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08)
908화 작은 누각에서 밤새 듣는 봄비 소리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황보 노야가 황위 쟁탈전 때문에 온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초휴가 손자를 죽였나? 아니면 손녀를 겁탈하기라도 한 걸까? 왜 저렇게까지 목숨을 내던지며 싸운단 말인가?
황보 노야가 불태우고 있는 것은 기혈이 아니라 그의 원신이었다!
혈홍제는 전장에서 쓰이던 흉기였다. 황보 노야의 힘으로는 본래의 위력을 발휘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혈홍제를 써 본들 황보 노야 자신이 병기에 거치적거리는 짐이 되는 셈이었다. 해서 그는 아예 원신의 힘을 불태워 혈홍제에 흘려 넣은 것이다.
혈홍제에는 아직 기령이 남아 있었고 좀 손상을 입기는 했어도 아직 온전한 상태였다. 옛날 전무마존이 그를 휘두르며 적을 토벌하고 다녔던 시절의 기억도 있었다.
황보 노야는 아예 자신의 원신을 연료로 삼아, 모든 힘을 기령에게 공양함으로써 혈홍제가 알아서 출수토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신을 불태우는 것은 정혈을 태우는 것과는 또 달랐다.
기혈을 잃으면 나중에 메꿀 수 있지만, 일단 원신을 불태우면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오는 것이다.
물론 황보 노야에게 그런 거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죽을 생각을 하고 이 일을 벌였으니까.
무궁무진한 원신의 금빛 속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혈살의 기운을 담은 혈홍제가 초휴를 찔러 들어왔다. 창날 뒤로 피의 바다가 끌려오는 듯했다.
파해의 일도가 창과 맞부딪힌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진동이 사방으로 울리며 소름 끼치는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혈홍제는 아무 손상도 입지 않은 듯했다. 기세는 여전히 호쾌했고 전의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심지어 초휴가 밀리고 있지 않은가.
“전무마존의 실력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그가 남긴 마병마저 위력이 이럴 정도로?”
혈홍제의 위력은 초휴의 예상 밖이었다. 병기 하나가 이렇게 강할 수 있다니. 그러나 혈홍제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왕검만큼은 아니지 않겠는가?
육강하가 말했다.
“혈홍제가 강한 게 아니야. 옛날 전무마존이 혈홍제로 살육을 벌일 때 남은 표지다. 저 늙은이는 원신의 힘을 태워 혈홍제를 공양하고 있잖나. 정순한 원신의 힘을 바치면 손상을 입은 기령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가 있단 말이지. 결국 전무마존이 남긴 표지를 완전히 깨운 거란 말야. 너는 지금 저 늙은이, 혹은 마병 하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야. 옛날 전무마존이 남긴 표지와 싸우고 있는 거다. 이 정도로 맞서는 것만도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해.”
초휴는 미간을 찡그린 채 사방을 훑어보았다. 황보씨가 가세한 후 초휴 편은 약세에 처한 상황이었다. 황실 공봉당, 황궁 고수, 어림군에 황보씨 고수들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위서애는 강동명의 초식을 벌써 몇 번이나 막아냈다. 그야말로 간신히 막아내는 수준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할 게 뻔했다. 초휴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기령이 옛날 전무마존과 함께했던 시절을 전부 기억한다고?”
육강하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로 대꾸했다.
“물론이지. 혈홍제는 최상급의 신병이니 기령도 대단했다고. 그때 일을 기억하는 게 당연하잖아?”
초휴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어쩌면 혈홍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혈홍제가 다시금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찰나, 초휴의 몸에서 흉포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초휴는 마도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도를 들어 혈홍제를 막은 그는 물러나지도 않고 출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손을 뻗어서 혈홍제의 창끝을 콱 움켜쥐었다!
진화연신(眞火煉身)을 이루어 맨몸으로 신병을 받아낼 수는 있었으나, 혈홍제는 전무마존이 쓰던 최상급의 신병이어서 경악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초휴의 손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 혈홍제로 스며들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전부 얼어붙었다.
‘초휴가 왜 저러지? 자살하려는 건가, 아니면 죽여 달라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초휴의 선혈이 혈홍제로 스며들자 혈홍제가 부르르 떨더니 혈살의 기운을 거두었고 이에 살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지어 황보 노야가 쏟아부은 정순한 원신의 힘조차 그대로 배출되어 버렸다. 그리고 혈홍제는 얌전하게 초휴의 손에 쥐어졌다.
원신의 힘이 되돌아오자 황보 노야는 그대로 선혈을 토했다. 두 눈에 절망과 불신의 기색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아닌가.
신병은 제 주인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러나 황보 노야가 이미 혈홍제를 썼으니, 혈홍제의 기령은 영원히 한 사람만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 힘을 주고 살육을 벌이게 해 주는 자라면 누구나 혈홍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휴 앞에서 혈홍제는 모든 힘을 거두어 버렸다. 설마 초휴가 전무마존의 환생이라도 된단 말인가?
육강하조차 알쏭달쏭했으나, 초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혈홍제가 힘을 거둬들이고 얌전히 초휴에게 잡힌 것은 전무마존이 아니라 독고유아 때문이었다.
육강하는 혈홍제의 기령이 과거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무마존이 싸울 때의 기억도 있을 것이고, 독고유아의 기운도 당연히 기억하지 않겠는가.
초휴는 지금까지도 독고유아와 자신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독고유아의 선혈을 흡수했을 때, 그 핏방울은 초휴의 체내에 녹아들었고 그에게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고유아의 불멸천마전에서 나온 힘이라고 육강아는 말했다. 그러나 그 힘은 아주 설핏 나타났다 사라졌을 뿐 다시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금 시도는 초휴로서도 도박이었다.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독고유아의 힘에 도박을 건 것이다. 혈홍제가 초휴의 선혈과 접촉하면 뭔가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추측이 맞았다. 그것은 제 주인만이 아니라 주인이 모시던 사람의 힘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초휴가 혈홍제를 공간 비전함에 넣으려는데, 혈홍제에서 느닷없는 파동이 일어났다. 일순간 눈앞의 공간이 변하더니 전쟁의 불길로 새까맣게 타 버린 땅이 펼쳐졌다.
* * *
무수한 진기와 강기가 번쩍였다.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 무사들의 고함이 끊임없이 울렸다. 혈기가 하늘을 찌르고 살기가 바람에 가득했다.
전장에는 두 편이 있었다. 한쪽은 다양한 무사들이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승복을 입은 자도 있고 도포를 입은 자도 있었다. 검을 든 자, 갑옷을 입은 자도 있었다. 무수한 강호 세력이 뭉친 연맹인 듯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몹시 익숙한 누군가가 맨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장포가 바람을 맞아 부풀어 올랐다.
그는 둥글게 휘어진 모양의 도를 쥐고 있었다. 도신은 초승달 같았고 날은 눈이 시리도록 붉었다. 초승달이 빙글 도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핏빛은 태양의 광휘보다도 눈부셨다.
도신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깊은 밤 작은 누각에서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듣노라(小樓一夜聽春雨).’
독고유아!
그 순간 초휴는 깨달았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옛날 곤륜마교와 정도 무림이 벌였던 대격전, 혈홍제의 기억 속 광경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붉은 장포를 입은 여자가 마검 장상사를 들고 독고유아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여윈 체구에 온몸을 검은 장포로 감싼 무사와 아예 형체가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존재가 있었다.
초휴에게 가장 가깝게 보이는 사람은 갑옷 차림에 우람한 체구의 무사였다. 장상사를 쥔 사람은 홍련마존, 갑옷을 입은 사람은 전무마존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둘이 곤륜마교의 나머지 두 마존일 터였다.
심지어 육강하도 보였다. 그러나 이 무렵의 육강하는 독고유아 일행과 함께 서 있을 자격이 되지 않는지 뒤쪽에서 머리를 내밀고 홍련마존의 아름다운 뒤태를 훔쳐보고 있었다. 어쩐지 찌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옛날 곤륜마교가 몇 차례의 정마대전을 치렀는지는 육강하조차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초휴와 잡담을 늘어놓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곤륜마교에 들어간 이후의 생활은 줄곧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었다고.
처음에는 독고유아가 그들을 이끌고 다녔다. 그러다 나중에는 사대 마존 모두, 혼자서도 절정 급 세력 하나를 멸망시킬 만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인 끝에, 저항할 만한 세력은 대부분 죽고 없어졌다. 남은 것은 얌전하게 참거나 무릎을 꿇고 굴복한 자들이었다.
곤륜마교는 진정한 강호의 패주가 되었고 마염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
독고유아에 사대 마존까지 있는 것을 보니, 이 정경은 곤륜마교가 초기에 치른 대전이 분명했다. 혈홍제의 기령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어서 지금까지 기억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 와중에도 살육은 이어졌다. 그러나 양쪽 모두 우두머리는 나서지 않고 있었다.
결국 정도 연맹 측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십여 명이 제각기 독고유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순간 불광, 도온, 검기, 온갖 힘이 천지를 휩쓸었다.
그 놀랍고 두려운 위력은 기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천지가 무너지는 말세가 온 듯했고 상고 시대의 대겁난을 방불케 했다.
초휴는 혈홍제 기령의 시각으로 이 광경을 보는 것이었다. 희미한 기세를 느낄 수는 있었으나 기령은 기령일 뿐이라 인간 무사의 실력이나 경지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독고유아에게 덤벼들 정도의 자격을 갖춘 자라면 천지통현이 아니겠는가.
천지통현 십여 명. 지금의 강호에 데려다 놓으면 하나같이 최정상의 지존 강자일 것이다. 초휴는 독고유아가 이 국면을 어떻게 돌파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독고유아는 이미 도를 빼 들고 있었다. 청춘우가 그의 몸을 감싸고 빙글 돌자 청명한 도의 울음이 들렸다.
다음 순간 새빨간 달빛을 띤 칼이 휘둘러졌다. 독고유아는 아예 칼을 내던졌다.
일순간 먹구름 같은 마기가 해를 가렸다. 시커먼 하늘에 핏빛 초승달만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청춘우의 칼날이었다!
다음 순간 달이 떨어져 내리며 눈앞의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불광이 적멸하고, 도온은 무너지고, 검기가 흩어졌다.
부서진 병기들의 파편이 갑옷을 물들인 선혈과 섞여서 흩날렸다. 하늘에서 점점이 피의 비가 떨어지고, 땅에 닿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가 핏빛을 띤 채로 떨며 울더니 독고유아의 손에 돌아갔다. 도신을 따라 핏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리며 조그만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초휴는 드디어 깨달았다. 깊은 밤에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그 이름의 뜻을!
독고유아가 출수하기 전, 초휴는 그가 어떤 식으로 적을 공격할지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출수를 보니 알 수 있었다.
독고유아쯤 되는 경지면 어떤 방법으로 적을 쳐부술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도를 휘두르기만 해도 피의 비가 흩날리고 만물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초휴의 정신은 완전히 그 환상 속에 잠겨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고유아가 보여준 일도의 기운에 빠져든 것이었다.
방금 독고유아의 일도는 표묘참 같은 도법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극한에 달한 도의 진의였다. 독고유아 자신만의 강대한 무도였다.
지금, 이 독고유아는 옛날 표묘참과 멸삼련성전을 썼을 당시, 철황보를 멸망시켰던 때의 독고유아보다도 강했다!
아마 독고유아가 천하제일인의 이름을 확고히 한 것도 이 싸움을 치른 뒤의 일이리라. 영현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강호에 그의 마염을 막아낼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휴가 그 감각을 완전히 느껴 보기도 전에 눈앞의 환상은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