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79)
879화 정(情)
지난번 대흑천마교에서의 일전으로 이추적은 초휴에게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당시 초휴는 완전히 힘으로만 밀어붙여 그녀를 압도하고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종국에 가서는 비법까지 동원해서야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하마터면 주화입마 할 뻔했던 것이다. 천행으로 우연히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심마를 가라앉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무공이 전폐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시의 악몽은 좀처럼 잊히지 않고 그녀의 마음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버틸 용기가 났었다.
그러나 초휴의 호통 소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때 항충이 끼어들었다.
“초 대인, 이 선배는 지금 태자궁의 공봉으로 와있소이다. 예전에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궁은 상관치 않으려 하오. 그러나 내 앞에서 이 선배에게 위해를 가할 시엔 본궁을 무시한 처사로 간주하겠소! 스승님!”
항충이 소리쳐 부르자 ‘동해검성’ 강동명이 어느새 그의 뒤에 와 있었다. 검을 끌어안은 채 멍한 눈빛을 띠고 있는 건 여전했다.
그는 초휴에게 살의 같은 건 전혀 비치지 않았다. 적대감조차 없었다. 하지만 초휴가 여기서 출수하는 순간, 그 역시 검을 뽑아 들 것은 틀림없었다.
항충을 바라보는 초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초휴와 같이 지내본 사람이라면 그가 이런 눈빛을 한 뒤에는 어김없이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죽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뛰는 사람보다 이런 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뭐, 좋습니다. 보아하니 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다 계획이 서신 듯하군요. 그러나 전하께 충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더러는 취해선 안 될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주군과 상극인 신하를 쓰시면 그 후과가 상당히 참담하다는 게 정설이니까요.”
초휴는 이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자궁을 나섰다. 어차피 강동명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이추적을 죽일 수는 없으니 여기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동해검성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었겠는가. 좌망검려 심포진과 검왕성 심천왕도 잇따라 눌러버린 인물이 아닌가. 그의 검도가 얼마나 심후하고 고강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오백년 전 검도계를 평정했던 검성 고경성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적어도 당대 무림에서 그의 적수가 될 만한 검객은 몇 명 찾기도 힘들 터였다.
대개 강동명과 같은 자들은 머릿속에 검도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기 마련이다. 애당초 다른 게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항륭은 대관절 그에게 무슨 조건을 제시했길래 길들지 않은 야생마와도 같은 그가 고분고분 그의 곁에 머물기로 한 걸까? 이는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어쨌든 초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점찍은 이상, 동해검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할아비가 와도 막지 못할 것이다. 아니 동해검성이 아니라 오백년 전의 검성 고경성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정작 항충은 초휴의 위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초휴가 자신의 체면이 실추될까 봐 좀 세게 나온 것이려니 생각했다.
항충이 이추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선배, 마음 놓으시오. 그대가 본궁을 보좌하는 이상, 초휴는 절대로 그대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이추적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억지로 그 말에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전형적인 강호의 낭인 출신이다.
은마 일맥에 합류했다고는 하나, 자기 세력이라곤 한 명도 없이 혈혈단신 혼자 다니는 처지였다. 그런 주제에 황실 예법 같은 걸 접할 기회가 있었을 턱이 없었다.
바로 이때 옥을 깎아 만든 듯 수려한 외모를 가진 백의 차림의 공자가 한쪽에서 걸어 나오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항충에게 웃어 보였다.
“전하, 마음 푹 놓으십시오. 전하는 하늘이 낙점한 태자가 아닙니까. 반드시 저희 부부가 곁에서 힘을 보태드릴 것입니다.”
* * *
초휴는 진무당으로 복귀하자 매경령을 불러 앉혀놓고 밖에서 있었던 일을 죄다 들려주었다.
“이추적 그 요망한 것이 어쩌다 항충과 연결되었을까요?”
초휴의 질문에 매경령도 어이가 없었다. 이추적이 누군지는 매경령도 알고 있었다. 워낙 피차간에 이질감이 커서인지는 몰라도, 그녀와 몇 번 마주쳤던 게 전부였으나 딱히 이유도 없이 얄미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항충 편에 섰다고 하니 매경령은 즉시 뒷조사에 들어갔다. 지금의 진무당은 설립 초기의 진무당과는 차원이 달랐다.
갈수록 가입자가 늘어났음은 물론이고, 정보력에서는 아직 풍만루만은 못해도 연경성 근방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라면 훤히 꿰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매경령은 태자궁 하인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정보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괴이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추적이 항충 밑으로 들어간 건 그녀의 남자 때문이군요.”
“이추적한테 남자가 있다고?”
초휴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이추적이 여전히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이가 꽤 많지 않은가.
“그렇다네요. 당신도 이추적의 과거에 대해 들었죠? 젊은 시절 웹 몹쓸 놈한테 농락당하고 버림받은 뒤로는 이 세상 모든 사내에게 치를 떨었더랬지요. 그런데 지난번 당신한테 중상을 입었던 그때 말이에요. 도주하던 길에 그녀를 저버린 남자의 후손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네요. 그게 바로 항충의 객경, 임풍옥(林楓玉)이고요. 임풍옥의 생김새가 자기 선대와 판박이였던 모양이에요. 당시 임풍옥이 그녀를 주화입마의 위기로부터 구해주었어요.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요. 이래저래 옛날에 애틋했던 감정마저 되살아나면서 임풍옥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군요. 임풍옥도 그녀에게 맹세하길, 선대가 저지른 몹쓸 짓을 자기가 대신 속죄하겠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때부터 이추적은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있나 봐요. 이번 일만 해도 임풍옥 때문에 항충 밑으로 들어간 거라는군요.”
매경령의 보고에 초휴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고를 듣기 전에 그도 나름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봤었다.
예컨대 이추적이 일전에 당한 분을 못 참고 있다가 이참에 항륭에게 의탁해 자기를 엿 먹이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자기한테 불만을 가진 은마 장로들이 결탁하여 작정하고 이추적을 밀어주는 건 아닐까?
하지만 뜬금없게도 이게 다 남자 때문이었다니, 쉽게 믿기지 않았다.
초휴가 의문을 제기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추적의 나이가 적지는 않을 텐데? 대체 그 남자는 몇 살이랍니까? 꼴에 연하남을 밝히는가 보군. 하긴 늙은 소가 연한 어린 풀을 왜 마다할까마는.”
“에이, 당연히 나이를 많이 먹었죠. 나보다도 많은걸요. 임풍옥 그 작자도 쓰레기예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선대가 남긴 단약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선천경을 뚫었어요. 임가 조상들은 나름 쓸 만했던 모양이지만 임풍옥 대에 이르러 집안이 폭삭 주저앉고 일족에서 혼자만 남았어요. 해서 항충이 대접도 못 받던 시절부터 그 밑에 들어가서 문객 노릇을 해왔죠.”
“내가 이추적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사내한테 버림받아놓고 이제 와 또 그 사내의 손자한테 마음을 주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죠. 게다가 그 손자도 별로 좋은 물건은 못 되니 조만간 또 열 받아 피를 토할 일이 생길 거 같단 말이죠. 지금 같아서는 이추적이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아요. ‘정(情)’이란 게 한번 꽂히면 여간 독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의 이성을 흐려놓기 딱 좋죠. 가뜩이나 편집적이고 우매하던 여자가 이제는 그야말로 백치 팔푼이가 되게 생겼지 뭐예요.”
초휴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임풍옥이 좋은 물건이 아닌 건 또 어찌 알았습니까?”
“쳇! 그걸 나 혼자서 상세하게 알아냈을 방법은 없죠. 죄다 임풍옥이 제 입으로 항충에게 나불댄 거예요. 그걸 태자부 하인이 엿듣고서 진무당 첩자에게 정보를 팔아넘긴 거죠. 지금 이추적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예요. 임풍옥에게 철저히 이용당할 게 뻔하단 말이죠. 암튼 이 세상에 사내란 종자치고 좋은 물건이라곤 없다니깐!”
이에 초휴가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거 참, 마구 생사람 잡지 마시구려. 성녀대인 앞에도 하나 놔두고서 그런 소릴 하면 어찌합니까.”
매경령이 그를 향해 힐끗 눈을 부라렸다.
“당신 말인즉슨, 본인이 좋은 물건이라는 건가요? 당신 손에 죽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모르겠네?”
매경령의 눈짓이 워낙 교태로웠던 탓에 순간 초휴마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이거야 원! 차녀대법에 또 진전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그러자 매경령은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받아쳤다.
“내가 아리따운 게 공법이랑 무슨 상관이죠? 어디까지나 사람 자체가 예쁘니까 예뻐 보이는 거죠!”
자고로 여인 중에 본인의 자태에 자신 없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모양이다. 물론 초휴는 그녀와 이런 문제로 아웅다웅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기가 질 게 뻔하니까.
여자에 비해 남자는 상대적으로 본인의 인물에 대해 솔직하게 평가하는 편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강호가 얼굴로 먹고사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예외도 있었다. 자존감이 높은 방칠소는 늘 자신이 여봉선 못지않게 잘생겼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초휴가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냉랭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자들이야 널렸는데 거기에 이추적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큰일 날 건 없지요. 애초에 그럴 깜냥도 안 되는 여자이기도 하고······. 어쨌건 내가 웬만해서는 사람을 정확히 보는 편인데, 항충은 잘못 판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권세에 대한 욕망이 사람을 그토록 확 바꾸어놓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황통을 이을 가능성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막내 황자가 일약 태자로 올라선 데다 즉위도 시간문제이니 왜 안 그렇겠어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에 사람 머리통만 한 황금 덩이가 뚝 떨어진 격이니까요. 그런데도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그건 항륭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일 테죠. 그만큼 심계가 깊다는 말이 될 테니까요.”
초휴가 그녀의 말을 받으려는데 돌연 밖에서 급하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려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매경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항려가 여긴 웬일이죠? 설마 자기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이 시국에 그 용건 말고 우릴 찾아올 이유는 없겠죠. 게다가 그를 황위에 올릴 능력이 우리한테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순간 매경령은 입을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초휴의 간덩이가 이렇게까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불어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줄곧 초휴가 자신 및 진무당의 사업과 권세를 보호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인제 보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북연 황위 다툼에까지 개입할 생각이 아닌가!
초휴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라면 지금 그의 적수는 비단 항륭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북연 황족 및 북연 조정 전체인 것이다.
초휴는 매경령의 말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땅이 꺼질세라 한숨만 쉬었다.
어차피 타이르고 말린다고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건만, 그녀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긴 초휴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벌여온 대담한 짓들이 어디 한두 건인가.
거기에 이번 일이 하나 더 추가된다 해서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