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40)
940화 야소남과의 첫 대면
한옆에 있던 원광은 땅이 꺼질세라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빈승은 팔백년 전에도 저렇듯 사악한 마인은 본 적이 없네. 세월이 변하니 사람 마음도 예전과 같지 않은가 보군. 과거에는 마인들도 기본적인 규칙은 지킬 줄 알았건만, 어쩌다 저토록 모질게 변해버린 건가?”
이에 허도가 입을 삐죽였다.
“요즘의 마인들도 규칙을 지킬 줄 압니다. 초휴 저놈 혼자만 저따위지요. 하긴 그 덕분에 저렇듯 젊은 나이에 저런 실력과 세력을 갖게 된 것일 테지만 말이지요. 자기보다 실력이 약한 족족 때려죽이고 자기보다 우둔한 족족 음해해서 죽이니, 세상천지에 자기 마음대로 안 될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허자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듣고 있다가 한 마디를 간신히 내뱉었다.
“어쨌든 오늘부로 봉문이오!”
이번엔 누가 봐도 대광명사의 완패였다. 철저히 패한 주제에 길게 말해봐야 변명이나 화풀이밖에 더 되겠는가.
초휴야 언제든 비열하고 뻔뻔하게 굴 수 있어도 대광명사는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승려들의 목숨에 신경을 안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오랜 세월 북연에 다져온 불문의 기반을 이대로 잃는 것도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 * *
그 무렵 산을 다 내려간 상천량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보게, 초휴! 자네 이번에 너무 심했어. 대광명사 화상들이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오늘 같은 수법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지 절대 두 번 쓰면 안 되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결사적으로 덤벼들어 무는 법이다. 대광명사 화상들이 죄다 허깨비들이 아닌 바에야 오늘 일을 계기로 북연 경내 불문 제자들을 재정비할 게 뻔했다.
다시는 초휴에게 똑같은 협박을 당하지 않겠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이를 갈며 어떻게든 이 치욕과 울분을 만회할 기회만 엿볼 게 아닌가. 거기에 대고 초휴가 오늘의 수법을 또 써먹는다면 필경 저들은 오늘 당한 몫까지 더하여 끝장을 보려고 할 것이다.
초휴라고 해서 대광명사를 격분시키는 대가가 무엇일지 모를 리 없었다. 여태 단 한 번도 대광명사를 만만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대광명사를 격노케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매한가지일 터였다. 그러니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본 것이었다. 대광명사가 끝장을 내려 들 거라는 상천량의 경고에 초휴가 담담히 반응했다.
“상관없소. 어차피 정·마는 함께할 수 없는 관계요. 오늘 일이 아니라도, 훗날 내가 서곤륜을 오르면 어차피 대광명사는 나를 갈가리 찢어 죽이러 달려들게 되어있소. 이러나저러나 저들과의 사생결단은 숙명과도 같으니, 시기를 좀 앞당긴 것뿐이오.”
상천량이 다시 생각해보니 초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강호에 초휴를 천참만륙(千斬萬戮)하고 싶어 안달 난 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거기에 대광명사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대광명사한테 볼일을 마친 초휴는 항숭과 함께 서초로 향했다. 배월교와 서초 황족을 만나볼 참이었다.
이런 일에는 굳이 사람이 많을 필요가 없다. 더욱이 혹시 일어날지 모를 미연의 사태에도 대비해야 했다. 해서 상천량을 비롯한 진무당 인원들은 북연에 남겨두고 항숭과 단둘이서만 여정에 올랐다.
묵은 앙금이 깊은지라 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중차대한 임무를 앞두고 길에서 노닥거릴 기분 또한 아니었다. 해서 그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서초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막상 서초에 당도하자, 항숭은 서초 황족을 먼저 찾아가자고 주장했고, 초휴는 배월교가 먼저라며 고집을 부렸다.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초휴가 담담히 물었다.
“왕야, 지난번 북연과 서초가 연합해 동제에 맞설 때 서초 측에서 얼마나 힘을 보탰는가요?”
“그때야 서초 조정이 말도 못 하게 간교하게 나왔었지. 저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더라도 워낙 실력에 한계가 있던지라 동제와의 전쟁은 우리 북연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네. 서초 조정은 결국 동제의 힘을 견제하는 역할 정도만 했네. 그런데 그건 왜 묻소?”
“한마디로 서초 조정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약하다고는 못해도 강하다는 소리 또한 절대 못 하는 어정쩡한 수준이란 얘기죠. 그러나 배월교의 실력은 확실히 믿을 만합니다. 저들이 서초에서 어떤 위상에 있는지 왕야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배월교 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배월교와 얘기가 잘 되면 서초 조정 쪽은 자연히 쉽게 풀리게 되어있다니까요. 이쯤 해서 제가 다시 한번 상기해드리지요. 이번에 우리는 동제 조정뿐이 아니고 정도 무림도 상대해야 한단 말입니다!”
초휴의 거침없는 언변에 항숭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논리에 달리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해서 초휴의 의견대로 먼저 배월교부터 찾아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초휴는 이번 배월교 방문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 방문은 정마대전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때는 다들 밖에서 격전을 치르기 바빴던지라 여유롭게 들어갈 볼 틈이 없었다.
초휴가 왔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동황태일과 대제사, 그리고 성녀까지 친히 그를 맞이했다. 지금 초휴의 실력과 위상이라면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동황태일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종 탈취 시 정혈까지 태우며 야소남을 돕느라 소모가 극심했고, 이는 단시간에 회복될 상세가 아니었다.
배월교 대제사는 초휴와 제대로 말 한 번 섞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자니 거의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신비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나마 초휴와 만남이 잦았던 이는 성녀일 터였다. 그런데 초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짜고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미색에 넋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성녀의 현 상태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그녀는 여전히 천인합일 경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날 초휴와 더불어 용호방에 올랐던 대부분 무사가 이미 진단경에 올랐음을 감안할 때 성녀의 부진은 이례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실력이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지만, 배월교 성녀의 실력이 정체되어 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 아닌가? 초휴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그리 빤히 쳐다보죠? 얼굴 뚫어지겠어요.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요? 다른 사내라면야 단호히 뿌리치겠지만, 초 대인이라면 한번 생각해보죠.”
이에 초휴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설령 내게 그럴 마음이 있어도 교주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배월교 성녀를 외간 남자가 보쌈해 가는 걸 두고 보실 분이 아니죠.”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월교 내부로 들어갔다. 초휴 뒤를 따르던 항숭은 기분이 영 찝찝했다. 북연에서는 자기가 어디 한 군데라도 초휴보다 꿀린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초휴에게 진무당이 있다면 자기한테는 황실 공봉당이 있지 않은가. 초휴가 은마 일맥을 뒷배로 두었다면 자기는 북연의 왕야로서 황실을 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휴의 실력이 강한 건 인정한다. 자신이 그를 이길 자신은 없다. 하지만 구룡인의 힘을 빌린다면 그래도 겨뤄볼 만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듯 북연을 벗어나자 둘 간의 격차가 선명히 드러났다. 지금 초휴가 누리는 명성은 강호 전역을 넘나들며 피 튀기는 싸움을 거듭한 끝에 쟁취한 것이었다.
일단 마도의 수괴로 인정받는 배월교부터가 같은 마도 동도인 그를 존중하고 있었다. 야소남을 제외한 삼대 고위 인사가 일제히 영접을 나오고 한껏 격식을 차려서 그를 예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항숭을 대하는 태도는 기대치 이하였다. 그림자 취급까지는 아니어도 초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는 값진 고급 병풍 정도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북연의 왕야가 북연 밖에서 내세울 만한 전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릇 강호인은 주먹으로 인정받는다.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동황태일 등을 따라 배월교 내부 깊숙이 향하자 가는 길에 보이는 풍광이 실로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하나같이 이색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들이, 빼어난 산수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져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배월교와 같은 마도 소굴에는 응당 마기만 무성하려니 생각했는데, 이처럼 선경(仙境)을 방불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배월교 제자들도 매서운 독기가 물씬 풍기는 여느 마도 무사들과는 사뭇 달랐다. 남제자들은 서글서글하니 영준한 모습들이 인상적이고, 여제자들도 하나같이 우윳빛 살결이 매력적인 미인들이 아닌가. 항숭은 배월교가 얼굴부터 보고 제자를 뽑는 것인가 싶어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배월교의 중심지에 성호(聖湖)가 있었다. 야소남이 호숫가 정자에 앉아 초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마 전 격전 끝에 마종을 차지했으니, 초휴는 그가 폐관 중이리라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렇듯 밖에 나와 있는 걸 보니, 아직 마종의 체화를 시도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초휴는 항숭과 더불어 다가가 그에게 예를 올렸다.
“야 교주님을 뵙습니다.”
야소남이 고개를 돌려 초휴를 바라보자 초휴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두 사람은 시간이 멎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초휴가 당대 마도 최강자와 정식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야소남은 초휴에 대해 익히 들어온 게 많은지라 그를 낯설게 느끼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실 두 사람의 입장만 보면 서로 적대하는 게 맞지만, 너나없이 정도 종문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동질감이 그들을 한 편에 서게 했다. 따라서 두 사람 간에는 아무런 적의가 오가지 않았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야소남이었다. 그가 돌연 물었다.
“그 도처럼 생긴 돌덩이는 무엇이던가?”
그가 초면에 인사말도 생략한 채 이런 질문을 던지자 동황태일 등도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교주의 성격상 저돌적인 면모가 많은 건 사실이나,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옆에서 보는 사람도 거북스러웠다.
그렇게나 궁금해 죽겠거든 대화가 무르익은 틈을 타서 전음으로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물어보면 초휴가 사실대로 알려주고 싶어도 그게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초휴도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야소남이 저런 걸 묻는 이유는 석도에 대해 탐문하기 위함도 아니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호기심에서인 게 분명했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그의 인품은 못 믿어도 그의 오만함만은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석도에 흥미를 느껴서 갖고 싶었다면 곧장 출수하여 강탈하면 되지, 이렇듯 말로 물어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충분히 뺏고도 남을 실력의 소유자가 속내를 숨겨가면서까지 가식을 떨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해서 초휴도 잠시 생각 끝에 곧장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건 마룡의 용맥에서 응집되어 나온 도의 모태입니다. 유일하게 무근성화만이 그것을 도의 형상으로 만들 수 있다더군요. 그 옛날 독고유아의 청춘우도 정련을 거치기 전까지는 그런 형태였다고 들었습니다.”
동황태일 등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별 것 아닌 듯 보였던 석도에 그런 엄청난 내력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절세 마도 청춘우와 동일 원천의 존재라니! 하지만 이보다 더 그들을 놀라게 한 건, 야소남의 돌발적인 질문에 초휴가 흔쾌히 사실대로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동황태일 등은 질문한 자와 대답한 자, 두 사람 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야소남은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랬었군.”
이로써 그의 호기심은 충족된 셈이었다. 게다가 초휴가 차지한 건 고작 도의 모태에 지나지 않는다지 않는가.
하긴 완성체인 청춘우에도 그는 별 흥미를 못 느꼈지만 말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신병, 월인이 있었다.
월인의 기령과도 이미 한 몸처럼 된 지 오래였다. 청춘우가 제아무리 대단한 도라고 한들 어디까지나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인 일로 왔는가?”
야소남의 뒤늦은 질문에 초휴가 침통하게 답했다.
“동제 쪽 동향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도문 일맥이 동제 조정과 연합하여 북연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지요. 사실 그들의 표적은 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 일맥이, 그것도 도문이 이토록 과감하게 움직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하여 배월교에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야소남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