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67)
867화 대라천(大羅天)
이파순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두루마리가 일기가 아니라는 건 다들 알 수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일기를 쓰겠는가. 자기 마음속의 생각을 글로 주저리주저리 쓰다니!
글로 이미 써버린 것도 여전히 마음속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정말로 생각이 단순하기 그지없고 아무도 경계할 필요가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선 강자가 아닌 바에야 누가 그딴 걸 굳이 쓰고 앉았단 말인가. 남에게 들키면 약점이나 잡히기 딱 좋을 텐데.
이파순이 두루마리에서 눈을 못 떼며 연신 감탄만 하자, 이추적이 참다못해 다시 재촉했다.
“사람도 참,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똑바로 좀 말할 수 없어? 역외에서 온 존재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 설명이라도 해 보란 말이야!”
이파순이 못마땅한 듯 그녀를 힐끗 보자 초휴도 그녀에게 따가운 눈총을 쏘았다. 저 여자는 어쩌면 내뱉는 말 한마디마다 밉살맞기 그지없을까.
이파순은 명색이 제육천마종의 종주다. 명마와 은마를 통틀어 상위급 실력을 보유한 정상급 마도 대파를 이끄는 수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추적 저 여자는 대체 뭘까?
이파순이 제육천마종의 제일인자인 반면, 이추적은 은마에서도 그리 비중이 있는 인물이 못 되었다. 그런 주제에 감히 이파순을 아랫사람 부리듯 채근하는 꼴이라니.
이파순의 성정이 너그러웠으니 망정이지, 초휴였으면 또 귀싸대기를 날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파순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두루마리에 적힌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대흑천마종이라 불러온 존재는 정확히 말해서 범교(梵敎) 산하의 시바전(濕婆殿)에 소속된 하위조직인 대흑천신궁(大黑天神宮)인 게 틀림없소. 한마디로 대흑천마교는 종문의 명칭이 아니라, 고작 범교 휘하의 분파 조직에서 또 갈라져 나온 분파 조직이라는 거요.”
일행 중 임창룡만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워했다. 이파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지난날 대흑천마교가 하루아침에 독고유아한테 궤멸당했다고는 하나, 그건 독고유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당시 강호의 그 어떤 상위급 세력에도 뒤지지 않을 실력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공할 실력을 갖춘 대흑천마교가 고작 분파 중에서도 분파였다니, 정말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허정과 소마가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범교’는 종문 내 자료에서도 본 적이 있는 명칭이다. 그 명칭을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그저 상고시대 불문 전체를 달리 통칭하는 어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범교는 그야말로 범교라는 명칭을 가진 단독 세력이었다지 않은가!
이파순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또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범교는 ‘대라천(大羅天)’이라는 곳에 있었다고 하오. 거기서 범교와 천라보찰(天羅寶刹)이 격전을 벌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범교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는군. 그리고······ 범교 산하 범천전(梵天殿)의 수장격인 대범천(大梵天)이 무얼 찾아냈다는데······ 이건 나도 모르는 글자요. 암튼 무슨 열쇠를 역용하는 수법인 듯한데 그 방법으로 일부 사람들을 원래의 본거지로 되돌려 보내기로 했다는군. 거기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오려고 말이지. 마침내 계획을 실행에 옮겨서 대흑천마교, 그러니까 대흑천신궁 사람들이 죄다 본거지로 돌아오긴 했는데······ 와서 보니 대겁난으로 인해 본거지가 엉망으로 파괴된 다음이었던 거지. 대라천에서 허락한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 탓에 일단 대충 재건부터 한 다음······, 남만 본거지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고 하오.”
“그다음은 어찌 되었소?”
허정이 다급히 던진 질문에 이파순이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다음 내용은 없구려. 그 후의 일은 우리도 알다시피, 대흑천마교는 남만을 떠났고 결국 곤륜마교한테 멸망 당한 게요.”
한껏 눈을 반짝이며 그다음 설명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었다. 두루마리에 기재된 내용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이나마도 이파순이 확실하게 번역하지 못한 대목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했다. 어쩐지 상고 대겁난의 비밀과 관련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범교’는 오늘 처음 들어봤어도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정상급 불문 세력의 하나인 ‘천라보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다.
비록 나중에는 열세에 몰렸다고는 해도, 천라보찰과 같은 대단한 세력에 맞서 범교가 당당히 격전을 치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범교 역시 천라보찰에 맞먹는 막강한 실력을 보유했던 존재란 말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오백 년 전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상고 전설에나 등장하는 줄로만 알았던 천라보찰이 당시 범교와 격전을 치렀다는 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이 사실은 상고의 주요 불문 세력이었던 천라보찰이 적어도 오백 년 전에만 해도 대라천이라 불리는 곳에 엄연히 존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상고의 종문 및 강자 무리가 대겁난 이후 어찌 되었는지, 만약 어디론가 피신한 거라면 그곳이 어디일지를 줄곧 궁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번번이 궁금증에 그칠 뿐, 이 수수께끼를 해결할 그 어떤 결정적인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저 뜨문뜨문 드러난 기록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춘 것에, 나름 추정한 바를 더하여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그 결론의 내용은 상고 종문 중 일부는 대겁난을 성공리에 피한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두루마리에 기재된 내용도 위의 결론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만한 증거인 셈이다. 상고 대종문들이 추진했던 이른바 ‘개천계획(開天計劃)’이라는 것이 종국에는 성공하여 대라천이라는 곳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의 생활도 그런대로 괜찮았으리라 추정되었다.
나름 살만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었다면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 공격할 기운은 어딨으며, 신상이나 불상을 만들어놓고 섬길 여유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녹도처럼 기본적인 생존마저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라면 대규모로 싸우거나 제대로 섬기는 건 언감생심 사치에 불과했으리라. 새로 알게 된 사실들에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것과는 달리, 이추적과 임창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추적이 무덤덤한 이유는 애초부터 이곳에 관심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인제 와서 고리타분하게 상고의 비밀 같은 쓸 데 없는 내용을 알아서 뭐하겠는가. 그녀는 당장 본인에게 실익이 되는 것만 중요했다.
그렇다면 임창룡은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명확한 목적을 띠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흑천마교의 특정 물건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다른 건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행은 쓸 만한 물건들을 추려낸 후 나머지 두 입구도 살펴볼 요량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 번째 입구를 통과하자 자그마한 궁전들이 여러 개 모여 있을 뿐, 딱히 특별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궁전마다 신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향불을 태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 건 대광명사나 수보리선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 모셔둔 신상들은 불문의 부처, 보살, 호법 등과 생김새가 흡사한 것들이 많았다. 이로써 불문 일맥이 범교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었다는 것 말고는 여기서 특별히 건진 건 없는 셈이었다.
이윽고 세 번째 입구로 들어서자 일행의 눈앞에 진법이 설치된 청동 대문이 하나 나타났다. 앞서 보았던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이곳 골짜기의 검은 돌을 이용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여기만 청동으로 만들어진 대문으로 봉쇄된 걸 보니 범상치 않은 곳임이 분명했다.
이파순이 대문에 다가가서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정 대사, 그리고 소마가 대사! 아무래도 두 분께 부탁해야겠소. 여기에 설치된 진법이 수호 진법 종류라서 무력으로 부수려 들면 반작용만 일으킬 것 같소이다. 진법에 대해서라면 두 분이 우리 중 가장 정통하니, 진법으로 진법을 깨는 방법을 시도해주시구려.”
허정과 소마가는 군말 없이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얼핏 잡동사니 같아 보이는 도구들로 술렁술렁 진법을 구축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이 청동 대문에 걸린 진법과 상충작용을 일으켜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당시 대흑천마교 사람들이 확실히 시간에 쫓기긴 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정성을 들였을 이 문조차도 이렇게 맥없이 열릴 정도로 수호 진법이 허술하니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보각(藏寶閣)과 유사한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바로 여기다!’
일행은 너나없이 눈을 번뜩였다. 드디어 그들이 찾으려고 애쓰던 곳에 이른 것이다.
당시 대흑천마교 사람들이 경황없이 여기를 다녀갔다고는 해도 귀중품들을 일일이 몸에 지니고 다닐 수는 없었을 테니, 분명 그런 것들을 따로 보관할 장소를 조성해 놓았을 터였다. 귀중품을 가지고 다니다가 무슨 불상사라도 생겨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다른 자의 수중에 넘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일행이 채 주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임창룡의 신형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장보각 내 선반 앞에 이른 그는 찾던 걸 발견한 건지, 곧장 한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천문 신장 나리는 줄곧 있는 듯 없는 듯 일행을 따라다니기만 했다. 초휴만이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잊다시피 한 상태였다.
하지만 난데없이 임창룡이 행동을 개시하자 허정과 소마가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나서는 그를 저지하고 나섰다.
임창룡이 뭘 노리고 있었건 간에 그가 기회를 선점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허정은 그가 자신의 저지를 뿌리치려 하자 불인을 결하더니 금련(金蓮)으로 그를 감싼 후 불광으로 덮어 버렸다.
동시에 소마가의 입에서도 불경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나직한 불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몽롱한 불상이 임창룡을 통째로 짓누를 기세로 덮쳐왔다.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거대한 용으로 화하였다. 창공도 갈라놓을 창룡의 노호성이 쩌렁쩌렁 고막을 두드리더니, 강력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권의가 금련이고 불상이고 간에 모조리 묵사발을 만들었다.
허정과 소마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천문 신장의 실력이 두 사람의 협공도 무력화시킬 정도로 막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초휴는 임창룡이 다짜고짜 특정 물건을 향해 몸을 날리는 걸 보자 출수를 포기했다. 임창룡이 몸을 날린 방향에는 덩그러니 돌조각이 하나 담긴 상자밖에 없었다.
돌조각 표면의 무늬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매우 특이했다. 그 무늬는 보기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새겨진 듯도 하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세상에 두 개 있기가 어려울 특이한 돌이, 뜻밖에도 초휴의 눈에는 더없이 친숙했다. 그것은 그의 단전에 붙어있는 통천 열쇠였던 것이다!
천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것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황사월이 환허육경에 왔던 이유도 바로 이것을 찾기 위함이었으리라.
천문 측은 미리 정보를 입수했는지, 이것이 어디 어디에 있는지를 죄다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전에 나신군이 강호에 나타났던 이유도 역시 이것 때문일 것이다.
임창룡은 그간 입을 여는 족족 ‘천문의 임무가 어쩌고······’라고 말해왔다. 이것만 봐도 그들의 임무는 통천 열쇠를 모으는 게 분명했다.
뜻하지 않게 환허육경에서 통천 열쇠가 초휴의 몫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황사월은 임무에 실패했다. 그때 실패한 임무를 마저 완수하기 위해 이번에는 임창룡이 강호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초휴는 여전히 통천 열쇠의 용도를 알지 못했다. 그나마 아는 용도라면 열쇠에 공간을 초월해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는 정도? 그나마도 공간 장벽을 넘어 녹주를 드나드는 게 가능했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통천 열쇠의 용도는 단순히 그런 것에만 한정된 게 아닌 듯했다. 설마 이름 그대로 하늘과 통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