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78)
878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일전에 은마 일맥의 삼대 장로라는 자들이 들이닥쳐 시비를 따지겠다고 초휴를 볶아댔던 일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 가관이다 싶었던 것이다.
좌우간 성문에서 한 차례 탐색전을 벌여본 것만으로도 초휴는 현 상황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저승 문턱을 넘나드는 상태라고는 해도, 북연의 굴기를 이뤄낸 당대의 명군 항륭은 끝까지 사람을 긴장케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합종연횡과 이이제이의 수법이 노련함을 넘어서 아주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다 싶었다. 사실 제왕이 치국에 서툴러도 휘하의 문관들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또 전쟁에는 젬병이라 해도 진국오군과 같은 대장군들이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세를 꿰뚫는 거시적 혜안과 위기를 대처하는 수완이 받쳐주지 않는 제왕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 항륭이 제시한 조건에 순양도문과 대광명사가 단단히 회가 동해서 말려들어 간 게 틀림없었다.
항륭의 차도지계에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초휴의 분노를 살 거라는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면서도 그들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종국에는 항륭에게 이용당할 게 뻔한데도 뿌리치기엔 너무도 탐나는 미끼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대가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미끼를 던질 줄 아는 능력과 안목이 항륭에게 있었고, 그게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했다.
초휴가 대책 마련을 위해 돌아가려는 순간, 집사 차림의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공수의 예를 취해 보였다.
“초 대인, 우리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당신 전하가 누구시길래?”
“당연히 태자 전하시지요.”
“항충이 나를 찾는다고?”
초휴의 말에 집사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었다.
“호칭에 주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태자가 되신 분의 함자를 친구처럼 마구 불러대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힐책하는 말투였으나 초휴는 거기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까 조씨 장로야 같은 진화련신으로서 대등한 입장이니만큼 그 불손한 말본새를 엄히 손봐줄 만했다.
하지만 이깟 집사 나부랭이를 굳이 얼굴 붉혀가며 혼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인 놈과 호칭 문제로 아웅다웅해봤자 상대방 수준으로 자신의 격이 떨어지기밖에 더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지금 초휴는 항충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가늠하기에 바빴다. 항충이 초휴와 교분을 맺은 건 사실이나, 그리 깊은 관계까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전에 항륭이 대광명사 건을 이용해 초휴를 압박하려 들었을 때 항충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의중을 엿보려다가 그만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야말로 단박에 퇴짜를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항충이 어떤 생각인지 분명해지자, 초휴는 주저하지 않고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여 자기 밑으로 영입이라도 하려고? 만약 그런 일이라면 한번 가봄 직했다.
“앞장서거라.”
초휴는 집사를 따라 태자궁으로 향했다. 최근 몇 년간 태자궁은 계속 비어 있었다. 청소야 꾸준히 해왔다지만 아무래도 사람 온기를 오래도록 잃었던 탓에, 얼핏 보기에도 정돈된 모습은 아니었다.
이름만 태자궁이지, 아직 태자가 들어가 살기에는 적합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태자궁이 새 주인을 맞도록 단장 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인내심이 항충에게는 없었다. 아직도 자기가 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은 것이, 당최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적대다가 그곳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세라 준비 상황이 어떻건 간에 무작정 태자궁에 들어앉고 본 것이다.
초휴가 썰렁한 객청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항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초 대인, 늦어서 미안하오. 내가 친히 마중 나갔어야 했는데.”
그를 힐끗 본 초휴는 항충이 내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듯했다. 그의 눈썰미로 그걸 간파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항충은 지금 득의양양, 자아도취, 기고만장······. 그런 단어들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태였다. 본인이야 애써 그런 심경을 감추려 들었지만, 그래봤자 초휴의 눈에는 훤히 다 보였다.
심지어 초휴를 대하는 말투부터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제 나는 너 따위와 동급이 아니다, 뭐 그런 기분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항충은 황자의 신분이어도, 초휴처럼 강호에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젊은 준걸에게 내 편이 되어 달라고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후에 초휴가 진무당 대도독이 되자 그리 말할 자격조차 없어졌다. 그저 어떻게든 친분이나 유지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항충은 태자가 되었다. 좀 있으면 북연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반면, 초휴는 여전히 음으로 양으로 부황의 압박과 견제에 시달리는 처지가 아닌가.
‘초휴! 진작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은 게 너무도 후회스럽겠지?’
항충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태자가 된 항충은 확실히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초휴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어린 항충의 안목이 짧고 견식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시로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고 기복을 겪으면 그런 부분이야 자연히 해결될 터였다. 해서 초휴는 차분히 본론을 꺼냈다.
“어인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항충은 위풍도 당당하게 상석에 앉았다. 나름 인의와 겸양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던 예전의 조심스럽던 태도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는 소맷자락을 호탕하게 걷으며 운을 뗐다.
“초 대인, 피차 사정을 다 아는 사이에 변죽은 울리지 맙시다. 도불 양맥이 이미 입성했소. 앞으로 진무당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오만······ 본궁이 그대와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수년째가 아니오? 내 마음으로야 당연히 초 대인을 돕고 싶소. 하지만 부황의 준엄한 결정에는 본궁도 별도리가 없구려. 물론 대인이 심려할 필요는 없소. 그대가 본궁을 잘 보좌만 해준다면 진무당은 장기적으로 별 탈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잠시 진무당을 해체하고 태자궁 휘하에 두는 건 어떨까 하오만?”
“훗날 본궁이 대통을 잇게 되면 그때 진무당을 재건할 방법을 생각해 보리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소. 초 대인, 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오. 지난날 그대가 무명지배에 가까운 위상으로 용호방에 올라 있던 시절, 본궁은 그대를 영입하려 했었소. 하지만 그대는 거절했지. 이제 그대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고 강호의 거물이 되었소. 그리고 본궁은 이렇다 할 자기 세력 하나 없던 황자에서 북연의 태자로 올라섰고 말이오. 지금의 본궁이라면 그대를 영입할 자격이 충분할 듯한데?”
이 말을 하는 내내 항충은 한껏 쾌감을 만끽했다. 사실 그가 태자가 되기 전에는 초휴도 그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었다.
쉴 새 없이 항려의 압박과 견제에 시달린 덕에, 그는 황족 특유의 오만한 기질에 물들지 않고 강호인다운 패기와 호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당시 항충은 북연 황실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자연히 강호 쪽으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황가에 태어난 죄로 속박과 긴장 속에 희망도 없이 사느니 차라리 강호를 맘껏 떠도는 협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항륭의 한마디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일거에 북연의 황통을 계승할 태자로 신분이 급상승했으니, 이런 일을 겪고도 예전과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졸간에 너무 엄청난 변화를 겪어서인지 그는 며칠 새 완전히 딴사람이 된듯했다. 황제인 항륭조차,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막내 황자가 이렇게까지 확 바뀔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원래 항륭의 구상대로라면 항충은 그저 멀찍이서 도·불·마 삼자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모두 큰 타격을 입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강산각이 나라를 재건하면 동제의 침공을 대비하는 방패막이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국내외가 안정된 상태에서 항충이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으면 항륭의 대계(大計)는 성공적인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충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간 크게도 벌써 초휴를 영입할 궁리를 한 것도 모자라, 실현 여부도 불투명한 약속을 자기 멋대로 남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날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마음이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항충은, 그간 항려 편에 붙어 자기를 무시해온 자들이 미워죽을 지경이었다. 황제로 등극하는 순간 그들은 어김없이 첫 번째 숙청대상이 될 터였다.
하지만 초휴는 그래도 덜 미웠다. 왕년에 그에게 퇴짜를 맞았던 아픔이 생생하긴 해도, 당시 초휴는 적어도 자기를 무시하진 않았으니까.
이제 그는 태자가 되었고 초휴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은가. 이번 영입 제안은 어떨까? 이번에도 감히 거절할 수 있을까?
그는 상석에서 초휴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황 옆에서 보고 배운 그 미소는, 내가 너의 속내를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능구렁이 항륭과는 달리, 항충의 미소는 아직 풋내가 났다.
초휴는 분노하는 대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하루아침에 태자가 되시더니 흥분한 나머지 꿈을 야무지게 꾸시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태자가 되신 것이 마냥 좋은 일이기만 할까요? 앞으로 북연을 짊어지고 나아가시려면 옥체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항충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초휴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꿈 깨라는 말이 아닌가!
분을 못 이긴 항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은 끝내 내뱉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태자가 되자 흥분이 지나쳤던 건 사실이다. 그건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과도하게 들떴다고 해서 판단력 자체가 흐려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간 부황이 해온 일들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근자에 항씨 존장들이 귀띔해준 덕에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다. 초휴의 세력은 이미 항륭마저 몸을 사릴 정도로 강력해진 상태인 것이다.
오죽하면 도문과 불문마저 끌어들여 그를 견제하려 하겠는가. 부황도 그럴진대 하물며 자기가 지금부터 초휴와 척을 지는 건 곤란했다. 그래봤자 자신의 망신살만 뻗치지 않겠는가.
항충은 애써 분노를 누르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좋소! 아주 좋소! 과연 초 대인은 다르시구려. 수년 전과 달라진 게 없으니 말이지. 정말이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소이다! 그러나 초 대인이 변하지 않았다고 해서 본궁도 변하지 않은 건 아니오. 왕년의 본궁은 진단경의 무도종사를 객경으로 영입하는 것조차 힘든 처지였소. 그러나 지금은 자그마치 천하제일 검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지. 심지어 진화련신 강자들도 서로 내 밑으로 들어오지 못해 안달이고 말이오! 그중 한 분은 초 대인과도 구면이라고 하던데 마침 여기 있으니 지금 한번 만나보시구려. 이 선배, 나오시지요.”
항충의 말이 끝나자 인영 하나가 내당에서 걸어 나왔다. 어이없게도 일전에 초휴와 싸우다 도망친 이추적이 아닌가?
이런 자리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치자 초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심기를 긁어놓더니, 여기서까지 저 역겨운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일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타난단 말인가.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초휴의 눈이 매서운 빛을 발했다.
“이추적, 저번엔 잘도 도망치더군. 그때는 쫓아가기도 귀찮아 내버려 두었건만, 요행히 명줄을 부지했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은인자중할 일이지, 북연엔 또 무슨 일로 나타난 거냐? 누가 그런 용기를 주었지? 누가 그런 배짱을 주었냐고 물었다. 대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