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70)
870화 하늘 밖 하늘
초휴는 그가 공법을 몰래 배울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비급을 통째로 탁본을 뜨겠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설사 똑같은 공법을 동일 종문의 두 사람이 동시에 배운다 해도 효과는 각자 달리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예컨대 ‘천절지멸망아살권’만 해도 강호에 수련한 자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초휴가 시전함에 따라 그만의 고유한 무도 색채가 고스란히 그 안에 녹아나지 않았던가.
대흑천마교의 공법도 마찬가지였다. 초휴는 먼저 시바 신상으로부터 멸세의 화염에 관한 무도 진의를 깨우치고 난 다음에야 이 공법을 얻었다.
따라서 강호 전체를 통틀어 오직 그만이 이 공법에 담긴 무도 진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급기야 이파순이 고의로 혹은 실수로 공법을 틀리게 해석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도 진의를 확실히 깨달은 상태니 이파순의 해석에 오류가 있더라도 직감적으로 금세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이파순에게 공법 비급 한 부 해석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한 시진도 안 되어 해석을 마치고 초휴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그 내용을 모두 써주었다. 작업을 다 마치자 이파순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공법은 한마디로 대흑천마교의 가장 핵심적인 비법이라 할 수 있소. 명칭을 번역하기가 좀 그런데······ 그냥 예전에 곤륜마교가 했던 것처럼 그냥 ‘대흑천마공’이라고 부르는 편이 입에 착착 감기고 좋겠구먼. 이 책에는 대흑천마교, 아니 범교와 관련된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소. 덕분에 나도 수확이 있었던 셈이구려. 이로써 우리 제육천마종이 상고시대 범교의 일부였음이 확실해졌으니까. 대흑천마교의 실체는 범교 산하 시바전 소속의 대흑천마궁이고, 대흑천마신은 시바의 화신 중 하나요. 우리 제육천마종도 시바전 소속의 ‘제육천마궁’이었다는구려. 제육천마도 대흑천마신과 마찬가지로 시바의 화신 중 하나였고 말이지.”
자기 종문의 근원을 찾았음에도 이파순은 수수께끼 하나가 풀린 듯한 쾌감만 느꼈을 뿐, 딱히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고시대를 살았던 제육천마궁 사람들은 이미 죄다 죽은 지 오래인 것이다.
후대의 누군가가 그 유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제육천마종이 재건된 셈으로, 엄밀히 말해서 제육천마궁과 제육천마종은 별개의 집단이라고 봐야 했다. 오래전에 화석이 되고도 남았을 까마득한 과거의 선조를 찾는 일은 이파순의 관심 밖이었다.
이파순은 비급의 마지막 장을 들춰보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비급의 마지막 장에 무언가가 있는데, 그림만 있고 해설하는 글귀는 없구려. 재질을 보아하니 나중에 따로 끼워 넣으면서 새로 제본한 모양이오, 이 그림이 무얼 뜻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초휴가 어깨너머로 보니 이파순이 말한 건 그림이라고 하기도 뭣했다. 얼핏 봐서는 크기가 들쭉날쭉한 동그라미들이 거품처럼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동그라미들 주위로 각양각색의 점과 선이 알 듯 모를듯한 규칙성을 띤 채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봐도 뭔지 모를 그 형상들이 이상하게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동안 생각해봐도 여전히 알 수 없는지라 초휴는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하고 비급을 덮었다.
“이 종주, 크나큰 도움에 감사드리오.”
이에 이파순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 고마워할 게 뭐가 있겠소. 그대나 나나 다 같은 마도 동도가 아니겠소. 이런 일쯤이야 서로 돕고 살아야지.”
두 사람은 별 영양가 없는 인사치레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만하면 이파순이 개인적으로도, 또 제육천마종 종주로서도 꽤 현명하게 처신한 셈이었다.
실력이 없을 때는 누구 편도 들지 않고 섣불리 중립을 지키는 건 한쪽을 편드는 것보다 더 위험한 선택인 법이다.
실력이 있은 다음에야 중립을 지켜도 안전해질뿐더러, 양쪽에서 서로 영입하려는 와중에 몸값도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멀리 남해에 있는 제육천마종은 중원의 다툼에 끼어들 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명마든, 은마든 서로 악감정이 생길 만한 일이 없었다.
게다가 피차 섣불리 건드려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서로 충돌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이번에 모처럼 중원에 왔다가 예기치 않게 초휴와 엮이게 되었으니 이것도 다 기연이라면 기연일 터. 이참에 그와 좋은 인연이라도 맺어두면 좋지 않겠는가.
소문을 듣자니 초휴는 동황태일과도 관계가 좋다 하고 이번에 자기한테 신세도 진 셈이니, 훗날 그가 진정한 은마권의 수장이 되면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있을 터였다.
막말로 초휴가 그전에 요절하더라도 이파순에게는 딱히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책 한 부 해석해준 게 큰 희생인 것도 아니니까.
* * *
그길로 곧장 진무당에 돌아온 초휴는 매경령 등을 불러 그간 무슨 일이 없었는지 점검한 후 폐관에 들어갔다. 이파순이 해석해준 대흑천마공을 수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공법을 수련하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미 시바 신상을 통해 무도 진의를 깨우친 데다 멸세의 화염도 봤으니까. 해서 지금 대흑천마공을 수련하는 건 이미 만들어놓은 물길에 물을 흘려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대전에서도 봤듯이 눈은 세 개요, 팔은 네 개인 대흑천마신은 시바의 화신으로서 파멸을 주관하는 존재였다.
멸세의 화염을 수련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패도적인 위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터득한 멸삼련성전만 봐도 대흑천마공이 얼마나 강력한지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한 달 남짓이 지나자 초휴는 대흑천마공을 얼추 다 터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급한 불부터 끄고 나자 새삼 비급의 마지막 장에 있던 둥근 형상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는 고민 끝에 원길을 불러오게 했다. 원길이 사람은 진중치 못해 보여도 지금 초휴의 휘하에서 그만큼 잡학 다식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초휴가 보낸 자가 원길을 찾으러 갔을 때, 그는 기루에서 기녀를 옆에 낀 채 춤 구경이 한창이었다. 구경하느라 눈이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연신 기녀의 허리를 향해 시선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자에 들어 원길의 생활은 더없이 윤택했다. 그는 예전에 북연에 있을 때도 점술에 있어서라면 큰소리치고 대접받으며 살아왔다.
중간에 섭인룡으로 인해 운명이 꼬이면서 북연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와 있으니 이만하면 금의환향이라 할 만했다. 게다가 북연 최고 점술가라는 소리만 듣던 지난날과 비교하면 든든한 뒷배마저 갖춘 지금이 훨씬 더 나았다.
북연 무림을 관리하는 진무당 무사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방지하느라 각자 도맡은 일들이 있었다. 과도하게 바쁜 건 아니라도 언제나 임무에 매여 있는 처지였다.
반면, 점술가인 그는 때리고 죽이는 일에는 당연히 젬병이었다. 해서 매일 놀고먹느니 나름 장기를 살려 연경성 내에 점술 집을 따로 차리며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었는데, 복채도 만만치 않게 받았다.
그런 사실은 초휴도 알고 있었으나 굳이 못 하게 막지는 않았다. 수하들을 부림에 있어 그들의 충성심에 변함이 없고 본연의 임무에 지장을 끼치지만 않으면, 가외로 무슨 짓에 하든 일절 관여치 않는 게 초휴의 원칙이었다.
원길 역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연경성 내 고관대작들에게 점을 봐줄 때는 천정부지로 값을 요구해도 진무당 동료들에게는 한 푼도 받지 않았으니까.
일전에는 북연의 십삼 황자인 항충인지 뭔지 하는 자가 관상을 봐달라며 그를 찾은 적이 있었다. 자기가 진정 용이 될 관상을 가졌는지 봐달라는 말에 그는 식겁해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렇듯 엄청난 일을 놓고 어찌 함부로 점을 친단 말인가. 점을 쳤다 한들 나온 점괘 그대로 이실직고를 할 수나 있고?
다행히도 매경령이 한발 먼저 달려와 귀띔해 준 덕에 몸을 피해서 만만치 않았을 그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경령도 그를 난감하게 한 건 마찬가지였다. 자기 사주에 아직 혼인수가 남았는지 봐달라지 않는가.
웬만한 사내는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달리 말해 그녀가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는 말을 면전에 대놓고 하기는 불가능했다. 해서 긴가민가 모호한 어휘들만 잔뜩 골라 대충 좋은 쪽으로 둘러댄 다음에야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내내 찾지 않던 초휴가 갑자기 호출했다고 하니 원길은 기녀고 나발이고 냅다 밀쳐버리고 곧장 진무당으로 내달렸다. 그가 헐레벌떡 땀범벅이 되어 들어오자 초휴가 의아하여 물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이리도 다급하게 들어오시는 거요? 진무당 내에 있었던 게 아니었소?”
원길이 겸연쩍은 듯 실실 웃으며 둘러댔다.
“헤헤, 연무장에서 수련 좀 하고 왔습니다. 수련해 봐야 별로 쓸데도 없겠지만 몸이라도 건강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초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짜고짜 그 미지의 도안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대흑천마교에 대한 설명을 한 차례 읊고 나서 물었다.
“혹시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소? 대흑천마교는 이 도안을 자기네 공법 비급의 맨 끄트머리에 끼워놓았더군. 이게 그들한테 상당히 중요한 거라서 그랬을 거 같은데 말이오.”
원길은 표정이 부쩍 진지해지더니 급기야 심호흡까지 했다. 초휴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그의 선입견과 가치관을 적잖이 뒤흔들어 놓았다.
알 수 없는 먼 상고시대의 비밀과도 관련이 있을 이 문제 앞에서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길은 한참을 들여다본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초 대인,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건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은 해봄 직한데······.”
“편하게 말해보시구려.”
“초 대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말입니다······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질까요, 아니면 하늘이 네모지고 땅이 둥글까요?”
이곳은 초휴가 전생에 살던 지구와는 달리 상당히 기괴했다. 서쪽 끝은 사람 한 명 안 사는 사막이고, 북방은 황량한 평원이다. 남만은 산지인 동시에 임해 지역이기도 하고 동쪽 끝은 망망대해였다.
언젠가 거대한 배를 만들어 남해 탐험에 나섰다던 어느 강자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막 항해를 시작했을 때는 무수히 많은 섬과 맞닥뜨렸고 개중에는 무사들이 사는 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향하자 폭풍이 끊이질 않더니 급기야 배가 침몰했다지 않는가. 그는 막강한 실력 덕분에 수면 위를 걸어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남해 끝에 다다르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은 낭떠러지뿐이었다. 거기서 끝도 없이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니, 그곳이 바로 세상의 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전설에 불과했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그렇지, 자신의 반평생을 허비해가며 세상 끝 구경에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원길을 상대로 지구는 둥글다고 말할 수도 없는지라 잠시 고심 끝에 말했다.
“내 생각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 같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말이지요, 대인의 대답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겁니다. 저 같은 점술가들이야 이런 분야에 흥미가 많은 법이죠. 해서 예전부터 생각해둔 가설이 있긴 합니다. 다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렇다면 과연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을까요? 대인, 이 둥근 형상의 것들을 보십시오. 이것들로 가설 하나를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이 동그라미 하나하나가 다 ‘하늘’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여러 하늘 중 하나에 속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존재하고, 그 하늘 안에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세상이 존재합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도합 다섯 개의 작은 하늘들이 한데 모여 큰 하늘 하나가 형성됩니다. 그 큰 하늘의 바깥 세계에서는 또 무궁무진한 ‘하늘’이 펼쳐지지요. 그리하여 또 둥근 하늘과 네모진 땅이 형성된다 이 말씀이죠.”
“지금까지 드러난 단서에 비추어 볼 때, 상고시대 대종문 중 일부는 대겁난이 닥치기 전에 하늘을 열 ‘개천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살던 하늘을 가르고 빠져나가 다른 하늘로 옮겨 갔을 거란 말이지요. 더욱이 그 대흑천마교 사람들이 다른 하늘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늘과 하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이 도안 속의 점과 선들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것들이 하늘과 하늘을 잇는 일종의 연결고리 또는 열쇠 같은 것일 거라는 확신은 듭니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단숨에 설명을 마친 원길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그의 주장은 이 세계에서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발상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그가 이 모든 걸 제대로 추론해냈다 해도 자기 생각이 죄다 옳다고 어찌 감히 단언하겠는가. 해서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덧붙였다.
“초 대인, 이건 그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으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