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49)
마존현세강림기-149화(149/2125)
마존현세강림기 6권 (24화)
5장 몰아넣다 (4)
노수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은 이전처럼 굳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그림자가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가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된 양 말이다.
하지만 노수봉은 그 광경이 이
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되레 커다란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이 제까지 그가 보아온 어떠한 모습 보다 더 자연스럽고 그럴듯하게 보였다.
인간은 누구나 지배자다.
어떤 이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지배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한 생명을 지배한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 자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지배자였다.
노수봉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이 었다.
반항하며 죽든지, 아니면 굴종하
며 죽든지.
서로 다른 과정이지만, 같은 결 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노수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날이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 물어도 될까?”
“ 물론.”
그림자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넌 누구지?”
키득.
낮은 웃음이 들려온다.
조롱과 비웃음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오는 그 웃음이 노수봉의 귀를 파고들었다.
“알고 있잖아?”
노수봉이 멍한 눈으로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강진호.”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림자의 육체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한다.
어둠이 사라지고 나자 그 안에 서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존 재를 확인한 노수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강진호.”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다시 뵙습니다, 노수봉 병장님.” 노수봉은 기이한 위화감에 휩싸 였다.
강진호.
일년이란 시간 동안 보아온 강진호다.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다르지 않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강진호는 그가 알고 있는 존재가 아 닌 것 같았다. 마치 강진호의 껍질을 뒤집어쓴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강진호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미소.
그것은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너 무도 괴이한 것이었다.
미소를 짓는 사람을 보고 섬뜩 함을 느낀다면, 그 미소를 미소라 고 할 수 있을까?
“할 말은 끝났나?”
노수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꽤나 평온했다. 지 금까지 두려움에 떨어오던 사람이 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정말 묻고 싶은게 남았다.”
“ 말해.”
노수봉이가만히 입을 닫았지만, 강진호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밤은 길다.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노수봉은 그의 손에서 벗 어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노수봉이 넋두리를 하듯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영기를 괴롭힌 것부터? 아니면 군대에 들어온 것부터? 그것도 아니면 더 어린 시절부터? 내 성격 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내가 뭔가를 잘못 배워온 걸까? 어디서부 터 되돌려야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노수봉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너를 만난 것? 물론 너를 만난 건 실수였겠지. 그런데 네가 아니
었으면 나는 앞으로도 편히 살 수 있었을까?”
노수봉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이봐, 강진호.”
“누구나 한번쯤은 주인공으로 살아보고 싶은 거잖아.”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지. 타인을 괴롭히면 그 대가를 받지. 그런 빤 한 말을 듣고 자랐지만, 그렇지 않 다는 것 너도 알고 있잖아. 죄를 지은 인간들이 더 떵떵거리면서 사는게 이 세상이야. 그래서 그냥 나도 죄를 지었어.가책 같은 것도
없었지. 그럼 내가 잘못된 걸까? 그럼 세상에는 얼마나 잘못된 사람이 많은 걸까?”
노수봉의 목소리에 울분이 차오 르기 시작했다.
“대답해. 대답해봐, 이 새끼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거든! 내가 잘못한 건 너를 만난 것뿐이야.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예전처럼 편히 살고 있겠지! 그런데 나보고 너를 만난 것이 잘 못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라고? 어 째서!”
노수봉은 피를 토하는 듯 소리 치고 고함쳤다. 제멋대로 빠져 버 린 머리와 일주일 전의 모습을 전
혀 찾아볼 수 없는 퀭한 얼굴로 광기를 뿜어내는 노수봉의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인간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게 뭐가 나빠! 너희도 그냥 못하는 것뿐이잖아! 하고 싶 지만 할 수 없으니 참는 것뿐이잖 아!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뿐이야. 그런데 참지 않았으니 잘못이라는 건가? 그게 너 같은 위선자 새끼가 하는 말이야?”
노수봉이 이죽거렸다.
“솔직해져 봐. 너도 그렇잖아. 그냥 두려운 것뿐이잖아. 길을가는 여자를 잡아 쓰러뜨려 덮치고 싶잖아. 그런데 그 뒤에 닥쳐올 후
환이 두려워서 못하는 것뿐이잖 아! 이 겁쟁이 새끼야!”
번들거리는 눈.
짓이겨져 피가 흐르는 입술.
노수봉의 모습은 점점 사람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말해봐.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너희가 참을 때 나는 참지 않아 서? 그럼 그냥 부러운 거지. 인간은 서로 잡아먹는 것들이잖아! 아니야? 내 말 틀렸어?”
강진호는 묵묵히 노수봉의 말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 어 났다.
움찔.
강진호의 몸이 움직이자 노수봉
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모습만으로 따지자면 시커먼 무 언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의 강진호가 몇 배는 더 무서워야 한다. 지금의 강진호는 적어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노수봉은가슴을 조여오는 공포심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강진호의 모습 이 그를 점점 더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일까?
강진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 히 노수봉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노수봉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마찬가지. 마찬가지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그를 바라보 던 악마의 시선은 차마 입도 열지 못할 만큼의 공포를 그에게 선사 했다.
그럼 지금 강진호의 눈은?
아무 감정 없이 무생물을 바라 보는 듯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 저 깊은 검은 눈동자가 주는, 이 소름 돋는 공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 수가 없군.”
“김학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당연 하다는 듯이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강진호의 목소리는 평소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저갱에서 흘러 나오는 음산함이 거기에 실려 있 었다.
“아, 아니라고?”
강진호는 대답 없이 미묘한 미 소를 지었다.
“내가 대체 언제 너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지?”
노수봉의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진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 었다.
“네 말은 틀린게 없지.”
강진호가 이죽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아무리 법으로도덕으로 막아댄다 하더라도 힘을가진 자가 힘을가지지 못한 자를 먹고, 짓이기고, 농락하는 걸 막을 수는 없지.”
노수봉은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 보았다.
“할 수 있으니, 힘이 있으니 한다고 했나?”
강진호의 손이 천천히 노수봉의 목을 잡아왔다.
노수봉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몸이 이전처럼 굳어 있지 않음
에도 노수봉은 감히 강진호의 손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언제라도 그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악마다.
그런 이를 상대로 대체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이상한 말이지.”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는 언제나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치 거대한 늑대가 얼굴 바로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낮게 그르 렁대는 것 같은 느낌.
정제되지 않은야성에서 전해져
오는 섬뜩한 공포.
금방이라도 강진호가 입을 벌려 그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 았다.
“그런데 너는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노수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지?”
“ 몰라?”
강진호가 낄낄대기 시작했다.
“네가 나에게 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강진호가 천천히 하지만 더없이 확고하게 선언했다.
“네가 약자이기 때문이야.”
노수봉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다른 원인 같은 것도 없어. 반성?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아.”
“네가 다른 이들을 짓밟을 때는 어떤 생각이었지?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했나? 아니겠지.”
노수봉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냥 그런 거야. 나는 그 저 너의 존재를 갉아먹고 싶은 거야. 조금씩 고통을 주면서, 조금씩 파멸시키고 싶은 거야. 나는 그럴 힘이 있고, 그럴의지가 있어. 네 말대로 다른 이들은 나를 막을 수도 없지. 그런데 왜 내가……
강진호가 활짝 웃었다.
너무도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 다는 듯이.
“이유를 찾아야 하지?”
노수봉의 눈동자가 풀리기 시작 했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해가 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그의 삶에서 어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강진호를 막을 방 법은 없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강진호가 아니다.
이건 그런 애매한 것이 아니다.
뒤틀리고 뒤틀려 갈데까지가
버린 괴물이었다.
이 괴물에게서 벗어날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겠지.
“잘 들어, 노수봉.”
강진호가 노수봉에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차라리…….
죽이고 싶다든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말이 더 편안하게 들렸을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 말은 노수봉이 잡고 있던 마
지막 이성마저 앗아가 버렸다.
“ 흐흐흐흐.”
노수봉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입가에서 주르륵 침이 흘러내려 침대를 적시기 시작한다. 강진호는 그런 노수봉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아냐. 아직은 아니야.”
그의 손이 노수봉의 머리를 잡았다.
우웅.
진기가 노수봉의 머리를 일깨우 기 시작한다. 일순 정신을 차린 노 수봉이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뿐.
시작했
천천히
“으…… 으으어 어……
노수봉의 얼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일그러지기다.
이 악마는 그가 미치는 허락하지 않았다.
강진호가 노수봉의 뺨을 쓸었다.
“아직 아니야. 아직 오늘이 남았 잖아. 시간은 충분해. 그러니까…… 우리 좀 더 놀아보자고.”
“으흐.. 으흐흐.
노수봉의 낮은 흐느낌이 방에 퍼져 나간다.
강진호는 그런 노수봉을 내려다 보다가 그의 목을 움켜잡아 자신
것조차
의 얼굴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다.
“자…… 노수봉.”
강진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에게 내민 손은 마음에 드나?”
노수봉은 강진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노수봉이 이해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니까. 그들 중에는 내가 네게 내민 손을 잡아야 할 사람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외롭지는 않을 거야.”
악귀의 낮은 웃음소리가 노수봉
의 방을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 그럼……
강진호는 더없이 잔인하게 웃었다.
“시작하자.”
노수봉의 눈이 더없는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마존현세강림기 6권 (25)
5장 몰아넣다 (5)
“……제길.”
자신의 저택을 바라보는 노영덕의 얼굴은 영 편치가 않았다. 간밤 에 스트레스를 풀고 오기는 했지 만, 집을 보니 다시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차를 댄 노영덕이 밖으로 나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치익.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담 배 한 대를 문 노영덕이 조금은 허무한 시선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 꼴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니 속이 쓰렸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부대를 지금 당장 뒤집어놓는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타 이밍을 봐야 하는 것인지가 고민 이다.
군대에 보낸 아들이 정신병까지 걸려서 집에 왔다는 것은 이용하 기에 따라서 좋은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고위층 자제의 복무
회피가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이 입대를 했다가 화를 당했다면, 국민의 동 정과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성적으로 할일이 아니야.’ 저질러야 한다면 크게 저질러 버리는 편이 낫다.
이번에는 언론도 그에게 비판적으로 나설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면 이 기회에 군부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주장하며 화제를 끌어모을 수도 있었다.
“꼰대들이 거품을 물겠지만 말이야.”
버럭질을 해 댈 군 장성들을 생
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지 만, 당과 적당히 협의할 수 있다면 반발을 억누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굳힌 노영덕이 담배를 비벼 끄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노수봉의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고 결론을 내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관으로 들어선 노영덕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 었다.
“뭐라고?”
비서의 얼굴이 참담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간밤에……”
“비켜!”
노영덕이 비서의 어깨를 밀치고는 노수봉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넋 이 나간 듯한 노수봉의 모습이 보였다.
“ 수봉아?”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 명함에도 노수봉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야,야, 이놈아!”
노영덕이 노수봉의 얼굴을 부여 잡았다.
풀려 있는 동공.
벌어진 입.
그리고 그런 입가로 줄줄 흘러 내리는 침.
노수봉은 아예의식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수봉아! 이놈아! 내 말 안 들리 냐! 수봉아!”
뺨을 후려치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댔지만, 노수봉은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조금도 반 응하지 않았다.
노영덕이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잘 감시하라고 했을텐데?”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 았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 이 꼴이 됐다
고?”
노영덕이 손에 잡히는 것을 모 조리 잡아 던지며 소리쳤다.
“의사데려와! 당장! 지금 당장! 이 새끼들아!”
부우우웅.
차는 낮은 엔진 음을 내며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조규민은 힐끔 룸미러를 바라보 았다. 뒷좌석에 타고 있는 강진호는 눈을 감은 채 몸을 시트에 기 대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강진호가 차에서 자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생각이 많을 때 식으로 눈을 감고 고는 했다.
조규민이 천천히
“회장님을 만난 두었습니다.”
강진호가 천천히
“다만, 회장님께서 그러면 이번 외진은 어떻게 하냐고 하시더군요.”
강진호는 저런 생각을 정리하
입을 열었다. 것으로 처리해
눈을 떴다.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다음 외진 때까지 괜찮을 거라 고 전해 주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절 못 믿으십니까?”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조규민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달라졌어.’
과거의 강진호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되레 친절하게 설명을 하려 들었겠지. 무뚝뚝 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대화를 걸 어온다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 강진호였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조규민은 최근 강진호의 심경에 변화가 생 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강진호는 자신이가 진 힘을 천천히 드러내고 있었다.
행동도 그에 걸맞게 조금씩 변 하고 있다.
‘그럼 마지막은?’
조규민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미 강진호가 자신의 힘을 드러낸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과거 그 모습에 조규민이 받은 충 격은 극심했다.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규민은 알고 있었다. 일견 예의 발라 보이는 지금 강진호의 모습이 일말의 부자연스러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의 강진호는 스스로 빗장을 치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있는 맹 수와 같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감옥 밖에 있는 존재
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가둔 맹수.
그런데 지금 그 빗장이 슬그머니 열리려 하고 있었다.
등 뒤를 타고 흐르는 전율과 미 묘한 공포.
조규민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제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묻지 않았다.
그는 비서 출신이다. 그가 홍fl야 하는 일은 강진호를 보좌하는 것이지, 강진호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차를 향해 걸어올 때.
그의 얼굴에서 채 빠지지 않은 살기를 보고 만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진호가 그런 얼굴을 보였다면…….
조규민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마라.
모셔야 할 사람을 재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그는 그저 윗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설령 그게 쉽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우웅.
그를 구해준 것은 짧게 울리는 휴대폰이었다.
“ 흠?”
조규민이 휴대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하고는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강진호씨.”
“ 예.”
“아무래도 복귀는 좀 늦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예?”
강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 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조규민이 룸미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주영기 씨가 깨어났답니다.”
끼이 이익.
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진호가 차 밖으
로 발을 내디뎠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표정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강진호는 차 문을 닫고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초 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 던 강진호가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탁탁탁탁!
사람이 드문 계단에 강진호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15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강진호가 주 영기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 왔냐?”
주영기가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손을 들었다.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해쓱하지만 분명 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 금까지 그가 보아온 잠들어 있는 주영기가 아니었다.
“가까이 좀 와봐. 아직 흐릿하다.”
“어.”
강진호가 주영기를 향해 다가갔다.
주영기는가만히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보고는가볍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강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가만히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야, 진호야.”
“응.”
주영기가 조금은 장난스러운 얼 굴로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응?”
주영기가 씨익 웃었다.
“하, 살 것 같다.”
“걸리면 안 될텐데……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냐, 그럼.”
“음……”
강진호는 휠체어에 탄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 밖으로데 리고 나와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있지만, 이미 한차례 검사가 끝났 다고 하니…….
‘안 되는 거지.’
강진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검사를 하든 말든 한 달가까운 시간 동안의식이 없던 사람에게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게 하는 건 문저였다.
“얼른 들어가자.”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내놔.”
“……”
강진호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주영기에
게 내밀었다.
“크……
주영기가 세상에 다시없을 표정으로 담배를 바라보더니, 냉큼 받 아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여주자 아주 천천히 담 배를 빨아들인 주영기가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파랗네.”
“그래.”
“하늘은 파랗구나.”
주영기의 눈은 조금 아련해 보였다.
강진호는 그런 주영기를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힘이 하나도 없다.”
“그렇겠지. 한 달이나 침대에 누 워 있었으니, 근육이 다 빠졌을 거다.”
“내 몸이 이 꼬라지가 되다니, 얼마나 먹어야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르겠네.”
주영기가 피식 웃으면서 담배를 빨더니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 어질어질한 거 보소.”
“이 기회에 끊지?”
“말이 쉽지, 새끼야.”
주영기가 낄낄 웃더니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 진호야.”
“ 말해.”
“ 고맙다.”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고맙다는 걸까?
김학철과 노수봉에 관련된 일은 아직 주영기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고맙다는 걸까?
“날 이 병원에데리고 온게 너 지?”
“……그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세상천지 다 뒤져 봐도 나를 이렇게 대접해 줄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거든.”
주영기가가만히 웃었다.
“나중에 이은혜는 꼭 갚을게.”
“갚을 필요 없어.”
“갚는다니까? 너 사나이 주영기 모르냐?”
“필요 없으니까……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주영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왠지 나른한 듯한 그의 모습이 강진호에게 아프게 박혀왔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주영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마지막에……
“ 응?”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르지.”
주영기는 손에 든 담배를 재떨 이에 비벼 껐다.
손을 털며 너스레를 떨던 주영 기가 조금은 힘겨운 듯 입을 열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아, 이제 이렇게 죽는 거구나’라고 느낀 순간에 말이야.”
주영기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한 사람, 누군가 한 사람만이 라도 내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줬 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강진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 었다.
손을 뻗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었다.
주영기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손을 뻗어야 했다. 원장 수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
강진호의 눈이의문으로 물들었다.
“……있었구나.”
주영기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가만히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있었구나. 손을 뻗으면 잡아줬
을 사람이…… 있었구나.”
강진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먼저 뻗었으면 됐을텐데 말이야. 멍청했지.”
주영기가 머쓱한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쓸데없는 짓은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강진호는 대답 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런데 주영기는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 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영기는 어디에서 그런 점을 느낀 것일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렵구나.’
먼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그 무엇보다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진호가 다른 사람의 약함 마저도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강진호는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장 수녀님.
차가움을 한껏 담은 겨울의 공 기가 오늘따라 조금은 훈훈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