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880)
마존현세강림기-1882화(1879/2125)
마존현세강림기 76권 (16화)
4장 전율하다 (1)
조르르륵.
커다란 디켄더에서 자줏빛 액체가 더없이 가늘게 흘러나와 투명한 유 리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 가 손을 뻗어 잔을 들어 올렸다.
와인에서 풍겨오는 농후한 향을
음미하던 사내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와인을 음미했다.
“흠.”
탁.
잔이 투명한 유리 테이블 위에 조금 거칠게 올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좋아. 최근에 먹은 와인 중에는 최고로군.”
그 평가에 리우양의 얼굴에 확 밝아졌다.
와인의 품질이 반드시 가격에 좌 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돈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값어치 있는 와
인은 비쌀 수밖에 없다. 지금 혹왕 이 마시는 것은 브랜딩이 되어 있지 않은 와인.
소수의 장인들이 극소량만 생산하 는 수제 와인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빈티지를 어렵게 구한 제품이다.
물론 가격은 들으면 입이 쩍 벌 어질 금액이지만, 흑왕의 입에서 좋 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면 차라 리 싸게 느껴질 정도였다.
“ 다만••••••
“••••••예?”
“그래. 그저 좋을 뿐이지.”
흑왕이 유리잔을 잡아 가볍게 흔
들자, 잔 안에 든 자줏빛의 와인이 술잔 안에서 찰랑였다.
“오래 산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야.”
“처음은 뭐든 재미있지. 왜 그런 말 있잖아. 어릴 적에는 조잡한 게 임만 해도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는 데, 이제는 눈이 돌아가는 그래픽과 다채로운 시스템의 게임을 해도 채 한 시간 이상 플레이하지 못한다 는 ”
“ 예.”
“왜 그럴까? 예전의 게임이 가진
본질을 지금의 게임들이 잊었기 때 문일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게임이라는 걸 하지 않으니 까.
“그런 게 아니지.”
흑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람은 자극에 익숙해지는 법이 야. 특히나 뇌가 아직 말랑말랑 할 때는 새로운 자극을 받으면 더없이 즐겁지. 재미있는 게임, 더 맛있는 음식, 입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음 료.”
“하지만 경험이 반복되면 그 모든 게 무뎌지지. 아무리 좋은 와인을 마신다고 해도 처음 와인을 먹었을 때의 강렬함에는 미치지 못하고, 아 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어릴 적에 먹은 음식이 남긴 추억을 이길 수는 없어.”
리우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 다.
그는 게임을 즐기지는 않지만, 비 슷한 경험은 이미 해보았다. 이건 누구라도 나름 공감할 수 있는 이야 기일 것이다.
“물론 이 와인은 더 좋지. 과거에
마신 것보다.”
흑왕이 피식 웃고는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하지만 그저 더 좋다일 뿐이야. 그건 무척 좋은 평가인 동시에 별것 아니라는 말도 되지.”
미련을 놓은 손이 잔을 내려놓았 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가 다리를 꼬며 나른한 얼굴을 했다.
“자극에 무뎌진다는 게 무슨 의미 인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하루가 길어지지.”
“육체가 함께 노쇠하는 이들에게 는 시간조차 짧아질지 모르겠지만, 육체의 노쇠가 멈춰 버린 나 같은 인간은 동일한 시간을 더 지루하게 보내게 된다는 말이야.”
흑왕의 얼굴을 지루함이 지배한 다.
“솔직히 이건 고문의 영역에 가까 워.”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시간이 끝 없이 이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미쳐
버리거나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되 겠지.”
“흑왕께서는 후자 아니십니까?”
“내 까짓 게?”
흑왕이 키득키득 웃었다.
“아, 오해하지 마. 비웃은 건 아 니니까. 그저 조금 웃겨서 말이야.”
“내가 성인 같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설사 될 수 있다고 해도 거부하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성인이란 그런 거잖아.”
흑왕이 손을 살짝 벌려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신이라 기에는 모자라지만,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도 위대해서 다른 인간들과 그 격을 나눌 수밖에 없는 존재 말이 야.”
리우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생각하는 성인의 정의와 완 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충 비슷 한 느낌이다.
“난 그냥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만 족하지. 성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칭 송받는 건 내 역할은 아니야.”
“흑왕께서 달성하실 위업이라면
성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합니다.”
“성인과 위인은 구분하자고. 하기 야 위인이라는 말도 이상하긴 하지. 히틀러를 위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니까. 홈, 뭐라고 해야 하지? 역사적 유명인?”
흑왕이 낮게 웃었다.
“그 말도 뭔가 어울리지는 않는 군.”
흑왕이 손을 뻗어 다시 와인을 잡았다.
“사람이란 참 재미있는 존재야. 모든 것이 점점 무뎌지지만, 마지막 까지 그 미약한 차이를 포기하지 못
하지. 미각이 주는 기쁨이 더는 행 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해도 아 무거나 먹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 야.”
“미각만은 아니겠지.”
흑왕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그의 삶도 이와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어쩌면 그가 원하는 것은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닐지도 모른 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안정.
아니.
어릴 적 먹은 맛을 잇지 못한 이
가 나이가 들어서도 다시금 그 맛을 보기 위해서 과거에 살던 동네를 들 락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 다.
이미 그가 가던 가게는 문을 닫 고, 그 음식을 만들어낸 이를 찾을 길도 없다.
평범한 이들은 그때쯤에는 포기해 버리기 마련이지만, 흑왕에게는 포 기하기에 너무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기억을 더듬어 직 접 만들어내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결국…….
기억에 의존해 완벽한 맛을 찾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 고, 설사 완벽한 맛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맛이 지금의 그에게 큰 감흥을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저 실망만하고 끝날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럴 확률 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보는 게 인간이란 거 지.’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잊는 순 간, 모든 것이 뒤틀린다.
무학을 배워 하늘을 날고, 맨손으
로 산을 부순다고 해서 사람이 신이 되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남들보 다 힘이 조금 더 강한 인간일 뿐이 었다.
잊지 않아야 한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무너지리라는 사실을 흑왕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흑왕이 가만히 와인을 바라보았 다.
“일전에 말한 건 어찌 되었나?”
“준비는 끝났습니다.”
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인은 얼마쯤 되었을까?”
“빈티지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 았습니다. 불과 오 년 전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흑왕이 고개를 돌려 디켄더를 바 라보았다.
“시기라는 건 와인과도 비슷하 지.”
“완벽한 포도와 완벽한 제작 과정 을 거쳐 술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뒤에는 반드시 숙성의 과정이 필요 하지. 시간과 함께 조화되며 완전히 무르익을 때가 말이야.”
“그렇습니다, 흑왕이시여.”
“하지만.”
흑왕이 손을 뻗어 디켄더를 움켜 잡았다. 동그란 원형의 병 안에 든 와인이 가볍게 일렁인다.
“때로는 더 기다릴 수 없을 때가 있지. 그럴 때는 이 디켄더처럼 강 제로 모자란 시간을 맞출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야. 그렇지 않나?”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시작해 보지.”
흑왕의 입가가 비릿한 미소를 지 었다.
“와인과 삶의 다른 점이라면……
와인은 빈티지를 통해 숙성의 시기 를 가늠할 수 있지만, 삶이란 뚜껑 을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거겠지. 시기가 무르익었는지, 아니 면 조금 이른지, 그것도 아니면 이 미 시기를 놓쳤는지.”
흑왕이 디켄더째로 와인을 홀짝였 다.
“그래서 삶이란 재미있는 거지.”
이런 재미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면 그의 삶은 더욱 무채색이었을 것 이다.
“리우양.”
“예, 흑왕이시여.”
“어떤가? 자네는 떄가 무르익었다 고 생각하나?”
리우양이 흑왕을 빤히 보다가 입 을 열었다.
“하나는 확실합니다.”
“그게 뭐지?”
“적어도 늦지는 않았을 겁니다.”
“ 이유는?”
리우양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가 시기를 놓쳤다면 흑왕께 서 그걸 모르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 다.”
“ 아부는.”
흑왕이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
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모든 조건이 완벽해지는 순간만을 바라며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완벽해졌는가?
‘알 수 없지.’
말했다시피 그는 신이 아니다.
인간은 노력하고 그 결과를 예측 할 뿐, 미래를 알 수는 없다. 결과 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선택이 최선 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제는 확인을 하러 가야지.”
그의 기다림이 과연 옳았는지. 그가 바꿀 미래가 과연 옳았는지.
그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수많은 것들을 확인해야 한다.
“십이비도에게 소집령을 내려.”
“예!”
“한번 움직이면 자력으로는 멈출 수 없어. 알고 있겠지?”
“저는 오직 이 시간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설사 멈출 방법이 있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군.”
혹왕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역사가 바뀔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런 명령을 내리는 장소가 적당한 별장의 소파라는 사실이 아 이러니하다.
하지만 삶이란 애초에 그런 것.
그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가 처음 강진호에게 말을 건넸 을 때도 딱히 대단한 노림수가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이, 그의 계획에 가장 맞아 떨어지는 이를 찾았을 뿐.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이 눈덩이를 굴려 세상을 바꾼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흑왕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창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거실을 두 른 전면 창으로 포말이 부서지는 해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강이 바다로 홀러 들어가 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잠시 잡아둘 수 있을 뿐이야.” 혹왕의 손이 유리에 가닿았다.
“그래. 나는 그걸 바꾸고 싶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바꾸고, 세상의 흐름을 부수고 싶다. 그럴 수 있겠지. 나는 역행자니까. 애초에 세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비껴난 귀환자니까 말이야.”
카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리가 산산 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진다. 그와 함께 거친 바람이 그가 있는 곳으로 밀려 들어왔다.
“시작해라, 리우양.”
“예!”
리우양이 그 자리에서 부복했다.
하지만 흑왕은 뒤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몰아치는 파도를 그 눈에 담았다.
‘나는 인간이다.’
성인들은 세상에 순응하라 한다.
받아들이고 온화하라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
인간이란 순응하는 자가 아니라 저항하는 자다.
인간은 병을 정복하고, 환경을 짓 밟고, 심지어 같은 인간마저 베어 죽이며 여기까지 왔다. 저항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저항했기에 인류가 여기까지 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러니 저항해야지.’
설사 그의 저항이 단말마가 되어 부서진다 하더라도, 순응해 썩어가 는 삶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저 바다 너머로 향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 너머에 그가 있다.
“자, 이제 선택하셔야지. 나의 친 구, 나의 주군이여.”
그 선택이 올바르기를 바라며 흑 왕이 작은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