 엽가를 한번 쳐다본 후 그곳을 떠났다.
* * *
그로부터 보름 후, 강동 손가에 도착한 엽소가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엽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그간 엽가는 확고히 손가 편에 섰던 바람에 작금의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예전에 비하면 엽소의 연기는 꽤 쓸만했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뻔뻔하게 잘도 거짓말을 꾸며댄다는 찬사를 육강하한테 들은 바 있는 초휴만은 못해도, 적어도 손장명에게 내막을 들킬 염려는 없어 보였다.
엽소로부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손장명이 이를 갈았다.
“고평 육가 새끼들! 이건 너무 심하잖아!”
근래 들어 두 가문의 갈등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측 다 자기 수중의 공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실 환허육경에서 획득한 물건들 가운데 손가와 육가가 함께 차지한 그 공법이 가장 진귀한 보물 축에 들었다.
손가는 그 공법이 탐났다. 손가의 가전절기인 한빙진기(寒冰眞氣)가 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한 편도 못 되기 때문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손가가 이 대단치도 않은 공법에만 의지해 진화련신 고수를 연달아 배출해낼 수 있었던 비결은, 손가가 은인자중하는 가운데 열심히 다져온 가업이 탄탄히 받쳐준 데다, 선조들의 가호에 힘입은 덕이었다.
거기에 더해 구급도 넘는 막강 공법을 차지해 손가의 무도를 개선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터였다.
하지만 고평 육가도 공법을 포기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공법 중 창법(槍法)과 관련된 부분을 기존의 무도와 융합시키면 위력을 크게 늘일 수 있으므로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문이 이 공법을 공동 소유하여 함께 수련하면 어떨까? 그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양측 모두 수련 과정에서 자기 가문의 근간이 되는 핵심 공법이 상대방에게 까발려질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일단 핵심 공법이 노출되면 상대방은 굳이 이를 수련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공법의 약점을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상대방 손에 쥐여주는 격이 되니, 손가나 육가를 막론하고 절대 공동 수련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손장명이 엽소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손가로 인해 엽가가 모진 일을 당했으니 이제부터 너는 내 밑에서 일하도록 해. 내 절대 너를 박대하지 않을 테니까. 하긴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지. 손가와 육가의 충돌이 끊이지 않으면서 우리 부속 가문들에게까지 벌써 영향이 미치고 있어. 최근 몇 년간 손가가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지 않은 탓에 부속 가문의 수가 육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적어졌으니까. 이 때문에라도 우리가 약세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
이때 엽소가 돌연 멍하니 넋을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한테 이 문제를 타개할 좋은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손장명도 엽소에게 호감만 좀 느꼈을 뿐이었다. 허접한 가문 출신이지만 모처럼 자기 기분과 잘 맞는 자를 만났으니, 큰 기대 없이 곁에 두고 소소히 써먹으면 되겠거니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으로 계책씩이나 운운하다니 허풍을 떠는 게 아닌가 싶었다. 손가에 빌붙어 보려고 공을 세울 궁리에 급급한 엽소가 아무 말이나 내지르는 거라고 오해한 그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네게 계책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공자님, 엄밀히 따지면 사실 그 부속 가문이라는 것들이 육가와 그렇게까지 끈끈한 관계는 아닙니다. 고작해야 돈으로도 살 수 있는 충성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