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880)
880화 나라를 팔아먹다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항려는 초휴를 보자마자 달려들더니 그의 손을 붙잡고 부르짖었다.
“초 대인! 날 좀 살려주시오! 제발 날 도와주시구려!”
초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서히 진기를 흘려보내자 항려의 몸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무래도 남자한테 손이 잡히는 건 익숙지가 않았다.
“전하, 고정하세요.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전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급하십니까?”
초휴는 일단 항려를 진정시켜서 의자에 앉힌 후 찬찬히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불과 며칠 새에 항려는 몰라볼 정도로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의 그는 세상천지가 죄다 자기 것인 양 기고만장하긴 했어도 나름 황족으로서의 기개는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얼굴은 반쪽이고 수염과 머리를 다듬을 정신도 없었는지 봉두난발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장시간 잠을 못 이룬 탓으로 흰자에는 핏줄이 잔뜩 돋아있고 눈덩이는 움푹 들어간 것이, 한마디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그간 생지옥을 겪다시피 한 그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전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태자 자리를 항충에게 뺏긴 게 치가 떨리도록 분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항충이 자신의 입지가 공고해지면 제일 먼저 항려의 목부터 벨 게 뻔하지 않은가.
그동안 자기가 항충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런 일을 안 당한다는 게 이상할 터였다. 십삼제가 그간 얼마나 자기를 증오했겠는가. 그런 끝에 황위에 오르면 자기를 살려둘 리 만무했다.
황위를 두고 혈육 간에 상잔의 비극을 당하는 게 어디 한두 해 있어 온 일이던가. 자고로 황위 다툼에서는 일말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부황 항륭은 자신의 친형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부황이 한 짓을 항충이라고 못할 리가 있겠는가.
더불어 요 며칠간 항려는 세상인심의 무상함도 여실히 체감했다. 그의 밑으로 들어오마고 약속했던 세력들, 장수들, 문관들, 그리고 황족이나 공신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자 순식간에 항충한테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오늘도 그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술에 의지해 시름과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깨너머로 초휴가 항충과 마찰을 빚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자기가 초휴와 손잡은 상태라는 데 생각이 미친 그는 하늘에서 한줄기 서광을 본 듯했다. 비록 항륭에게 견제당하는 상태라고는 하나,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이는 초휴가 유일하지 않은가.
이에 황족의 존엄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마지막 남은 구명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이윽고 항려가 심호흡을 하더니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초 대인, 내가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제 귀신도 모르게 죽을지 모르는 처지라오. 나는 오늘 끝장을 볼 작정으로 왔소이다. 초 대인이 날 구해주기만 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남김없이 대인에게 내어 주리다!”
항려는 초휴 앞에서 자신을 본왕이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그깟 허울뿐인 호칭이 목숨을 구해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당장은 그 무엇보다도 초휴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이에 초휴가 담담히 말했다.
“전하, 죄다 기우(杞憂)이십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레 걱정하실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하늘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항충도 아직 즉위하기 전이고요. 오랜 세월 태자 자리가 비어 있었으나, 그 자리의 실질적인 주인은 줄곧 전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걸 잃으셨지요. 진정 그 울분을 참아 누를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 목숨 부지할 궁리에만 급급하실 때가 아니란 말이지요. 그리도 배짱이 없어서야 무슨 일을 도모하겠습니까?”
초휴의 이 말은 마력이 실려 있는 듯 항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항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빛을 번쩍이며 그의 말에 빠져들어 갔다.
“전하, 원래 전하의 몫이었던 것들을 되찾고 북연 황좌의 주인도 되고 싶으시겠지요?”
항려가 잠시 멈칫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북연 황좌의 주인이라니? 내게 아직도 그럴 기회가 있겠소? 이미 부황의 분부가 떨어졌네. 다들 벌떼처럼 항충 밑으로 모여들고 있다니까. 어디 그뿐인가? 항충 그놈은 ‘동해검성’ 강동명을 사부로 들인 데다 구룡인까지 차지한 몸이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게 곧 그놈 차지가 될 테지. 이런 판에 내가 무얼 갖고 싸우겠소? 맨몸뚱이 하나로 싸울 수야 없지 않나 말이오!”
초휴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지그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전하더러 항충과 싸우라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모두 제게 맡기시면 되니까요. 전하께서는 그저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장담컨대, 반드시 전하를 황좌에 앉혀드리겠습니다. 물론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조건 제 말에 따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말짱 수포일 테니까요. 저 혼자 아등바등 힘쓴들 전하께서 협조를 안 하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휴의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적잖이 안정을 되찾았긴 했으나, 항려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초 대인, 정말로 나를 도와서 내가 황좌를 되찾게 해줄 자신이 있소?”
“전하께서 저를 믿기만 하시면 가능합니다!”
초휴가 힘주어 말했음에도 항려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다.
“그러나 어째서 나를 도우려 하오? 그리해서 대인은 무얼 얻을 수 있다고?”
그 물음에 초휴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답했다.
“북연이죠! 전하의 부황인 황제만의 것도 아니고, 항씨 황족만의 것도 아닌 북연 말입니다. 항충은 부황으로부터 모든 걸 물려받게 되겠죠. 따라서 부황이 추진해온 정책 역시 고수해 나가려고 할 겁니다. 따라서 항충이 황제가 되면 제가 손해 볼 일이 많아집니다. 저로서는 대단히 탐탁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제가 북연의 안정을 도울 겁니다. 북연 강산은 전하께서 가지십시오. 대신, 북연의 강호는 저의 것입니다.”
초휴는 아예 대놓고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적나라하게 피력한 그의 권세욕이 역설적이게도 항려를 안도케 했다.
북연을 둘이서 나눠 갖자는 말에도 그는 전혀 노엽지 않았다. 막말로 초휴 본인이 황좌를 갖고 싶다고 말해도, 자기가 평생 누릴 부귀영화만 보장해준다면 항려는 기꺼이 협조할 생각이었다.
이 세상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항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양보하지 못하겠는가. 그는 정말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서 항려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초 대인이 나를 황제로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무슨 조건이든 수락하겠소! 이 북연 강산은 항씨와 초씨의 공동 소유요!”
그제야 초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매경령도 문밖에서 이 모든 내용을 듣고 있었다.
워낙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몰래 엿듣는 게 아니라 대놓고 듣고 있었다. 방금 항려는 초휴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말이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초휴의 수법은 교묘하고 악랄하기가 제육천마종 사람들 저리가라였다.
상대의 마음속에 이미 심마가 자리잡은 상태라면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설령 심마가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대의 심지를 건드려 입마(入魔)시키는 건 간단했다.
항려는 때맞춰 잘 온 셈이었다. 그가 오지 않았으면 초휴가 먼저 찾아갔을 테니 말이다.
항륭은 이미 진무당을 짓누르려는 대계에 돌입했다. 항륭의 승계자로 낙점받은 항충은 심지어 오늘 초휴와 껄끄럽게 헤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니 항륭의 유지를 받들어 진무당을 핍박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항씨 천하를 엎어버리고 초휴 본인이 황제가 되는 건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파국의 시발점을 항려 쪽에 두는 게 현명한 계책일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초휴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일전에 은마 사람들을 조정 각 부문에 심어 주십사 부탁드렸던 건을 기억하십니까?”
초휴는 위기감지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지난날 항륭과 처음 틀어졌을 때, 항충마저 그를 도우려 하질 않자 그는 차선책으로 항려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에게 끈을 대는 한편, 조정 곳곳에 은마 사람들을 은밀히 넣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이제야말로 그간 잠입시켜 놓은 자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초휴의 질문에 항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야 줄곧 해오고 있었소. 이미 적잖은 수가 조정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이미 실권했고, 왕년에 내게 꼬리 치던 그 망할 개잡놈들은 이제 항충 쪽에 붙어 버렸지 뭐요. 지금 내게 남은 이 알량한 힘으로 더 잠입시키는 건 무리요.”
이에 초휴가 손사래를 쳤다.
“아, 그 점이라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도 이미 들어간 자들이 발각될 위험은 없을지요?”
“그럴 위험은 전혀 없소. 당시 조정 내 그들을 배치했던 자들조차 임명받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지시를 이행했으니까. 당시만 해도 내 권위 하나면 뭐든지 가능했지. 저들은 내게 감히 캐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 의도를 엿보려고도 하지 않았거든. 지금이야 그 인사 배치 건은 죄다 잊은 지 오래일 거요.”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별 탈 없겠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돌아가서 기다리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녕 그러기만 하면 되겠소?”
항려가 의아하여 묻자 초휴가 되레 반문했다.
“아니시면 전하께서 지금 무얼 할 수 있으신가요? 직접 잠복 암살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항충 휘하의 세력과 친히 결판을 내시렵니까?”
이에 항려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긴 하구려.”
당장 자신의 수중에 남은 알량한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시도할 수 있으면 애당초 초휴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지도 않았겠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남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연기를 해주시면 좋겠군요. 지금처럼 세상 다 산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계시면 됩니다. 지금 심정 그대로의 모습으로 계시면 될 테니 딱히 연기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초휴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항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초휴가 하라는 대로만 해서 가능할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휴를 무작정 믿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항려가 돌아가자 매경령이 다가와서 물었다.
“진심이에요? 정말로 항려를 황제로 추대할 생각인가요?”
“물론이죠. 진심이 아니라면 항려와 긴 얘기를 뭐 하러 나눴겠습니까?”
초휴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우리도 슬슬 반격을 시작해야죠. 항륭이 선공에 나섰는데, 우리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 당하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뭐부터 하죠?”
매경령도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초휴의 머릿속에 계획이 다 서 있다면, 진무당 사람들은 옆에서 협조나 잘하면 될 터였다. 누가 뭐래도 진무당의 중심축은 초휴가 아닌가.
“간단합니다. 우선 요즘 오앙도인이 무얼 하며 지내는지나 좀 알아봐 주시지요.”
* * *
이때 오앙도인은 내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말 그대로 내뺄 준비였다.
근자에 오앙도인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고, 현실적으로 죽은 듯이 조용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최근의 북연은 혼돈 그 자체였다. 강자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오앙도인과 음산파의 알량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게 된 것이다.
사실 오앙도인은 진작부터 북연 조정의 일원으로 행세해왔다. 조정이 무림과 연합하여 동제를 칠 때부터 합류했으니, 이만하면 조정과 함께한 세월이 꽤 유구한 셈이다.
이는 당대 삼국 중 유일하게 북연이 무림과 손을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조정은 정도이건 마도이건, 종문 소속이건, 뒷배 없는 낭인이건 간에 출신을 불문하고 무림인이라면 환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항륭과 무림 세력의 갈등이 격화되었을 때도 오앙도인은 여전히 항륭을 따르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정말이지 달리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