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00)
900화 붕어하다
상천량은 상성에서 농사를 짓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은마권 사람들이 몰려와서 초휴가 느닷없이 그를 호출했고, 이렇게 허세를 부리게 된 것이었다.
아래 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초휴가 말했다.
“이추적은 내가 죽였소. 일이 그렇게 되었고,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소. 아직도 해명을 더 듣고 싶은 분이 계시면, 내 여기 상 성주와 함께 소상히 해명해 드리지요.”
상황이 이쯤 되자 무마교는 즉각 일어서더니 공수를 올렸다.
“이만 가보겠네.”
유마애 역시 공수를 올렸다.
“실례했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법도란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한테나 소용이 있는 것이다. 법도를 지킬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에게 법도 운운하며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동문을 죽인 일을 초휴가 해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천지통현 강자까지 끌고 나왔는데 누가 해명을 요구하겠는가?
사도기와 다른 사람들은 화가 솟구쳐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나 결국은 누구 하나 제대로 따질 엄두를 못 내고 그냥 가 버렸다. 정말로 초휴가 상천량과 함께 그들을 죽여 버리지는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초휴가 은마권 원로 선배라는 신분 정도는 고려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알 듯했다. 그런 것은 초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이추적을 죽였는데 두 번째라고 못 할 거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내심 유마애 무리한테도 못났다고 욕을 퍼부었다.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 버리다니. 그들이 가버리지 않고 은마권 원로라고 함께 위세를 부리면 초휴가 그리 기고만장할 수 있겠는가?
연경성을 나선 사도기는 유마애와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여러분, 오기 전에 뭐라 하셨소? 초휴가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마권의 법도는 어찌 되겠느냐, 그렇게 소리높여 떠들지 않았소? 그런데 그리 쉽게 자리를 뜨다니! 남들 웃음거리가 될만한 처신을 한 것을 알기는 하시오!”
유마애는 얼굴이 빨개졌으나 이내 차갑게 웃었다.
“해명할 게 있어 보이질 않으니 어쩌겠소? 이추적 본인이 죽음을 자초했는데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오? 애초에 이추적이 초휴한테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달려든 게 문제였소. 그러지만 않았으면, 초휴가 온 강호를 쫓아다니며 그녀를 죽이려 들기라도 했겠소? 더군다나 천지통현 강자까지 옆에 있는데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오? 정말로 목숨을 내던지고 초휴와 끝장이라도 보자고?”
“초휴가 법도를 어겼다고는 하나 그렇다 해도 은마권 사람이고, 위 옹도 그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베풀었소. 아무리 기고만장한들 공공연히 은마를 배반하지는 않을 거요. 끝장을 보지 않겠다면 좀 불만이야 있어도 같은 편이고, 끝장을 보자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웃음거리지. 되려 그런 행동이 온 강호의 웃음거리란 말이오!”
사도기는 말문이 막혀 결국은 콧방귀만 뀌고 말았다.
“초휴는 매나 승냥이 같은 놈이오. 애초에 법이고 나발이고 없는 자란 말이오. 지금도 은마권 법도를 이렇게 무시하는데, 여러분은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느라 화도 못 내는구려. 이러다 언젠가 은마권 전체가 그자의 손에 무너지고 말 거요!”
그렇게 말한 사도기는 곧장 떠나 버렸다. 기세등등하게 심문을 하러 와서는 무안만 실컷 당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상천량은 아직 가지 않고 진무당에 남아 있었다. 그는 호미를 든 채 물었다.
“그들은 자네와 동문인가? 동문인데 왜 자네를 깎아내리려 드는 건가? 이런 상태가 되었으면 얼른 갈라설 일이지, 아직도 같은 편이라면서 지내고 있단 말인가?”
초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복잡하게 얽힌 일이라 상 성주는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요. 녹도에서는 혼자 살아남을 수 없지요. 그러나 바깥세상에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소. 그래서 오랫동안 목표고 뭐고 없이 살다 보면, 제 눈앞의 이익만 보이고 전체의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거요. 옛날 곤륜마교가 궤멸당했을 때는 은마도 단결되어 있었지요. 하나같이 머리를 싸매고 독고유아가 돌아와 곤륜마교를 재건하기를 기다렸소. 그러나 오백년이 지났고 독고유아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뜻도 흩어지고 저마다 속셈이 달라졌으니, 단결이 잘 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상천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여기 사람들은 배가 부른 거라네. 사는 게 너무 편하다 보니 암투나 일삼는 게지.”
초휴는 멈칫했다. 상천량의 그 말이 듣기 좋지는 않았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일 이 세상도 녹도처럼 변한다면 어떨까. 온갖 술수나 암투가 없어질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무슨 체면이나 법도 따위를 겉으로 내세우며 해코지를 하겠는가?
“참, 상 성주. 요즘 상성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소. 그런 일은 무공을 모르는 노인들이나 여자들에게 맡기면 될 텐데, 왜 직접 하시는 거요?”
상천량은 담담히 말했다.
“상성에서는 성주도 항상 앞에 나서서 싸웠네. 농사일 역시 성주가 앞장서야지. 그리고 요즘 상가 선조들이 남기신 기록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네. 상고 시대 선조들의 무도 전승도 복습하고 말이지. 천지통현이란 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 천지까지 수련하는 것일세. 녹도에서는 천지가 모두 무너지고 상한지라, 내가 수련한 천지도 완전할 수 없었네. 하지만 여기서 다시금 천지와 감응해 보니 좀 다른 게 느껴지더군.”
그렇게 말한 상천량의 손에서 초록색 빛이 한 가닥 반짝이더니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잡초 같은 뭔가가 벽돌 바닥을 깨부수고 강인하게 솟아올라 머리를 내밀었다.
“별빛 같은 불이 온 들을 태운다지만, 들불에도 타지 않는 잡초 한 포기가 있다네. 한 가닥 생기만 남아 있으면 다시 자라나지. 이 세상은 너무 커. 너무 크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뭔가를 깨달아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일세. 내가 농사를 짓고 있지만, 사실 갈아엎는 것은 나 자신의 단전인 셈이지.”
그렇게 말한 상천량은 호미를 든 채 나갔다. 상성에 있을 때의 흉악하고 사나운 기세는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속세를 벗어난 듯한 표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인세를 벗어난 고인 같았다.
초휴는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허리 키만 한 잡초를 바라보다 아래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진무당 대청을 새로 꾸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해놨군그래. 이걸 물어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놔둘까? 역시 물어내라고 할까?’
* * *
북연 황궁 대전.
북연은 검은색을 숭상했으므로, 황궁도 대체로 음침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북연 황궁의 분위기는 더 음울했다. 항륭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북연 항씨 황족의 핵심 인물 수십 명이 황궁에 모였다. 침상에 누운 항륭의 호흡은 매우 희미해진 상태였다.
태의 몇 명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피로 때문에 이마가 땀투성이였으나 쉴 수도 없었다. 잘못했다가 자신들도 순장될까 두려워서였다.
그 자리에 모인 북연 황족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 항륭을 원망하는 그의 친동생 항숭 이외의 사람들은 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냉담해 보일 지경이었다.
황제와 황족은 완전히 다르다. 북연에서는 항륭 일맥만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 일맥에 온통 폐물뿐이라 해도 그 폐물 중 하나가 황위에 올라야 했다. 그들이 적통이기 때문이다.
다른 북연 황족 중에도 옛날에는 적통이었던 이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상 때 분봉을 받아 나간 후로 그들은 그저 일개 황족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북연은 왕조라기보다 세가와 비슷했다. 그들은 항가 왕조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공을 세웠다.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왕조의 모든 힘을 동원해 그들을 먹여 살렸다. 그게 양측이 공생하는 모습이었고 양측의 관계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 항륭이 죽는다 한들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었다. 새로 등극할 황제가 예전처럼 그들에게 충분한 이익만 제공해 주면 그만이니까.
그들은 슬프지 않았으나 항숭은 슬펐다.
항숭은 철저한 냉혈한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항륭이 큰형과 황위를 놓고 싸웠을 때 그는 몹시 상심했고, 항륭을 깊이 원망했다. 그러나 막상 항륭이 죽어가는 것을 보자 원망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반나절을 애쓴 태의들은 서로 마주 본 끝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왕야, 신 등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폐하는 이제 더 버티지 못하십니다. 정신도 흐려지시기 시작했습니다. 약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구급 단약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님께서 말씀하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항숭은 심중의 슬픔을 억누르며 물었다. 태의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자극을 주면 정신이 더 빠르게 흐려지실지도 모릅니다.”
항숭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실 수 있도록 해 주게.”
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침을 꺼내 항륭의 대혈 몇 군데에 찔러넣었다. 이미 죽은 사람 같던 항륭이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초점 없는 시선이 항숭을 향하더니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힘없이 말했다.
“이제는 나를 형님이라 불러주는구나.”
항륭이 그 말부터 할 줄은 몰랐던 항숭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님, 남기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는 항륭의 손을 잡고 물었다. 항륭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뒷일은 다 안배해 두었고, 하고 싶은 말도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충아가 즉위한 후의 일은 그 애에게 달린 것이지.”
거기까지 말한 항륭은 갑자기 항숭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온 힘을 다 써버리듯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아쉽도다! 그러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말을 마친 항륭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항숭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궜다.
“형님!”
항륭은 시비와 공과를 명확히 구분해서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동생인 항륭은 형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 같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친형을 인정사정없이 죽여 없앤 냉혈한이었다.
아버지로서의 항륭은 정무에 바빠, 가장 총애했던 아들 항충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다른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나 속으로나 합심하지 못한 아들들은 형제끼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그러나 북연 황제 항륭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합격선을 넘어 뛰어난 군주라 할 수 있었다.
북연은 본래 수많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항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제 황제가 아무리 폐물이라지만 나라의 크기만으로 천하를 쓸어 버리고 수많은 소국을 멸망시켜 통일을 이뤘을 것이다.
그러나 북연의 항륭이 있었다. 그는 북연 무림이나 서초 등, 연합할 수 있는 세력은 모두 끌어들여 힘을 합쳤다. 그리해서 결국 동제의 확장을 막고 천하 삼분의 형세를 굳힌 것이다.
그는 아쉬웠다. 지금 천하의 군주는 하나같이 용렬한 무리뿐이지 않은가.
시간이 더 있었으면, 동제가 해내지 못한 과업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동제가 실패한 천하 통일의 위업을 그는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수천, 수만 명에게 욕을 먹어도, 친동생에게 평생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다시 기회를 준다면 역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시비와 공과는 세월이 흐른 뒤, 후인들이 평가할 것이다. 어쨌거나 항륭은 결코 그가 걸어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북연 소무(昭武) 육십이년, 항륭 붕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