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31)
931화 군무신(君無神)의 등장
다시 소홍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옛날 소홍이 아니었다. 멀쩡히 살아있긴 했으나 귀화루의 새로운 포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날 겁박에 못 이겨 몸을 팔아야 했던 그녀가 이제는 남을 겁박하여 몸을 팔게 만드는 악덕 포주가 된 것이다.
황사월은 그녀 역시 죽였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 그토록 추악하게 변해버린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에 앞서 그녀는 냉랭함을 가장한 그를 향해 미소 짓더니 가까스로 한마디를 토해냈다.
“소이······ 오라버니.”
“아니야!”
황사월이 노호성을 내지른 순간, 그 길게 뻗은 월성가가 와르르 무너지더니 급기야 동제 황족들마저 놀라 뛰쳐나왔다. 이때 그의 마음은 이미 죽어버렸다.
그러니 어느 순간 격렬한 통증이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갔다. 고개를 숙여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가슴팍에 장도 한 자루가 깊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월성가가 사라진 그의 눈앞은 어느덧 핏빛 일색이었다. 그리고 장도의 한끝은 초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가련하게도 그녀를 죽인 그 순간 황소이는 이미 죽었지. 그 후에 살아남았던 건 그냥 미치광이일 뿐이었어. 황사월이라 불린 미치광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왔으니 이제 내가 당신을 죽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다.”
장도를 빼자 황사월의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생기마저 사라졌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원한이 아니라 한줄기 해탈의 빛이 보였다.
‘소홍아, 내 이제 널 만나러 가마······.’
* * *
심마의 말이 옳았다. 태어날 때부터 미친놈은 없었고,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거나 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었다.
몽환경을 통해 황사월이 거쳐온 인생 역정을 들여다본 초휴는 새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심마가 구축한 몽환경은 천지통현의 존재도 가뿐히 뒤흔들어 놓을 만큼 완벽했다.
그러니 황사월처럼 심경에 거대한 빈틈이 나 있는 자는 오죽 다루기 쉽겠는가. 더욱이 그 어떤 실낱같은 심경의 변화도 심마와 초휴가 감지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마치 한 몸인 양 황사월이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알게 되자 초휴는 그가 가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원래 세상살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고달프기 마련이다. 천지간에 가련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동정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은 또 어딨겠는가.
초휴의 마음은 여전히 무쇠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죽을 짓을 했으면 가련해도 죽여야 하고 동정이 가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모두가 초휴와 같은 마음인 건 아니었다. 초휴의 장도에 찔려 죽은 황사월의 시신을 바라보며 다들 혼비백산했다. 임창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출수하지 않고 있었던 건 황사월을 구할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리 방법을 강구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사월이 계속 광기를 부리다가 개죽음당하는 꼴을 보느니 어떻게든 천문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같은 천문의 신장이니 일단 그를 구하고 봐야 할 게 아닌가. 임창룡은 황사월의 실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월도를 쓰고 있으니 적어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이렇게나 빨리 초휴에게 당할 줄이야!
게다가 그를 절명에 이르게 한 초휴의 일도도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심마가 구축한 몽환경은 긴 시간을 지속하였다. 황사월이 자기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할 만큼 길었다.
하지만 정작 바깥세상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순간에 황사월은 심적인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서 저항 한번 못해보고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초휴를 가리킨 임창룡의 손가락 끝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초휴, 네놈이 감히 천문의 신장을 죽이다니!’
하지만 임창룡은 지금 당장 복수하겠다며 달려들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그의 실력이 멀쩡한 상태일 때의 황사월보다 강한 건 사실이지만, 광기가 돋아 사월도까지 동원할 때는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의 황사월은 그런 상태였음에도 초휴에게 죽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초휴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은 천문으로 돌아가 문주한테 보고하는 게 급선무였다.
급히 도주하는 임창룡을 초휴는 굳이 뒤쫓지 않았다. 지금 당장 임창룡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문과 이미 맺은 원한은 임창룡 하나 더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목격자의 입을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으니, 어차피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초휴가 사월도를 움켜쥔 순간, 도신으로부터 꽤 강한 저항감이 전해져왔다. 심지어 광란의 살육을 갈망하는 도의 기운이, 끊임없이 그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확실히 이 물건이 마병 중의 마병임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건 물론이려니와, 기령이 제 본분을 넘어서 사용자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제 뜻대로 흔들려 하니 말이다.
지금 당장은 사월도를 제압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공간 비전함에 집어넣었다. 이때 황사월의 시신에서 미약한 빛 한줄기가 번뜩이다 사라지는 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이와 동시에 저 멀리 서곤륜 천문의 침침한 대전 내를 밝히고 있던 아홉 개의 괴상한 용 모양 등잔불 중 하나가 꺼졌다. 그리고 머리칼에 붉은빛이 도는 흑포 차림의 남자 하나가 대전에 나타나더니 꺼진 등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황사월이······, 죽었군.”
그 남자는 천문의 문주, 군무신(君無神)이었다. 그러나 황사월의 죽음을 알았다고 해서 비통하거나 분노한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기껏 내뱉은 한 마디에조차 일말의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순간 대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용 문양이 새겨진 비단 도포 차림의 노인이었다. 발에는 황금 용이 수 놓인 자주색의 목이 긴 신발을 신고 있어 상당히 화려하고 부유하게 보였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구에다 이목구비도 호랑이상을 방불케 하니,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자아냈다.
“황사월이 죽었습니까? 대관절 누가 감히 천문의 신장을 죽였다는 겁니까?”
노인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전 전체가 흔들리며 쩌렁쩌렁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 군무신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천문 신장도 똑같은 사람이오. 천문 신장을 감히 죽일 자도, 천문 신장을 죽일 능력을 갖춘 자도 강호에 없을 턱이 있나.”
이에 노인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문주, 염려 마십시오. 잠시 저를 대신해 봉쇄를 수행할 사람만 있다면 석 달, 아니 두 달 내로 그놈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군무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갈 테니까. 지금 당장 건곤무극진(乾坤無極陣)을 개진해서 나를 황사월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시오. 틀림없이 흉수는 아직 거기에 있을 거요. 강호에 천문 신장을 죽일 수 있는 자는 많을지 모르나, 천문 신장을 죽이고도 목숨줄이 붙어있을 자가 몇이나 되겠소? 그러니 내가 가야만 하오.”
그러자 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문주, 건곤무극진을 일단 한번 개진하면 봉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그냥 제가 다녀오는 게 낫습니다. 이깟 일로 문주께서 친히 나서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황사월이 참으로 애석하게 되었군요! 제가 가장 아꼈던 자인데 그만 마음이 무너진 바람에 자기 자신마저 꺾이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죽지 않았더라도 차기 신장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또 한 번 광기가 발동했으면 십중팔구 신장 지위를 보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군무신은 그의 말에 동의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더니 거듭 단호히 말했다.
“건곤무극진을 개진하시오.”
이젠 노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데 이어 입까지 힘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탄식만 하다가 복잡한 진법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력한 파동이 대전에 밀어닥치며 허공이 갈라지더니 검은 틈새 하나가 길게 나타났다. 군무신이 그 안에 발을 들이밀자 틈새와 함께 몸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전에 홀로 남은 노인은 다시 한번 탄식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 * *
그 무렵 북방 요동군.
극북표설성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마을을 하얀 신형이 걸어가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폭설까지 쏟아지건만, 희한하게도 그의 몸 주위 일 장 반경 내는 봄날처럼 따스하기만 했다.
그가 밟고 지난 지면마다 눈과 얼음이 녹았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꽁꽁 얼었어야 마땅할 흙바닥을 파릇파릇한 새싹이 뚫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이 멀어지기가 무섭게 새싹은 시들어 눈 밑에 덮이고 말았다. 사계절의 흥망성쇠가 그의 발밑에서 일순간에 재연되고 있었다.
그 흰옷 차림의 신형은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이마에는 가늘고 기다란 붉은 흉터 같은 게 나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얼핏 성난 눈을 힘주어 감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외양은 젊은 청년이건만, 그의 몸에서는 무언가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기질이 느껴졌다. 몸은 젊으나 세상 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노인 특유의 연륜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심지어 그의 눈에는 격세지감의 감정이 감돌았다.
‘아······! 잠깐인가 싶었더니 그동안 세상이 많이도 변했구나!’
비록 일년 중 대부분이 눈으로 덮이는 요동군이라고는 하나, 북방의 황량한 벌판에 비하면 그래도 사람의 생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지금 지나고 있는 마을이 바로 그랬다.
마침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마을 어귀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몸에 두툼한 솜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채, 눈밭을 구르며 노는 모습은 새끼 곰 한 마리를 연상케 했다. 청년은 아이한테 다가서더니 몸을 굽히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보자꾸나. 어느 쪽이 북쪽이지?”
아이는 온화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 방향을 가리키며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저쪽이요!”
“고맙구나.”
청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순간,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아이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이때 누군가 그 아이의 몸속을 들여다보았으면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그 어린 몸의 구석구석 전체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경맥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맥으로 무예를 익힌다면 내력 운용에 있어 거침이 없을 테니 절세의 기재가 되고도 남을 터였다!
물론 이 아이는 자신의 몸이 순식간에 어떻게 변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몸을 일으킨 청년이 한 걸음을 내디뎠나 싶은 순간, 아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아이는 콧물을 한번 닦더니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빨리 나와 봐요! 신선님이 나타났어요!”
그러자 마을 안에서 대광명사의 구변사자후도 찜쪄먹을 듯한 호통이 들려왔다.
“신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후딱 와서 밥이나 처먹지 못해? 이번에도 안 들어오면 궁둥짝에 불이 나도록 맞을 줄 알아!”
* * *
그 무렵 원시마굴 속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초휴가 일도 만에 천문 신장을 죽인 충격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허공에서 엄청난 파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공간이 층층이 갈라지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너나없이 화들짝 놀라서는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굴이 붕괴하는 조짐인 줄 알고 여차하면 보물을 탈취해 도망갈 태세를 갖추는 자들도 있었다.
공간에 층층이 균열이 일어난 끝에 문이 하나 생기더니 거기서 붉은 머리카락에 흑포를 입은 신형이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자가 대체 누군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내내 출수하지 않고 있던 경 선배만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굽은 몸을 곧추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놀라도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습이었다.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이때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던 임창룡이 그자의 기운을 느끼고는 이내 쏜살같이 되돌아와 소리쳤다.
“문주!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임창룡이 그를 ‘문주’라고 칭하자 비로소 사람들은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다름 아닌 지존방 사 위의 천문 문주, 군무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