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8)
그런데 뜻밖에도 악학년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건 안 돼. 절대 안 된다! 셋째야, 너는 그저 목숨만 중요하고, 우리 가문의 명예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우리 가문은 수 대에 걸쳐 이처럼 큰 가업을 이루었다. 임중군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가가 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깟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이 모든 걸 다 포기하자고? 지금 우리 악씨 가문은 신무문과의 혼사를 앞두고 있다. 우리 가문이 신
무문보다 많이 처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살수 눈치만 보다가 보따리 싸 들고 야반도주한 겁쟁이 집안에 과연 연회남(燕淮南)이 자기 여식을 시집보내려 하겠느냐? 북릉부의 이 많은 가업만 해도 그렇다. 물건이야 들고 간다 해도, 대대로 내려온 이 가업의 기반은 어찌 옮긴단 말이냐?”
악학년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악동행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부글부글 끓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부친이 겉으로는 가문의 명예를 내세웠지만, 사실 저 노인네가 염려하는 건 악노천의 명예였다. 악노천의 명예가 실추되어 신무문과의 혼사에 차질이 생길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악동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부친이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는 연동 무림을 쥐락펴락했고, 취의장의 장주 섭인룡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찌 된 게 갈수록 소심해지더니 이제는 신무문에 빌붙을 생각밖에 없질 않은가.
지난날 악씨 가문은 신무문의 도움 없이도 잘 해왔고, 당당히 지금의 위상에 이르렀다. 그런데 뭐가 두렵고 아쉬워서 계속 신무문의 눈치만 보며 쩔쩔맨단 말인가.
악학년은 좌중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탁자를 내리치며 선언하듯 말했다.
“걱정들 할 것 없다. 우리의 사정이 신무문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이 분명 지원군을 보내줄 테니까. 지난 백 년간 우리는 온갖 풍파를 다 헤쳐왔다. 겨우 한 달 정도를 못 버틸 것 같으냐. 신무문에서 고수가 와주면 그날로 살수도 끝장이야.”
사람들은 속내야 어떻든 일단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그 한 달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누군가가 또 죽어 나가리라는 것을 말이다.
악학년은 신무문에서 지원군을 보내올 때까지 결사 항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동시에 신무문이 반드시 도우러 와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원군만 와주면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되리라는 기대도 확고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어디 자기 생각대로만 흘러갈까.
대청 회의에서 오갔던 대화 내용이 어느새 가문 전체로 퍼져나갔다. 초휴가 했던 말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여태 애꿎은 목숨만 희생당했고, 정작 이 사달의 진원지는 바로 악노천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게 된 것이다.
살수가 노리는 표적이 악노천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안채에만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그저 안전한 곳에 숨어 억울한 희생을 지켜 보고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초휴가 다시금 살육극의 두 번째 막을 올렸다. 내강경 무사가 연달아 두 명이나 죽은 데다, 하인들도 수백 명이나 이탈한 뒤였다. 악씨 가문의 경계 강도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초휴가 맘 놓고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한두 명으로 끝나던 살인이 점점 늘어나는가 싶더니, 급기야 수십 명까지 불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악씨 가문은 화약통처럼 변해갔다. 화약의 기운이 잔뜩 적체되어 있으니, 그 누구라도 심지에 불만 붙이면 파국이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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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가 인근의 허름한 주막.
이곳은 삼노야 악동행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이 집이 천촉(川蜀, 지금의 사천성) 지방의 음식 맛을 제대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악동행은 소싯적에 문중 사람들을 따라 서초 천촉으로 장삿길에 오를 때가 많았다. 그곳에 머무른 시간이 길다 보니, 어느덧 그의 입맛도 부지불식간에 천촉의 음식에 길들어진 것이었다. 악동행이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이 쏜살처럼 튀어나와 그를 반겼다.
“삼노야, 늘 드시던 것으로 준비할까요?”
악동행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곧장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심사가 몹시 뒤틀린 상태였다. 악씨 가문이 풍전등화나 다름없게 되고 말았다. 본인이야 내강경의 실력을 가졌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살수의 습격을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손실들을 대체 어찌 메우면 좋단 말인가.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악씨 가문 아홉 방 가운데 그가 거느린 삼방의 세력은 대방을 능가하고도 남았었다. 그러나 삼방의 인원수가 워낙 많다 보니, 요 며칠 희생이 제일 컸던 것도 삼방이었다. 삼방에 속한 방계는 물론, 직계도 여러 명이 죽었다. 도망친 하인의 수도 가장 많았다.
반면, 악학년의 비호를 받은 대방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안전한 안채에 오손도손 모여, 다른 방의 보호를 받으며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불공평한 차별 대우를 악동행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친께 따질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혼자 조용히 술이나 마시며 분을 삭일 수밖에.
주막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트인 공간 외에 따로 마련된 방도 없었다. 그러나 워낙 자주 오는 악동행을 배려한 주인은, 이층의 본인 숙소를 개조해 별도로 방을 만들어 두었다. 만 가지 심사가 겹친 악동행이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방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특이한 차림새 하나만으로도 그가 청룡회 살수라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설마 흉수가 이처럼 벌건 대낮에 버젓이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은 악가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다.
‘간이 배 밖까지 튀어나온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악동행은 속으로 외쳤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초휴가 입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떠들지 말고 문이나 닫아. 그리고 얌전히 앉아라. 안 그러면 죽는다.”
악동행의 귀에 초휴의 나직한 음성은 염라대왕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간이 오그라든 악동행은 목젖 언저리까지 치솟았던 비명 소리를 꾹꾹 눌러 삼켰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악동행은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넷째와 다섯째 아우가 저자에게 처참히 살해당할 때도 아마 이런 위압감에 짓눌린 상태였으리라. 아우들보다는 실력이 더 낫다고 자부
해온 그였다. 그러나 저자의 눈엔 도긴개긴으로 보일 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악동행은 살수 앞에서 절로 쪼그라들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비명을 질러 문중 사람들을 불러낸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일 게 뻔했다. 악동행은 갈등에 휩싸였다. 본인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소리를 질러 문중 사람들이 올 때까지 살수의 발을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우선 자신부터 살고 볼 것인가.
고민하던 악동행은 결국 대의보다는 실리 쪽을 택했다.
마침내 악동행은 방문을 닫고 초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탁자를 부여잡고 나직이 물었다.
“정말 대담하구나! 이렇게 훤한 대낮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타난 거냐! 네놈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도 우습게 보였더냐?”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가문에 쓰레기들만 잔뜩 있는 건 사실이오.”
초휴는 상대가 화를 참느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고 말꼬리를 돌렸다.
“물론 삼노야 당신은 예외요. 악씨 가문에 그대처럼 사리 분별이 가능한 자들이 드물다는 게 큰 문제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대낮에 내 앞에 나타난 용건이나 말해보시오.”
악동행이 코웃음으로 응수하긴 했지만, 어쨌든 살수가 자기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확인한 셈이었다. 죽이려고 했다면 지금까지 자기를 살려둘 것도 없이,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손을 썼을 테니 말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삼노야도 잘 알 것이오. 사실 내 요구는 간단하오. 그저 임무만 완수하면 된다는 말이외다.”
“목가 잔당이 당신한테 얼마나 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린 그보다 더 많이 줄 수 있소.”
“삼노야, 말씀을 그리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세계에도 엄연히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오.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따른다는 말이지요. 내가 청룡회의 규칙을 깨면 그 대가는 다름 아닌 나 스스로가 치르게 될 텐데, 내가 어찌 삼노야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그 말인즉슨, 결단코 우리 가문을 파멸시키겠다는 거요?”
악동행이 죽일 듯이 초휴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 내가 인편에 전한 말이 있었는데 설마 못 들은 겁니까? 나는 분명 임무만 완수하면 된다고 하였소. 당신 귀에 거슬려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군요. 사실 악씨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오로지 대방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아시지요? 악노천의 방패막이로서 말입니다.”
순간 악동행의 안색이 변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악동행을 바라보는 초휴의 눈동자가 소용돌이처럼 서서히 휘돌았다. 그 눈동자는 은밀하게 방 안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말씀이오? 설마 본인 스스로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겁니까? 애당초 목씨 가문을 치자는 게 누구의 발상이었소? 다름 아닌 대방과 악노천이 아닙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긴 건 누구였소? 물론 그들이었지요. 신무문에 빌붙은 건 누굽니까? 그것도 대방과 악노천이오. 신무문이 악씨 가문
을 도우러 온다 해도, 결국 그들이 돕고 보호하려는 건 대방인 셈이지요. 신무문과 얽히기 전까진 아홉 방이 돌아가며 동등하게 가문을 통솔했었소. 그리고 그중 능력이 강하고 가문에 대한 공로도 컸던 방의 말에 힘이 실렸고요.”
“하지만 지금 사정은 어떻소? 대방이 신무문에 줄을 댄 후 모든 판세가 싹 바뀌지 않았느냔 말이오. 가문의 최고 어른인 악학년도 이젠 대놓고 대방의 편을 들기 시작했더군. 지금까지 나는 악가 사람들을 적잖이 죽여왔소. 하지만 정작 내가 죽이려는 표적에는 근처도 못 간 상태요. 그렇다면 대방도 아닌 당신들이 굳이 나를 막아설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
까? 대방 대신 희생하여 당신들한테 남는 게 뭐가 있다는 것이요. 그저 개죽음만 당한 것뿐이지 않소.”
“수십 년, 수백 년 후에 대방이 가문을 확실히 장악하고 나면, 그때가 돼서는 대방의 자손들로 직계가 구성될 겁니다. 그럼 당신들은? 그야 당연히 방계로 밀려날 수밖에. 당신들이 가문을 위해 희생한 공로를 훗날 알아줄 후손이나 있을까? 천만의 말씀. 삼노야, 이건 너무도 불공평한 결말이 아니겠소? 말하다 보니 제삼자인 내가 화가 치밀 지경이군, 그
래.”
초휴가 말하는 내내 악동행은 상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줄곧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악동행은 전혀 이상한 낌새를 못 느낀 채, 그저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천절지멸이혼대법에 걸려든 것이다.
사실 초휴는 이혼대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악동행과 같은 내강경 고수의 정신을 온전히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은연중에 상대의 심리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어느 특정한 감정을 자극하는 건 가능했다.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그 효과는 더 컸다.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악동행의 마음은 초휴가 내뱉은 세 글자에 온통 잠식당한 상태였다.
‘불······. 공······. 평······!’
지금껏 악씨 가문 아홉 방은 오로지 능력으로 평가받고 존중받아왔다. 큰형님 악동림이 서열상 대방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가문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일찍이 문중 고수들을 이끌고 밖에서 악전고투를 치렀던 것도, 상단을 이끌고 만 리 밖 서초까지 장삿길에 올랐던 것도, 그래서 수년씩이나 집에도 못 돌아왔던 것도 죄다 삼노야, 자신이었다.
따라서 가문 내에서 가장 명망 높고 존경받는 이도 단연코 자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큰형님의 아들 악노천이 신무문의 여식과 붙어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친의 마음은 나날이 대방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방 사람들은 그저 대방의 방패막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 가주 자리 하나만 바라보고 여태 달려왔건만, 지금 같아서는 그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수십 년 후에는 자신의 혈통이 방계로 전락하게 생
겼다.
‘불공평한 일이야! 결단코 불공평해!’
초휴는 악동행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을 확인하자 이혼대법을 거두면서 말했다.
“삼노야, 내 뜻은 변함이 없소. 나는 그저 내 임무만 완수하면 그뿐이오. 악씨 가문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한낱 외부인인 나도 고구마 열 개는 처먹은 기분인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싶구려. 악학년과 대방의 처사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문중에 어느 정도일까? 단언컨대, 적지는 않을 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도록 하지요. 악씨 가문의 규모
가 이렇게나 크니, 설령 절반이 죽어 없어진다 해도 임중군에서의 위상은 여전할 겁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는 삼노야가 잘 생각해 보시지요. 그럼 난 물러갈 테니 식사 맛있게 하시구려.”
말을 마친 초휴는 창문을 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안에는 세상의 불만이란 불만은 전부 집어삼킨 얼굴을 한 악동행이 우두커니 남겨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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