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7)
“도망쳐!”
사노야는 냅다 부르짖더니, 앞장서 산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도망치라고 말하지 못한 탓에 일부는 그를 뒤따라 뛰고, 다른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각자도생에 나섰다. 돼지 떼처럼 꽥꽥대며 꽁무니 빼기 바쁜 잔챙이들은 초휴의 관심 밖이었다.
초휴는 곧장 사노야에게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핏빛 도기가 보슬비처럼 가늘게 이어지며 사노야를 덮쳤다. 그 강력한 기세에 온몸이 갇힌 순간, 사노야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저번의 오노야는 습격을 받아 금세 절명한 바람에 초휴의 실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사노야의 실력이 오노야보다 조금 나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습격이 아니라 상대가 대놓고 제대로 칼을 내지른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노야는 초휴의 위압적인 실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노야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손에서 장검이 붕 떠오르더니 그 주위로 위력적인 검세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악씨 가문의 비전검법인 진산검결(鎭山劍訣)로, 태산처럼 묵직한 검세로 공격과 수비가 동시에 가능했다.
이윽고 비할 데 없이 웅혼한 사노야의 내력이 장검을 휘감자, 검 끝에서 검은빛이 번뜩였다. 이는 강기가 장검에 실리면서 일시적으로 생겨난 현상이었다. 잠시 후 양측의 도와 검이 맞부딪혔다. 순간, 초휴는 상대 쪽에서 발생한 한 줄기 흡인력이 홍수도의 기세에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미치는 걸 느꼈다.
초휴는 괴이쩍다는 생각이 들어 멈칫했다. 악씨 가문을 대표하는 성명절기는 공수를 겸비한 진산검결이다. 그런데 사노야가 수련한 내공도 이런 효과를 발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초휴 앞에서는 그 흡인력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뇌우가 퍼붓듯 정신없이 내리치는 홍수도의 빠른 칼날 앞에 사노야는 제대로 반격할 기회마저 잃
고 말았다. 초휴는 상대 장검의 특정 부위를 겨냥해 연달아 수십 번을 홍수도로 내리쳤다. 결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사노야의 장검은 뚝 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홍수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노야의 바로 눈앞까지 치고 들어가 핏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사노야가 외마디 기합 소리와 함께 양손에 검은빛을 띄워내더니 그 손으로 홍수도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홍수도가 기울면서 아슬아슬하게 사노야를 비켜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악씨 가문의 무사들은 원래 주먹과 다리를 이용한 타격 초식에는 능하지 않았다. 다만 아홉 방은 제각기 가업을 일궈나가는 와중에, 더러는 기연을 통해 가전무공이 아닌 다른 출처의 무공을 익히기도 하고, 일부는 비전함에서 기연을 찾아내기도 했다.
지금 사노야가 시전하는 오금장(烏金掌)은 비전함에서 찾아낸 절기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어서 수련을 해왔다. 비상시에 이를 비장의 무기로 활용할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과 같은 상황 말이다. 그동안 닦아온 실력을 모조리 다 쏟아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양손을 위주로 수련하는 무공 가운데 철사장(鐵砂掌) 또는 지난날 통주부 시절의 개산무관 관주 정개산이 익혔던 열금수(裂金手) 등은 하급에 속했다. 주로 수련하는 것도 자신의 맨손과 기혈에 그쳤다.
그러나 사노야가 익힌 ‘오금장’은 내력으로 직접 강기를 제어하는 것으로, 양손에 강기가 응축되면 검은빛이 떠오른다. 오금장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면, 수련자는 사급 이상의 보검에도 맞설 만한 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전문적인 장법까지 가미되면, 적어도 사급의 병기에 필적하는 위력을 양손에 띨 수가 있다. 그리되면 악씨 가문의 비전검법
인 진산검결과도 맞먹을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거 참 대단한 걸 남몰래 감추어두셨군. 모르긴 해도, 이런 장법은 악씨 가문에서 당신만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초휴의 질문에 사노야는 바위처럼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현재 악씨 가문의 아홉 방 중, 그 어느 방도 외강경을 배출하지 못했다. 최고수가 내강경이라는 동등한 조건인 상태니, 각 방의 수장마다 차기 가주 자리를 탐낼 만했다.
사노야 역시, 훗날 가주자리를 노릴 생각으로 오금장을 익혀 온 터였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오늘 자신의 감춰둔 패를 까 보였으니, 낭패가 따로 없었다. 지금 수하들이 죄다 도망간 바람에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누가 봤는지 안 봤는지 생각할 경황도 없었다. 보슬비가 흩뿌리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홍수도의 기세에 막혀 사노야의 오금장이 번번이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맨손으로 칼날에 맞서다 보니, 줄곧 자신의 내력을 써서 초휴의 내력을 소모 시키는 격이었다.
그리고 초휴 내력의 속성에 대해 사노야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사노야가 제아무리 상대의 내력을 소진 시키려 애써도, 초휴가 익힌 선천공은 쉽게 소진될만한 내력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정반대로, 선천공의 내력에 되레 사노야의 내력이 소진되어 그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초휴는 무의미한 소모전을 계속 끌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금장은 확실히 홍수도처럼 예리한 병기에 맞서고도 밀리지 않음이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오금장보다 위력이 훨씬 강한 천절지멸대자양수라면 어떨까. 초휴의 왼손바닥에 어두운 자줏빛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일기관일월의 내력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자 기존의 자줏빛에 짙은 핏빛이 더
해졌다.
초휴가 일장을 내리친 순간, 사노야도 오금장으로 이를 받아쳤다. 순간적으로 강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충격으로 초휴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난 것에 비해, 사노야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사노야의 손바닥에 감돌던 검은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두운 자줏빛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노야는 팔 전체를 부들부들 떨었다. 체내로 파고든 천절지멸대자양수의 장력이 그의 팔을 타고 온몸의 경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내력을 움직여 점점 뜨거움을 더해가는 열기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온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을 느낀 그는 결국 속수무책으로 땅바닥을 뒹굴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
다.
지금 사노야가 느끼는 고통은 산채로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것보다도 더했다. 골수 깊숙이 파고든 자양마염(紫陽魔焰)의 힘은 일반적인 불의 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죽여! 차라리 죽여줘! 제발!”
사노야가 땅바닥을 뒹굴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만을 고민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목숨을 끊어서라도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이처럼 죽느니만 못한 고통은 절대로 살아서 감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초휴가 사노야의 가슴에 홍수도를 찔러넣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골수까지 악인은 아니다.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즐기는 취미는 없으니 말이야.”
초휴가 칼을 뽑아내자, 사노야는 마치 해탈이라도 한 것처럼 편안해진 얼굴로 숨이 끊어졌다. 그는 아마 지금까지 초휴의 손에 죽은 자들 가운데, 죽음을 달갑게 받아들인 유일한 사람일 터였다.
이로써 초휴는 천절지멸대자양수를 두 번 쓴 셈이 되었다. 지난번 썼을 때는 단번에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다짜고짜 심맥을 끊어버렸었다. 그래서 이 장법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이것이 얼마나 섬뜩한 무공인지 여실히 체험한 셈이었다. 초휴와 동급인 내강경 무사들 가운데, 내력을 써서 자양마염을
누를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터였다.
즉, 초휴와 싸우는 상대가 천절지멸대자양수의 일장에 맞을 경우,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된다. 자신의 진기를 소모해서 자양마염의 힘을 누르는 것이 그중 하나요, 자양마염에 불살라지는 고통을 맛보며 죽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그러나 사노야처럼 내력의 기반이 약할 시에는 진기를 사용하기가 여의치 않으니, 결국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자양마염에 불살라지는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다.
물론 극한의 고통을 참아가며 끝까지 초휴와 싸우려 드는 자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양마염이 제아무리 위력이 세다 해도, 상대를 즉사시키는 건 아닌지라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동급의 무사들 가운데 그만한 의지력을 가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고통을 아예 못 느끼는 수련을 대성한 자나 가능할 일이었다. ‘천지교정음양대자비’와 같이 천지도 놀래고 귀신도 울게 할 마공의 일부분인 만큼, 천절지멸대자양수는 단연코 위력적이었다.
사노야의 시신을 집어 든 초휴는 한 무사가 도망친 방향을 쫓아 추격에 나섰다. 바퀴벌레를 방불케 할 속도로 순식간에 흩어진 무사들을 전부 잡아 죽일 재간은 없어도, 그중 한 명을 뒤쫓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윽고 초휴에게 따라잡힌 무사는 어찌나 놀랐던지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초휴는 그를 죽이는 대신, 사노야의 시신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 시신을 갖고 악씨 가문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이 말을 전해주기 바란다. 우리 청룡회는 무고한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그저 임무를 완수하고자 할 뿐이다! 알아들었느냐?”
그 무사는 뭔 소린지 전혀 몰랐어도 고개를 끄덕여야 할 판이었다. 저승사자 앞에서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악가의 대청.
악학년이 한가운데 서 있고, 원래 여덟 명이던 내강경의 인재가 지금은 여섯 명으로 줄어 사노야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잇달아 두 명의 내강경을 잃은 데다, 하인들도 수백 명이나 달아났다. 이는 악씨 가문에 있어 엄청난 타격이었다. 사노야의 시신을 옮겨온 무사가 버벅대며 말했다.
“청룡회의 살수가 이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자기들은 무고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임무만 완수하길 원한다고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은 구석에 서 있던 악노천을 향했다. 이로써 살수의 의도는 분명해진 셈이다. 그동안 살해당한 자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고, 정작 살수가 노리는 표적은 바로 악노천인 것이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못 이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한껏 움츠렸다. 이에 악학년이 기침 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자신한
테로 되돌렸다.
“넷째는 살수에게 살해당했고, 나머지 놈들은 도망친 것이냐?”
무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다른 자들은 사노야가 살수와 맞붙은 동안, 달아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살수가 사노야를 죽인 다음에는 저를 추격했기 때문에 또 시간을 벌 수 있었고요. 그동안 다들 도망쳤을 겁니다.”
“도망쳤다는 것도 나쁠 건 없다. 목숨을 부지해서 달아난 자들이 있으니, 우리의 소식이 신무문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 테지.”
악학년의 말에 삼방 악동행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아버님,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신무문은 저 멀리 연남 땅에 있고 이곳은 연동 땅이 아닙니까. 오가는 데만 족히 한 달은 걸리는 거리란 말이지요. 신무문이 와 줄 때까지 계속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말씀이신가요? 오늘 일로 모든 게 분명해졌습니다. 청룡회 살수가 제아무리 강하다고는 한 명에 불과합니다. 이참에 아예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립시다.
그러면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될 텐데, 살수가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따라잡아 죽일 순 없지 않겠습니까. 한두 명 죽이다가 말겠지요.”
그의 말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좋은 생각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앉아 당하느니, 아예 이곳을 떠나버리면 될 일이다. 예컨대 이미 도망친 하인들은 악씨 가문과는 연이 끊어졌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 목숨 하나는 건진 것이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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