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6)
096화 영향
섭동류가 득달같이 캐묻자 평 숙부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뜻을 오해하셨군요. 나는 그저 시신의 도흔과 초휴가 남겼던 도흔이 일치한다고만 했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흉수가 반드시 초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를테면 누군가가 초휴의 칼을 써서, 살인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시신의 도흔이 초휴가 썼던 칼로 인해 생긴 것은 확실하오?”
이 질문에 평 숙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잘 모르시나 본데,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상처의 흔적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지요. 우리 같은 전문가들의 눈에나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단순한 흔적에서도 우리는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초휴의 병기는 사급에서 육급 사이의 보도(寶刀)요. 이런 병기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병기 장인의 손을 거쳐야 하며, 그 병기만의 고유한 이름도 있기 마련이지요. 즉, 복제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설령 같은 장인이 똑같은 자재와 방식으로 두 개의 똑같은 병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미세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 시신의 도흔은 초휴의 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소이다.”
“그러나 초휴 본인이 직접 한 짓인지는 저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시신에서 초휴가 익힌 그 괴이한 금나수와 사악한 도법도 엿보입니다만, 그 외 다른 마도 무공의 흔적이 제법 발견되었기 때문이오. 이런 무공을 선천경이 시전했을 리는 없습니다. 적어도 내강경은 되어야 하니 초휴는 아닌 셈이지요. 그렇다면 초휴와 관련 있는 사형(師兄) 등의 지인이 그의 칼로 이런 짓을 벌였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섭동류는 단정 지을 수 있었다.
흉수는 분명 초휴라고 말이다. 그가 검토했던 자료에 의하면 초휴에게는 몸담은 사문(師門)이 없었다. 그리고 비전함을 탈취할 때, 이미 선천경 최고봉에 이른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쯤 내강경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만 초휴가 왜 청룡회에 들어갔는지가 의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섭동류가 평 숙부에게 말했다.
“평 숙부, 사람들을 데리고 임중군에 좀 다녀오시지요. 초휴에 대한 수배령을 취의장이 철회한다고 그들에게 알려주세요. 그럼에도 계속 초휴를 뒤쫓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 하시고. 어쨌든 취의장은 이 일에서 손을 뗍니다.”
“소장주, 청룡회는 연동 지방에 천죄 분타 밖에 없는데, 그렇게까지 저들을 겁낼 필요가 있겠소?”
평 숙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섭동류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한 가문을 쓸어버린 자예요. 애초부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내가 신경 쓰는 건 천죄 분타가 아니라 천룡회 자체고요. 평 숙부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삼년 전 천죄 분타가 붕괴되었을 당시의 자세한 속사정은 나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죠. 청룡회 산하에는 서른여섯 개의 분타가 있고, 그중 하나가 하룻밤 새에 누군가에게 궤멸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 보통 일이었겠습니까? 그 일이 있은 후, 청룡회의 수장이자 풍운방 구위인 ‘언월청룡(偃月靑龍)’ 보천남(步天南)이 북연으로 일전을 치르러 갔었지요.”
“그 일전에는 북연의 적지 않은 세력들이 연루되었고요. 극북표설성, 연남의 신무문, 구대 무림세가 중 하나인 연서 황보씨 가문, 심지어 북불종 대광명사까지도요. 그 싸움 이후 청룡회는 그저 잠잠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 타주를 북연으로 파견했지만 다른 세력들은 청룡회의 동태를 모른 척했지요. 심지어 제자들에게 경고하길, 청룡회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한 절대로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섭동류가 평 숙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싸움에 우리 취의장은 끼어들지 않았어요. 아버님이 사령 중 하나인 청룡회와 북연 대형 문파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함부로 추단하고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엄히 명하셨거든요. 누가 이기고 졌든 간에 여하튼 그 싸움은 이미 과거지사이니까요. 청룡회가 슬그머니 새 타주를 파견해온 건, 북연 세력과 청룡회 간에 이미 합의가 성립되었기 때문인 게 분명합니다. 혹은 북연 측에서 이를 그냥 묵인해주기로 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제 와 또다시 청룡회와 부딪히는 건 곤란해요. 그랬다가는 성질이 더럽고 변덕스럽기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그 청룡회 우두머리가 다시금 북연에 행차할 수도 있으니까요. 초휴가 청룡회에 들어간 건, 그자의 운이 좋은 셈 칩시다. 잠시 놔두자는 겁니다.”
사실 초휴가 포위망을 뚫고 나가, 살인까지 저질렀을 때 섭동류는 진작 깨달았다. 자기한테는 초휴를 잡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이제 상대는 청룡회 살수의 신분이다. 앞으로 그를 건드리기는 훨신 더 어렵게 된 셈이었다.
초휴가 혼자 움직일 때는 그를 별거 아닌 존재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청룡회의 비호를 받고 있다. 게다가 지난 일로 인한 천죄 분타와의 껄끄러운 관계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국적 견지에서 초휴에 대한 추격 및 참살을 잠시 중단하는 건, 이래저래 옳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때 연정정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목이 터져라 청룡회를 욕해대며 신무문 고수들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끝장을 보겠다는 소리까지 해댔다. 하지만 정작 그 고수들은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난날 있었던 청룡회와의 싸움에는 신무문도 참여했었다. 이에 내막을 아는 고수들은 청룡회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청룡회와 싸움이 붙었다가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싸움이 될 게 뻔하니 말이다.
청룡회가 연정정 본인을 건드렸다면 또 모를까. 저들은 살수조직이고, 엄연히 의뢰를 받고 하찮은 놈 하나를 처리했을 뿐이었다. 그 일로 따지고 들 명분이 없었다. 더욱이 그깟 놈 하나 때문에 청룡회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리석은 짓을 신무문이 할 리도 만무했다.
아니, 연회남이 살수가 벌인 짓을 알았더라면, 되레 살수에게 고맙다고 절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회남은 처음부터 악노천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딸이 하도 죽네 사네 난리를 쳐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둘을 떨어뜨려 놓는 걸 포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되었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또 있겠는가.
연정정이 광란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섭동류가 다가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찌 되살아나겠소. 정정,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명복이나 빌어주시오. 그리고 청룡회에 복수하러 갈 생각 따위는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거요.”
그러자 연정정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지금 날 비웃으려 하는 건가요?”
난감해진 섭동류는 하는 수 없이 차근차근 해명했다.
“나와 악 형은 오랜 벗이었소. 벗이 죽었는데 난들 마음이 안 아프겠소. 게다가 나는 악 형을 죽인 살수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소. 다름 아닌 예전에 나한테서 비전함을 탈취해 간 초휴라는 자라오. 그러니 나는 그놈한테 청산해야 할 빚도 있는 셈이오. 분한 마음으로 치자면 나도 당신 못지않다는 얘기요. 그러나 지금 초휴는 청룡회의 일원이 되었소. 게다가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이 하필 우리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천죄 분타라오. 이제 섣불리 그자를 건드릴 수 없게 되고 말았소.”
“그래서 그에 대한 수배령도 거두어들인 거요. 청룡회에 관한 일은 아마 신무문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요. 그러니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연 장문인께서 다른 일로는 당신에게 관대하실지 모르지만, 청룡회와 분란을 일으키는 것만은 절대 용납지 않으실 테니 말이오. 이쯤 했으니, 더는 말하지 않으리다. 원래 악 형의 뒤처리를 해 줄 생각으로 온 것이었는데, 당신이 왔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섭동류는 말을 마치자 일행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 연회남이 딸자식이 사고 치는 걸 지켜만 볼 리 없음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딸을 단속하느라 눈에 불을 켤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왜 굳이 길게, 그녀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준 걸까? 그것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의 씨앗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청룡회가 한동안은 초휴를 보호해 줄 수 있겠지만, 영영 그럴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연정정은 얼굴에 증오가 가득 서린 채, 연신 ‘초휴’라는 두 글자를 중얼중얼 되뇌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악씨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은 임중군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멸문의 파장도 그 소식 못지않게 널리 퍼져갔다. 때마침 섭동류는 살수의 정체가 청룡회의 신예 살수, 초휴라고 공식적으로 확인해주기까지 했다.
멸문의 흉수가 고작 내강경 무사 한 명이었다니!
세간의 놀라움은 실로 컸다. 게다가 악씨 가문의 생존자들 입을 통해 알려진 그 날의 상세한 상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살수의 집요함과 대담함, 그리고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건, 그가 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소기의 목적을 이뤘다는 점이었다. 수천 명에 달하던 악씨 가문의 무사들 중, 초휴가 직접 죽인 자들은 정작 십분의 일도 못 되었다. 그 나머지의 대부분은 서로 죽고 죽였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왜 죽는지도 잘 모르면서 죽었다.
이처럼 섬뜩하고 괴이한 수완을 발휘한 그에게 사람들은 ‘혈마(血魔)’라는 별호를 붙여주었다. 마귀처럼 잔악한 존재. 그와 맞닥뜨리면 피가 강을 이룬다. 그가 바로 ‘혈마’ 초휴다!
초휴가 청룡회로 복귀하기도 전에, 이미 혈마라는 별호는 연동 강호에 널리 퍼져갔다.
풍만루의 북연 분루에도, 그 소식은 당연히 흘러 들어갔다.
풍만루 총루는 동제의 가장 번화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서초와 북연의 도성 내에도 분루가 있어서 각국의 일을 맡아보았다.
‘삼목신(三目神)’ 제원례(齊元禮)는 북연 분루의 수장이었다. 단정한 용모에다 비단 도포 차림이 제법 멋스러운 쉰 살 남짓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다지 빠릿빠릿하고 정력적인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삼십년 된 자사호(紫沙壺)나 끌어안고 햇볕을 쬐며 북연 각지에서 보내온 정보들을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기력이 쇠한 황혼의 노인을 방불케 했다. 그의 이마에는 가늘고 기다란 붉은 낙인이 있었다. 얼핏 보면 눈동자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삼목신’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강호의 모든 정보와 소식을 세 개의 눈으로 꿰뚫고 있다는 심오한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낙인은 소싯적에 그가 누군가와 박 터지게 싸우다가 생긴 것이었다. 그 싸움에서 어찌어찌하여 결국 상대를 죽이긴 했다. 하지만 제원례 자신도 하마터면 상대의 손가락 일격에 두개골이 박살 날 뻔했다고 한다.
당시 제원례를 살려냈던 의원이 말하길,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서 목숨을 부지한 건 기적이라고 했다. 저세상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제원례는 그때부터 삶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유유자적 따스한 햇볕을 쬘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게지······.’
그는 햇볕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때, 비로소 자기가 아직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그건 죽었다 살아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이처럼 제원례가 여유를 만끽하며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수하 하나가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루주(樓主)님, 임중군 분타에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제원례가 소식지를 받아들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나는 그냥 부루주라니까. 진짜 루주님은 여기에 계시지도 않잖아. 자꾸만 혼동되게 그리 부를 텐가?”
수하는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명색이 강호의 정보를 다루는 자가 우둔할 리가 없었다.
‘자기는 부루주일 뿐, 루주는 아니라고? 한 번이라도 정말 부루주라고 불렀다가는 못마땅해 째려보고 갈굴 거면서.’
그 무사도 눈치 하나는 백 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