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856)
마존현세강림기-1858화(1855/2125)
마존현세강림기 75권 (17화)
4장 기다리다 (2)
또옥! 또옥! 또옥!
떨어지는 물소리가 귀를 파고든 다.
아니.
이제는 청각이 아니라 신경으로 직접 소리가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극한으로 날카로워진 감각은 소리뿐
아니라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서 만들어낸 공기의 파동마저 잡아 낸다.
들린다.
심장이 뛰는 소리.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왔다 빠져 나가는 소리.
심지어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들 어본 적이 없는, 피가 흐르는 소리 마저 생생히 잡히고 있었다.
바토르는 절감했다.
‘이해’라는 것은 언제나 모호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더없이 믿어
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육체가 어떤 것인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 었다.
그의 뼈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 는가, 뼈를 두르고 있는 근육의 무 게는 얼마인가, 몸에 흐르고 있는 혈액의 양은 얼마나 되는가.
우스운 일이다.
믿음이란 이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믿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이해하고, 그 대상이 가 지는 가치를 판별해야 하는 법이다.
방패가 얼마나 단단하고 어느 정
도의 충격을 받아낼 수 있는지 모르 는데 그 방패를 믿고 전투에 나설 수 있는가?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그 검을 믿고 싸울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까지의 바토르는 그래 왔다.
스스로의 육체가 강하다고 믿어왔 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이해하지 못 했다. 그리고 그 육체의 강함이 어 디에서 오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육체는 믿음 의 대상이 아니라 맹신의 대상이었 으니까.
신앙을 뛰어넘는 굳건한 믿음이 그의 육체를 지탱하고, 그의 무학을 지탱하고, 그를 지탱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그저 허상으로 변해 버렸다.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평생을 연구해 온 이론이 틀렸다 는 것을 알아버린 학자?
모든 것을 바쳐 믿어온 신이 실 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아버린 광신도?
그어떤 말도 지금의 바토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하나 그 깊은 허망 함 속에서 바토르가 잡은 것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내려놓으라.’
수도 없이 들은 말.
‘비워라.’
지겹도록 들은 말.
그럼에도 할 수 없던 일.
머리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과 그 걸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너무 다른 일이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방법은 너무
도 간단하다.
양팔을 위아래로 휘저어 만들어낸 양력이 몸의 무게보다 더 강해진다 면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 이 누가 있는가.
안다는 것과 실행한다는 것은 다 른 것.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을 버리고 재정립하면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은 누구나 알지만, 그건 인간의 몸 으로 하늘을 날겠다는 것과 그리 다 르지 않은 말이다.
얼마나 추락했을까?
얼마나 절망했을까?
한없는 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 라앉던 바토르는 마침내 자신을 이 루는 근원과 마주했다.
‘이해했다.’
그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 알아챘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 나는••••••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바싹 마른 시체처럼 보이는 바토르 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맺힌다.
“나……는……
입이 벌어지는 순간, 굳어버린 입
술이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몸 안에 흐르는 혈액조차 거의 말라 버렸는지, 검붉게 변해 버린 속살이 드러났음에도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의식은 순간순간 멀어지고, 호흡 은 금방이라도 끊길 듯 가늘게 또 가늘게 이어진다.
천신과도 같던 바토르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것은 그 철 탑을 연상케 하던 완벽한 강건함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던 완벽한 오만 이었다.
빛이 바란다.
수백 년을 이어온 거대한 석벽이 금이 가고 으스러지듯,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바토르가 스스로를 잃 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바토르가 손을 뻗어냈다.
먼 곳.
그 손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더욱 천천히.
‘ 나는•♦••••
바토르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를 떠받치던 자신만만함은 온데 간데없다. 타인을 깔아보던 오만함
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의 표정 에 남은 것은 그저 온화함뿐이었다.
‘나는 틀렸어.’
육체를 이해한다.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자신을 지탱해 오던 육체를 뛰어 넘는다.
웃기는 소리.
왜 몰랐을까, 그것조차 집착이라 는 것을.
육체를 뛰어넘는 게 아니다. 그가 어떤 육체를 가지고 있든, 그가 어 떤 육체와 함께하든 그는 그저 그일 뿐이다. 그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그를 지탱해 오던 육체가 아니라 그 저 그 자신.
무인으로서의 바토르다.
‘주먹은 어떻게 쥐는 거더라?’ 펼쳐진 주먹이 천천히 쥐어쥔다. 새끼손가락부터 하나하나 구부려 진 손이 원형을 이루고, 굽혀진 네 손가락 아래를 엄지가 든든히 받친 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지.’
그래. 이건 그의 무학의 근원.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했다. 모 든 것이.
어떤 범도 시작부터 범일 수는
없는 법.
그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육체를 안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가 미 숙하기 짝이 없던 시절, 자신을 떠 받들 수 있는 육체를 아직 가지지 못했던 시절.
그때도 그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 두 주먹으로 자신의 길을 열었다.
‘왜 몰랐을까?’
그의 무학은 완벽한 육체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두 주먹에서 시작했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형태의 주 먹을 만들어낸 바토르가 두 눈을 감 았다.
마음 안에 있다.
그의 원형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고오오오오오오!
그 말과 동시에 바토르의 몸에서 검고, 붉고, 푸른 기운들이 물 흐르 둣 새어 나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 는 것.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마음속 에 있는 원형으로 돌아간다는 것.
바토르에게 있어서 벽을 넘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어디에서 왔는가.
시작은…… 그래.
시작은 초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초원. 끝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만지면 묻 어 나올 것 같은 새하얀 구름. 그리 고 그 하늘 아래서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어머니와 같은 초원.
그 초원에서 작은 소년이 권을 펼쳐 낸다.
높디 높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 속에서 소년은 작고 하찮 을 뿐이다. 하지만 소년의 발끝은 대지를 디뎌내고, 소년의 주먹은 하 늘을 찌른다.
바토르가 소년을 본다.
바토르가 바토르를 본다.
저 작은 소년은 바토르의 과거이 자, 바토르가 잃어버린 것이자, 바토 르가 아닌 무언가였다.
‘ 잃었구나.’
자유로움을.
소년의 모습이 점점 변해간다. 투명하게…… 점점 더 투명하게.
아니, 푸르게.
바토르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몸이 굽고, 털이 자라난다. 하지 만 그 광경은 끔찍하다기보다는 차 라리 신성해 보였다.
마침내 완연한 짐승의 모습이 된 소년이 네 발로 땅을 짚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른빛의 털이 초원의 바람에 휘 날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토르가 자 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푸른 늑대.’
다르리라.
푸른 늑대는 초원 전사들의 혼이 다.
언젠가는 바토르도 죽어 초원의 푸른 늑대가 되어 끝없는 대지를 달 리고 또 달릴 것이다.
그래, 그래야 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저 자유로움을.
어디에도 얶매이지 않는 저 초원 의 자유를.
언제부터였을까, 초원의 바람 소 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초원의 풀내음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된 때가.
‘자유로움.’
한없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그가 언젠가부터 육체의 굴레에 갇혀 있 었다.
드높은 성벽으로 세우고 외부와 자신을 완벽하게 격리하는 성처럼 그는 육체를 세워 바깥과 자신을 분 리 했다.
얻어낸 것은 안온함.
하지만 잃은 것은 자유로움.
왜 몰랐을까.
안주할 땅을 찾는 이에게 자유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영원 히 떠도는 길 위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는 이라는 것을.
고오오오오오.
흘러나온 기운들이 바토르의 육체 를 감싸고 돈다.
마치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안아 들 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서로 섞이지 못하고 나뉘어 흐르 던 기운들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 기 시작한다.
마기, 아니면 혈기? 그도 아니 면…….
아무려면 어떤가.
자유란 포용이다.
그가 마기를 지닌다고 해서 바토
르이지 못할 이유가 없고, 사기(邪 氣)를 지니지 못한다 해서 바토르이 지 못할 이유가 없다.
초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 위에 선 자라면 누구나 초원 의 자식.
평생을 초원에서 살아온 이도, 멀 리 초원을 떠났다가 늙고 지쳐 다시 초원을 찾는 이도.
그저 초원의 자식.
초원은 그 무엇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신을 내준다.
고오오오오.
늑대의 모습이 다시 변하기 시작
한다.
털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이가 사 라지고, 그 발톱마저 부드러워진 늑 대의 모습이 천천히 아이의 모습을 변해간다.
바토르.
어린 시절의 바토르가 고개를 들 어 지금의 바토르를 바라본다.
그러고 나서…….
그 어린 바토르의 모습이 천천히 자라난다.
얇디얇던 팔과 다리는 점점 더 두터워지고, 마른 가슴에는 커다란 근육이 자리한다.
완전한 성장을 이룬 바토르가 소 년의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눈빛으 로 가만히 지금의 바토르를 바라본 다.
헛웃음이 났다.
같다.
하지만 다르다.
그 모습은 같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은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같은 모습임에도 저 바토르에게서 는 한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저게 진정 바토르가 원한 모습이 었을까?
그도 알지 못하던 그의 진정한
바람이었을까?
‘아니야.’
저 모습에 집착하는 것 역시 자 유롭지 않다.
바토르는 그저 바토르일 뿐이다.
자신을 잊은 바토르도, 초원을 잊 은 바토르도, 스스로의 육체에 집착 한 바토르도.
그래, 그저 바토르일 뿐이다.
‘나는 그저 나다.’
지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저…… 그래, 그저…….
“ 나는••••••
바토르의 입가에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나는 나아간다.”
지금까지 그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신을 향하여.
고오오오오오오!
뒤섞여 물결치던 기운들이 이내 하나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푸른.
그저 푸른.
초원의 색을 닮은 푸르른 빛으로 물든 기운들이 바토르의 육체를 휘 감아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잊지 마라.
벽을 앞에 둔다는 것은 그 벽까
지 걸어왔다는 것.
비록 똑바로 걸어오지 못했다 해 도 지금까지 그가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는 걸.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그저 받 아들인다.
더 나아갈 한 걸음을 위해서.
화아아아아아아악 !
바토르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도 도한 강처럼 흘러나온다. 흐르고 흐 른 푸른 기운이 바토르의 세상을 온 전한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마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푸른
초원처럼.
그 드넓게 펼쳐진 초원 위.
두 다리로 당당히 대지를 밟고 선 작은 아이가…….
바토르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 었다.
이윽고 소년의 모습까지 지워버린 푸른 기운들이 석실을 완전히 채우 며 바토르의 몸을 감쌌다.
더없이 푸르고, 또 푸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