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74)
874화 동해검성(東海劍聖)
여기는 항륭의 세상이고 그는 북연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죽는 그 날까지 북연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항숭을 통해 이미 다 처리해버린 일들을 이제야 중신들에게 알렸다. 사전에 한마디 언질도 없이, 형식적인 통보만 날벼락처럼 한 것이다.
“가서 구룡인(九龍印)을 가져와 충아에게 인장을 찍어주어라. 짐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최대한 간결하게 속행토록 하라.”
항륭의 분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항숭과 항씨 황족 존장들이 잠시 대전을 벗어났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함 하나를 들고 와서는 조심스레 대전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살아 꿈틀댈 듯한 반룡이 조각된 목함 뚜껑을 열자, 금망이 번쩍이며 강력한 기운이 대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로 인한 위압감을 상천량조차 은연중 느꼈을 정도였다.
초휴가 두 눈에 힘을 주며 구룡인을 응시했다. 그는 그것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그 옛날 북연이 막 건국되었을 당시 북연의 연기대사(煉器大師)들을 총동원했음은 물론, 특별히 현무문과 신병각 전문가들까지 초빙하여 그것을 만들어냈다.
구룡인이 병기는 아니지만, 어찌 보면 병기보다도 더 두려운 물건일 것이다.
그 많은 병기 제련 고수들을 대거 모아다가 구룡인을 만들게 한 것은 이걸 단순히 인장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황실은 매 세대 항씨 일족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이 흘린 첫 핏방울을 구룡인에 떨어뜨렸다.
그리함으로써 항씨 혈맥만이 다루고 부릴 수 있는 지보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더욱이 구룡인의 힘을 배양시킨 장소도 북연의 용맥(龍脈, 풍수지리에서 산의 정기가 흐르는 굽이진 산줄기, 즉 산맥을 의미함) 안이었다.
정기가 짙게 서린 용맥의 혈(穴) 속에서 장기간 배양되는 사이, 구룡인은 북연의 정기와 일체를 이루어 북연과 한 몸이나 다름없게 된다. 다시 말해 구룡인은 그 자체로 북연이며, 항씨 황족 전체를 위한 최후의 보루인 셈이었다.
물론 이런 물건은 북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동제와 서초에도 있었다. 다만 그것들은 인장이 아닌 다른 물건이었다. 용맥의 힘이 이토록 강하건만, 한 황조의 주인 된 몸으로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구룡인은 북연 항씨 황족에게 나라를 통치할 자격을 부여하고 그럴 힘을 실어주는 국보인 셈이었다. 항륭이 구룡인을 내오게 한 것은 항충의 몸에 구룡인을 찍어주기 위함이기도 하거니와, 대전 내 누군가의 기세를 누르기 위한 목적도 컸다.
그게 누구일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초휴 옆에 있는 상천량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상천량이 이 자리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항륭은 이렇게까지 일을 급박하게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지통현인 존재가 내뿜는 기세는 일개 황조를 위축시킬 만큼 위압적이었기에 그로서는 미리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 성주, 만약 구룡인에 대적하게 된다면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초휴가 은밀히 전음으로 묻자 상천량이 한동안 구룡인을 응시하더니 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확답하기 어렵군그래. 용맥의 혈 속에서 배양된 것인지라 천지의 의지가 저 안에 고스란히 응집되었다고 보인단 말이지. 노부는 아무래도 이곳의 전투 방식에 익숙지가 않으니, 실제로 끌어낼 수 있는 천지의 힘도 저 외물만 못할 걸세. 하지만 한낱 외물이 대단해 봤자 한계가 있겠지. 결국, 저 외물을 운용하는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일 걸세. 진화련신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들이 저걸 쓴다면 노부도 이길 승산이 그리 크지 않을 듯하네.”
당대 삼대 왕조 중 가장 최약체로 불리는 서초조차 호국을 목적으로 한 비장의 패를 마련해두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작 동제나 북연, 어느 쪽으로라도 편입되었을 것이다.
구룡인이야말로 북연의 명운을 의탁한 신물(神物), 또는 그런 신물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날부터 북연의 태자는 예외 없이 등에 구룡인을 찍어야만 했다. 구룡인에는 선대 황족들의 피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기에, 그 흔적을 몸에 새기는 것은 정식으로 태자임을 인정받는 의식이기도 했다.
또한, 구룡인을 항씨 황족의 몸에 찍음으로써 당사자는 구룡인과 모종의 연계를 이루는 효과도 갖게 된다. 따라서 당사자가 연경성의 일정 범위 내에 있기만 하면 몸에 상해를 입더라도 구룡인의 힘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황제가 자객에게 암습 당할 때를 대비해 부가된 효능이었다. 매번 효과를 거두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역대 선황들이 여러 차례 위기를 피할 수 있게 해준 건 사실이었다.
구룡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사방천지에 적을 둔 항륭이 언제나 진화련신 여러 명의 근접호위를 받는 것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심 냉소를 머금었다. 항륭은 지금 두려운 게 분명했다.
일국의 황제라는 자가 남을 위협할 목적으로 생각해냈다는 수법이 저렇듯 비열하고 조악할 수가 있다니! 개싸움에서도 두려움을 느끼는 개가 먼저 격하게 짖는 법이다.
그는 확실히 떨고 있었다. 떨며 수세에 몰리다 보니 무리수를 두게 되었고, 이는 필경 북연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게 될 터였다.
실제로 항륭은 지금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느라 생각이 많았다. 초휴는 눈치가 빠르고 계산에 밝은 인물이 아닌가.
상천량을 대동했다고는 하나 다짜고짜 쪽박을 깨려 들진 않을 것이다. 쌍방의 실력을 찬찬히 가늠해본 다음에야 항륭에게 맞설 건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않겠는가.
북연은 항륭의 나라인 동시에, 초휴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기반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항륭에게 엿 먹일 궁리에만 급급하여 판을 업는다면 그간 본인이 쌓아온 공든 탑도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셈이다. 따라서 절대 경솔하게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과연 항륭의 예상이 빗나가지는 않았던지, 초휴는 안정된 표정으로 구룡인이 항충의 등에 찍히는 의식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나치리만치 무덤덤한 그 표정이 되레 항륭을 불안케 했다.
지금까지 항륭이 봐온 초휴는 절대 당하고도 참고 넘길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미 항륭의 계획대로 모든 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진작 판이 다 짜인 마당에 초휴가 술수를 부려봤자 판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지 않겠는가.
이윽고 구룡인 의식이 다 끝나자 항충의 전신은 옅은 금빛 광망으로 물든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그 광망은 항충의 체내로 감쪽같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항충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은 정말로 북연의 태자가 된 것이다! 이 제국의 승계자가 된 것이다!
항륭이 근엄히 말했다.
“충아야, 이로써 태자가 되었으나 아직 너의 나이가 어리니, 각계 중신들의 충정 어린 의견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치국에 있어서라면 저들이 너를 잘 보좌할 것이니 짐은 염려치 않느니라. 다만 네가 무도에 흥미가 많다고 하길래 짐이 특별히 스승 한 분을 모셔왔느니라.”
이번엔 또 뭔 일인가 싶어 좌중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항륭의 말이 떨어지자 항숭이 저벅저벅 나가더니 검을 든 중년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당에 들 때는 북궁백리와 같은 고위 무사들조차 병기 소지가 엄격히 금지되기 마련이다. 조정을 물로 보는 초휴도 이 규정만은 어기지 않았다. 병기를 소지하긴 했으되, 천도전갑을 공간 비전함 속에 고이 모셔두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관절 뭐길래 당당히 검을 들고 이곳에 들어온단 말인가. 그 기고만장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다만 태도만 무엄하기 짝이 없을 뿐, 다른 부분은 평범 그 자체였다. 한껏 일신의 기세를 갈무리한 탓에 정확한 실력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초휴는 그가 진화련신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간단했다. 상대가 자기보다 경지가 아래였더라면 제아무리 완벽하게 기세를 갈무리했어도 금세 간파되었을 테니까.
사내는 군데군데 헝겊을 덧대어 기운 청회색 반팔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쳐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듯한 평범한 면상은 활기가 없다 못해 멍해 보일 정도였다.
초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심 어이가 없어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런 자를 태자의 스승이랍시고 데려오다니! 아무래도 이 북연의 황제 양반께서는 대전을 가득 메운 고수들을 죄다 허깨비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사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틀어서 그나마 값져 보이는 거라고는 수중에 들린 검이 유일했다. 검신은 볼 수 없지만, 검집이 자그마치 거대한 바다 괴수인 날상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검날의 예리함이 고스란히 응축된 그 가죽은 손바닥만 한 크기에도 황금 일만 냥을 호가하는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항륭이 근엄히 사내를 소개했다.
“이분은 네 스승이 되어주실 ‘동해검성(東海劍聖)’ 강동명(康洞明) 선생이시다. 깍듯이 모셔야 할 것이야.”
사내의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좌중은 또 한 번 경악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 일자 초휴가 매경령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저자는 누구요? 보아하니 꽤 유명한 자인 듯한데, 왜 나는 들어본 적이 없지?”
“당신은 모를 만도 하죠. 동해검성은 당신이 폐관 중일 때 중원으로 건너왔어요. 풍만루도 섣불리 저자의 순위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랍니다. 순위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요. 중원 밖 출신이고 지금까지는 줄곧 바다 건너에서 활약해 왔어요. 검도의 조예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평이에요. 한 달 전 돌연 중원에 나타나더니 풍운검총 연지에게 도전해서 세 초식 만에 물리쳤다죠. 그다음으로 좌망검려 종주 심포진에게 도전해서 또 이겼고요. 그러고는 서극 사막으로 가서 검왕성 종주 ‘통천검’ 심천왕도 일거에 무릎을 꿇렸어요.”
“장검산장은 가지 않았다는군요. 저자의 눈에도 장검산장이 도전할 가치가 없는 빈 쭉정이로 보였나 봐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잇따라 삼대 검파한테 삼연승을 거두면서 ‘천하 검도 일인자’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죠. 그의 이름 앞에 ‘동해검성’이라는 별호도 붙게 되었고요. 하지만 워낙 행적이 종잡기 어려운 데다 성질머리도 괴상해서, 검도 강자들에게 도전하길 즐긴다는 것 말고는 딱히 그에 대해 알려진 게 없어요. 저런 자가 어쩌다가 항륭 밑으로 들어가게 된 걸까요? 정말 모를 일이네요.”
강동명이 돌연 중원에 나타난 이유를 매경령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다 항숭이 은밀히 공작한 결과였으니 말이다. 그가 강산각에 갔을 때 우연히 강동명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강동명은 강산각 사람이기라기보다는 그곳의 객경이었다.
검객도 살자면 입에 풀칠은 해야 할 터. 하지만 그는 평생 검을 연마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런 사람이 진귀한 날상어 가죽 검집을 비롯해 수련에 필요한 온갖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 죄다 강산각에서 객경 노릇을 한 대가로 받은 것들이었다.
그는 객경 노릇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면 바람처럼 나타나 한동안 객경으로 지내다가, 돈이 어느 정도 마련되면 또 바람처럼 떠나는 식의 연속이었다.
강산각 측에서 거액의 급료를 제시해가면서 그를 붙잡아 앉히려고도 해봤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그러나 항숭이 대체 그의 귀에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는 몰라도, 그 한 번의 조우만으로 그를 중원까지 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곳에 오자마자 잇따라 삼대 검파에 도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