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3)
악노천은 연남지역을 주유하다가 칠종팔파 중 하나인 신무문의 장문인, ‘신기백변(神機百變)’ 연회남(燕淮南)의 여식과 눈이 맞고 말았다. 한 명은 칠종팔파에 속하는 신무문 장문인의 고명딸이요, 또 한 명은 북릉부의 작은 세도가인 목씨 가문의 장녀였다. 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에는 긴 고민이 필요치 않았다.
그냥 신무문에 빌붙기 위함이라면 악씨 가문에서 목씨 집안에 파혼을 요청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세간의 구설에 오르느라 대외적인 명성에 흠은 좀 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할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악씨 가문이 자신의 명성도 지키고 목씨 가문의 재산도 차지할 욕심에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씌워 목씨 가문을 풍비박산 내버린 것이다. 목씨 가문은 손쓸 겨를도 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처참한 사연을 말하는 동안 목자의의 눈동자에 박혀있던 원한은 어느새 더욱 짙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심지어 말하는 내내 어조의 변화도 없었다.
“악노천이 신무문에 빌붙기 위해 변심한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파혼하면 되는 거죠. 그에게 연심(戀心)을 느낀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가문한테, 파혼을 왜 하는 거냐고 우리가 따질 수나 있겠어요. 굳이 우리 가문을 그렇게까지 만들 필요는 없었다는 거죠.”
“나는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놈들이 혼사를 의논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살육을 감행했고, 우리 가문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어요. 충직한 집사였던 허씨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날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거예요.”
“물론 지금도 죽은 거와 별 차이 없지만 말이에요. 며칠 전 허씨 아저씨는 부상 입은 게 덧나 결국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임종하시면서, 만일에 대비해 숨겨두었던 우리 가문 재산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아저씨는 나더러 그걸 가지고 임중군, 아니 북연 자체를 떠나 새 출발을 하라고 당부하셨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의 두 눈이 온통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악씨 놈들의 씨를 말릴 때까지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초휴의 얼굴도 점점 굳어졌다. 앞에서는 혼사를 논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피를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잔학무도한 놈들이란 말인가!
초휴가 보기에 악씨 가문은 소탐대실이 너무도 컸다. 그런 식으로 하면 당장 눈앞의 이익은 챙길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명성을 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강호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목씨 가문이 어쩌다 멸문당했는지 모를 리가 없다.
신무문에 빌붙기가 무섭게 사돈이 될 집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좋게 보겠는가. 아마 악씨 가문은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될 터였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북릉부 내의 다른 세력가들이 악씨 가문에 호감을 가질 리가 없었다. 악씨 가문과 손을 잡을 기회가 생겨도 그들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매 순간 경계를 늦추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악씨 가문은 남들이야 뭐라건 간에 개미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말이다. 성공리에 신무문에 빌붙은 데다, 목씨 가문의 재산까지 송두리째 차지
하면서 가세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으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나올 게 뻔했다.
“씨를 말리고 싶다 했소? 안심하시오. 그들이 죄다 죽어 나가는 꼴을 보게 해드리지. 이번에야말로 저들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요. 아 참, 저들의 자료를 넘겨주시오. 당신이 이처럼 저들을 증오하는 걸 보니, 그 자료도 매우 상세하게 작성되었을 것 같군.”
목자의가 넘겨준 자료를 보니, 확실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상세했다. 악씨 가문 방계제자들의 성격까지도 언급되었음은 물론, 북릉부의 다른 세력가들에 관한 정보 및 그들과 악씨 가문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유일한 충복이 죽은 뒤, 목자의는 이 많은 자료를 혼자 수집해 온 것이다. 이 자료들 덕분
에 초휴는 계획에 더욱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초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계속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소이다. 북릉부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한 달 내로 악씨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목자의의 눈빛에 잠시나마 원한이 사라지고 동공이 멍하니 풀렸다. 악씨 가문의 실력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건만, 내강경 혼자서 가문 하나를 한 달 내로 무너뜨리겠다는 호언장담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저 살수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비상용으로 외부에 숨겨두었던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긁어모았지만 결국 사급 살수밖에 고용하지 못했다.
고용한 살수가 임무에 실패하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을 굳힌 지는 오래였다. 악씨 가문 전체는 어떻게 못 해도, 최소한 악노천과 동귀어진할 각오는 되어있었다.
북릉부는 임중군의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릉부’라는 지명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원래 산릉 지대였다. 다만 남쪽에 인접한 산릉은 너무 가팔라서 건물을 지을 수 없는 반면, 그나마 북쪽 산릉에는 주부를 조성할 수가 있어서 ‘북릉부’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산릉이라는 입지 조건상 통행이 불편했다.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그저 북쪽으로 산길이 하나 나 있을 뿐이나, 이마저도 주변이 온통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마디로 위군 상망산의 오솔길보다 나을 것도 없는 열악한 통행로였다.
따라서 북릉부는 별 것 아닌 산간도시에 불과해야 맞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주부들보다 무사들이 많아 번화하기 그지없고, 세력 면에서도 다른 주부들을 능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릉부가 비록 산릉에 있어 통행이 불편하긴 하나, 풍수지리적 조건이 뛰어난 데다 천지의 원기도 짙어서, 웬만한 명산대천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사들의 수련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씨 가문이 오늘날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도 지역적 우세 덕분으로, 대를 거듭할수록 강성해진 끝에 어느덧 일개 선천경 무사의 작은 집안이던 것이, 임중군을 호령하는 세력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초휴는 그날 밤 어둠이 짙게 깔리길 기다렸다가 검은 옷차림으로 밤의 일부가 되기라도 한 양 자연스럽게 북릉부 내로 숨어들었다.
신무문에 빌붙는 데 성공한 데다 순조롭게 목씨 가문의 재산도 차지하고 나니 악씨 가문은 겹경사를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한밤중인데도 저택 곳곳에 등롱을 환히 밝혀놓고 술잔치를 벌이는 등 자축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이때 초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차림 일색으로 악씨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고루 이층에 서서 밤하늘을 장막 삼아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청룡회의 이런 차림이 얼마나 유용한지 새삼 실감하는 중이었다. 검은 삿갓과 가면이 상대의 감지능력을 차단하는 데다 검은 옷까지 입고 있으니, 이처럼 컴컴한 밤에는 웬만해선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물론 이런 차림이 청룡회 타주 정도의 직급에게 있어서는 신분을 과시하는 역할에 그칠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실력에 이르면 딱히 보호막의 도움 없이도 대낮이건 한밤이건 상대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악씨 저택의 위치를 파악한 초휴는 유령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안으로 잠입했다. 그때 악씨 가문의 응혈경 무사 두 명이 술병을 들고 흐느적거리며 저택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저택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놈들도 대방(大房) 쪽 놈들이지? 아주 신들이 났구먼. 쳇, 악노천이 신무문 여식하고 붙어먹은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저리들 의기양양한지 모르겠네. 그 반반한 얼굴로 여자 꼬드겨서 팔자 필 궁리를 하는 게 사내자식이 할 일이야?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그러나 다른 무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섯째 형님, 그런 말 아무 데서나 하면 큰일 나요. 그 날로 우리 삼방(三房)은 끝장이라고요. 우리 가문의 아홉 방 가운데 대방이 줄곧 상징적인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실상은 실력도 권세도 신통치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신무문과 그렇게 되면서 위상이 확 올라갔잖아요. 다른 방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도 못 펴게 생겼어요. 이제 대방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우린 그저 당분간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는 게 상책이에요. 당분간 대방 놈들이 무슨 꼴값을 떨건 간에 우린 신경 끊고 술이나 마십시다.”
비단 북릉부 뿐만 아니라, 임중군 전역에서도 이름난 세력가인 악씨 가문은 오랜 세월 수 대에 걸쳐 자손이 번창함에 따라, 처음에는 단순하던 계보가 어느덧 여러 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대단히 복잡해진 방계는 논외로 치고 직계혈통만 따지더라도 무려 아홉 개도 넘는 방으로 나뉘었다.
사실 예전에는 아홉 방 사이에 세력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악씨 가문의 서열 일 위인 조부가 중심을 잡은 가운데, 아홉 방이 돌아가며 권세를 누렸기 때문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악노천이 신무문의 세력을 등에 업게 되면서, 이른바 ‘순번제’는 유명무실해지고 악노천이 속한 대방이 패권을 잡게 된 것이다.
처음 입을 열었던 무사는 옆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주절거리던 중 옆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의아해서 몸을 돌렸다. 뜻밖에도 당연히 옆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람은 없고 자신이 줄곧 혼잣말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의 입을 막더니 핏빛 칼날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초휴는 홍수도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시신 두 구를 어디론가 옮겨갔다.
지금 초휴의 실력으로 보자면 응혈경은 물론이고 선천경일지라도 그의 칼을 한 번이라도 막아낼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내강경으로 올라선 후 큰 장점이 생긴 걸 알게 되었으니, 그건 자신의 기세와 힘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갓 선천경에 이르렀을 때는 마치 햇빛 받은 장검처럼 온몸에서 매서운 기세가 뿜어나는 바람에 고수들이 금방 눈치를 채서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강경에 이른 지금은 진기를 철저히 장악하여 자신의 기세를 갈무리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을 감행하기 좋았다. 좀 전에 악씨 무사가 자신의 곁에 있
던 동료가 죽어 나가는 것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초휴는 손가락에 피를 묻혀 시신들 옆에 추상적인 용 문양을 하나 그렸다. 그것은 철삿갓의 금박 문양과 똑같았다. 바로 청룡회의 표식이었다. 이어서 용 문양 옆에 ‘목’자도 썼다. 그러고는 그곳을 뜨려다가 문득 생각이 미친 듯, 되돌아와 땅바닥에 혈수인(血手印, 피로 남긴 손자국)도 하나 남겼다.
이로써 계획대로 모든 일을 마친 그는 북릉부에 머무는 대신 북릉산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끝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